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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지음, 이민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한가람미술관의 고야 전시회 얼리버드 티켓을 구입한 후 생각하니 정작 고야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화가 이름은 그래도 들어봤는데, 작품은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 정도만 떠오를 뿐. 이 책을 뒤적거리니 그나마 <사투르누스>도 본 기억이 있다.
예습 차원에서 고야 관련 책을 읽으려고 하니, 확실히 저명한 예술가답게 관련 도서도 제법 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이 제일 무난할 것 같다. 신국판보다 조금 더 큰 판형에, 100쪽에 못 미치는 얄팍함이 오히려 독서에 부담이 없다. 고급지에 수록 그림도 선명하다. 본문의 글자 크기가 다소 작고 빽빽한 게 불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삶을 온전히 추적하는 대신, 화가로서 고야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크게 일곱 개로 특징지어 각각의 장으로 집중하여 다룬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화가로서 고야는 무명 시절의 태피스트리 밑그림과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단지 밑그림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자체로도 의의가 있다. 태피스트리 제작자가 제작에 난색을 보일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꼭두각시> 같은 작품에서는 장식성을 넘어서 상징적 비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후기의 고야가 결코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초상화가로서 대표작에 화가 자신이 슬며시 등장함도 이색적이다.
소위 ‘저항하는 지성’으로서 고야는 <로스 카프리초스>와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고야는 건강상의 위기를 겪고 청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고야의 주요 걸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문득 작곡가 베토벤이 떠오른다. <로스 카프리초스> 단색 판화에 거칠게 표현되는 환상과 악몽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인간의 악행과 무지, 종교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던 당대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스페인 지배, 왕정복고 이후 시행된 반동 정치에서 무수한 피해를 당하는 계층은 결국 힘없는 민중들이다. 그들 처지에서는 전쟁과 죽음을 일삼는 지배층은 모두 똑같을 따름이다.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은 전쟁과 이것에서 비롯한 온갖 비인간적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노년의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은거하며, 오로지 자신을 위한 작품활동에 매진하는데, 이것이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검은 그림’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유명한 <사투르누스>는 물론 <산이시드로 순례여행>, <곤봉 결투>를 보면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저절로 뭉크처럼 절규하게 된다.
어두운 그림들은 교회에 의한 구원의 약속과 계몽주의에 의한 삶의 조건의 향상 모두에 깊은 회의주의를 입증한다. 이는 단지 회의주의가 아니라 절망이었을 것이며, 공허한 하늘에 존재하는 날아다니는 마녀와 악마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P.76)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에서 마하(원래는 마야로 잘못 알았다)가 모델 여성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완전히 틀렸다. 마하는 하류층의 여성을 일컫는 용어로서 남성형의 마호와 짝을 이룬다. 이들이 어떤 유형의 여성인지는 비제의 오페라 여주인공 카르멘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함과 도발적인 태도, 뜨거운 열정을 지닌 여성. 그래서일까, 옷을 벗은 마하는 관객의 시선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무표정하게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이 책에서는 마르시알리다드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당대 스페인에서는 종교적으로 누드화가 금지되어 종교재판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마하의 자유로움은 인습과 속박에 억눌린 상류층 여성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고, 마하의 옷차림이 패션으로 유행하였다고 한다.
마호의 상대인 마하는 자신의 도발적인 매력에서 기쁨을 찾는 격정적인 여인을 뜻했다. 뻔뻔하면서도 재치 있게 답해야 했으며, 오렌지와 밤을 팔거나 귀족 가정의 하녀로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대개는 자기의 마호를 먹이고 입혀야 했으므로 일을 열심히 했다. (P.10)
말년의 고야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일종의 망명 생활을 한다. 혼란스러운 스페인에서 안전을 기약할 수 없었던 그는 <보르도의 황소들> 석판화 연작에서 투우를 소재 삼는다. 이미 수년 전 <타우로마키아> 판화 연작을 남긴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태생적으로 스페인 사람임을 그림을 통해 입증한 셈이다.
고야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인문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왕실과 귀족의 기호에 영합하는 성공한 화가 이면에 자리 잡은 어둠과 비극, 고통, 절망, 환상을 담은 그의 후기작들을 둘러싼 해석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가 던진 미적 본질에 대한 의문과 화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은 후배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니, 19세기 전후를 풍미했던 당대의 화가를 넘어서 현대까지도 지속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기준을 수립했다. 또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두려움과 야수적인 충동을 눈으로 보이게 했다. 당시 어떤 화가와도 달리, 고야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넓혔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처음으로 이를 감지했고, 20세기의 잔혹한 전쟁은 그의 인간에 대한 시각을 공포스럽게 확인시켰다.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