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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
레이너 윈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3월
평점 :
우리는 날마다 걷는다. 그럼에도 마음먹고 걷는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러닝족에게 러너스 하이가 있다면, 워킹족에게는 워커스 하이가 있다고나 할까. 그것은 전자의 쾌감과는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지럽던 머리가 가뿐해지며, 들뜬 감정이 차분해지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제주올레길 완주, 국토대장정 같은 장거리 걷기가 나름 지지층을 얻고 있으며 해외로 눈을 돌리면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오래전에 읽은 <나는 걷는다>(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실크로드 대장정, 수년 전 읽은 <와일드>(셰릴 스트레이드)가 다룬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그리고 여기 이 책의 주인공이 걷는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 등. 이러한 길이 걷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줌에도 꿋꿋이 존재하고 있음은 단지 완주했다는 정복욕만은 아닐 것이다.
영국 남서부의 해안을 따라 걷는 1,000km의 코스. 젊고 건강한 때, 별다른 삶의 고민이 없을 때 걸었다면 비록 육신은 힘들더라도 더할 나위 없는 흥미롭고 즐거운 트레일이었을 것이다. 레이너와 모스 부부는 그렇지 않다. 설상가상이란 표현은 이런 상황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이리라. 경제적 파산과 모스의 불치병이 동시에 닥쳤고, 몇 푼만 손에 지닌 채 살던 집과 농장에서 쫓겨난 50대 부부.
그리고 이제 저 문밖을 나서게 되면 모든 것이 다 과거의 일로 남게 될 터였다. 그동안 가꿔온 삶이, 인생이 다 끝나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P.17)
이들에게 떠난다는 것, 즉 무작정 걷는 행위는 불가항력이자 유일한 선택지다. 머무른 채 노숙자가 되고 모스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볼 게 아니라면, 그들은 떠나야 한다. 어디론가?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모스와 더불어 레이너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또 다른 노숙의 길을 떠난다.
아무리 미친 짓이라고 해도 우리는 해내야만 했다. 만일 이 길을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이번 여름을 넘어 계속해서 펼쳐질 미래와 그 미래에 있을 모든 일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스도 나도 그런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P.66)
이 책의 미덕은 우선 대다수 독자에게 생소한 영국의 SWCP를 전면적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마인헤드에서 랜즈엔드를 거쳐 풀까지 이르는 영국 지도상 남서부 끝자락 해안 길을 걷는 코스. 마인헤드에서 랜즈엔드까지 해안이 높고 날카로운 절벽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대서양의 맹렬한 바람과 파도가 절벽을 때려서 생긴 수많은 코브(cove). 랜즈엔드에서 풀까지, 특히 풀에 가까워질수록 흰색의 토양이 우세해 백악기라는 명칭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도. 랜즈엔드는 우리네 땅끝마을과 같은 의미인 게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하다.
SWCP가 지나는 길에 있는 영국 남서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의 독특한 매력도 흥미롭다. 우리는 영국이라고 하면 런던을 우선으로 떠올리게 된다.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면 데번과 콘월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 지명인지 모를 정도다. 이렇게 영국 지방과 소도시의 존재와 특색에 대한 정보도 유익하다.
모스 부부는 팔자 좋게 배낭여행을 떠난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지급되는 보조금에 의지하여 음식과 물품을 구비해야 하기에 누가 봐도 궁핍하고 초라한 여행자의 외양이다. 세탁과 목욕을 자주 하기 어려우니 꾀죄죄한 행색에 냄새마저 풀풀 풍기는 그야말로 노숙자다. 여정에서 부닥치는 사람들 가운데 친절한 사람도 있는 반면 이들에게 거리를 두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야겠다. 중산층에서 일순간에 하층민으로 몰락한 모스 부부는 이러한 처지를 더더욱 뼈저리게 절감한다. 노숙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과 허술한 정책, 노숙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일반 대중의 인식 등.
무엇보다 모스 부부를 괴롭힌 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이다. 날이 갈수록 처지는 모스의 건강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 모스의 향후 부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레이너의 근심. SWCP를 완주할 수 있을지, 완주하고 나면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한 심정. 여정 내내 레이너를 괴롭히는 건 육신의 고통보다는 이러한 심적 번민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인생의 주인이었고 우리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등에 배낭을 짊어지자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는 다시 걷기로 결심했다. 그 선택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유를 붙들기로 한 것이다. (P.354-355)
<와일드>와 마찬가지로 결국 이 책도 모스 부부의 눈부신 미래를 보여주지 않지만, 적어도 시커먼 어둠과 잿빛의 어슴푸레함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모스는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육체적으로 강인해졌고, 미래 설계를 위한 생의 의지를 표명하고 선택한다. 추운 겨울을 피해서 걷기를 중단하고, 레이너가 친구의 농장에서 수개월간 더부살이를 하면서 양털 깎기 노동을 통해 번 돈은 미래를 향한 종잣돈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은 일견 무모하였지만 걷기를 통해 무너지지 않는 삶의 태도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낙담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더라면 모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 책도 당연히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을 터이므로.
내 안의 정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길을 한 걸음씩 지나갈 때마다 내 안에서는 뭔가가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P.383)
이 책 역시 온라인 마켓에서 새책 같은 헌책을 고르면서 싼 맛에 장바구니에 추가하였던 책이다. 원체 이런 유형의 책을 좋아하였기에 적어도 실망해서 집어던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5백 면이 넘는 두툼한 분량임에도 어려움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부부가 지나는 패스의 여정을, 구글맵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하여 뒤따를 수 있어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