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전쟁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미래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책들의 전쟁><영혼의 기계적 조작에 관한 담론>은 앞서 읽은 <통 이야기>와 부분적으로 주장하려는 요지가 중첩한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 상황에 대한, <아일랜드의 현 상황에 대한 소고><겸손한 제안>은 정치 상황에 대한 풍자적 글이다. 스위프트의 처절한 상황 인식과, 좌절감과 아이러니가 수록 작품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온다.

 

<책들의 전쟁>

 

우화의 형식을 빌린 산문 작품이다. 주제 의식이 너무나 명료하여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리스·로마의 고전학문과 현대학문 간 우열 논쟁을 다룬다. 도서관에서 해당 책들이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이다. 당대로서는 현대학문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이들 또한 고전학문이다. 데카르트, 베이컨 같은 저자가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제 이런 논쟁은 무용하다. 21세기의 현시점에서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은 지고의 선으로 인정받는다. 당장 국가와 사회의 경제발전과 개인의 부귀영화를 우선시하는 우리에게 현대학문은 무조건 우월하다. 물론 고전의 가르침과 재인식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게 현대학문을 대체하지 못하므로.

 

이 작품은 고전작가를 추켜세우고, 현대작가를 맹렬히 비판한다. 전자는 꿀을 모으는 벌이요, 후자는 독거미다. 전자는 머리가 아주 가벼운 사람이며, 비평이라고 불리는 악독한 여신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네들의 대변자인 워튼과 벤트리는 잡종 똥개로 묘사되며, 고전작가의 옹호자인 템플은 그리스 신들이 함께하는 당당한 기사로 묘사한다.

 

스위프트는 시류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내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고전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작풍은 오히려 현대학문에 가깝다. 그런 그가 고전학문을 현대학문에 비해 우위를 둔다는 점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찬찬히 살펴보면 묘하다. 그렇게 열렬히 지키고자 하는 고전학문 자체에 대한 장점과 유익함을 설파하는 대목은 찾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현대작가들의 병폐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스위프트는 애초에 고전학문의 우열 또는 옹호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동시대 작가들의 지적 얕음과 가벼움, 비판만을 능사로 여기는 태도, 저작 관습의 타락 등을 풍자하려는 게 그의 원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접근하면 이 작품은 더욱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는 또한 그녀[비평]와 자매 사이인 평판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을 가리고, 고집스럽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끊임없이 몸을 돌려대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의 자식들인 소음, 몰염치, 우둔, 허영, 현학, 무례가 놀고 있었다. (P.47)

 

<영혼의 기계적 조작에 관한 담론>

 

종교적 열광주의 혹은 광신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유사한 행태인 듯하다. 어쩌면 자체가 종교의 내재적 속성일지도. 종교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종교 간 갈등과 유혈 분쟁, 같은 종교 내에서 종파 간 다툼 등은 결국 특정 가르침을 절대 선으로 여기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나마 개인이 신앙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열광에 빠진다면 그것을 개인적 사안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인위적 조작에 의한 결과라면 전혀 다르다.

 

이 유명한 기술(즉 종교적 열광을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기술)을 시행하는 업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간다. 우리 지각 기관들의 몰락이 성령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P.97)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 입장에서 열광적 행태를 보이는 청교도 등의 비국교도와 신비주의 종파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의 분석은 흥미롭다. 조작자들은 사람들의 이성과 지각을 서서히 마비시킴으로써 광신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내용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 음성, 행동 모두가 한가지 목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숙련된 조작자라면, 고도의 이성을 지닌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사이비종교에 무지각적으로 빠져든 사람들의 예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이러한 수단이 종교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신앙을 넘어 정치, 이념, 사회적 사안은 물론 학문적 영역까지도 효과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데, 조작을 통해 영혼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다. 나치와 파쇼를 용인하고 지지한 독일과 이탈리아 국민이 형편없이 무지몽매한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와 종교 갈등으로 혈연 간에 죽음이 난무했던 역사적 경험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스위프트의 지적은 예사로 넘기기 어렵다.

 

성령이라는 선물을 팔아먹는 이 신비라는 것이 사실은 다른 여타 장사꾼들의 행위들과 똑같이 연습과 노력에 의해 숙달될 수 있고, 또 똑같은 훈련에 의해 습득될 수 있는 장사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P.107)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철폐론이 가당키나 한 주장인지 모르겠다. 합리와 이성의 인식이 성장하면서 기독교에서 불합리성과 신비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당대에 등장하여 제법 세력을 형성하였던 듯하다.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 사제이므로, 여기에 반대하는 논의를 전개하였음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산문 작품도 분위기가 묘하다. 정통주의라면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과 요지,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 피력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 저자의 진의가 표제 그대로 기독교 철폐론에 대한 반론인지 아니면 찬론인지 헷갈린다. 표피와 행간 사이의 엇박자와 묘한 긴장감은 스위프트 특유의 풍자와 아이러니로 인해 발생한다.

 

저자는 우선 자신의 글이 명목상의 기독교를 옹호하는 것이지, 진정한 기독교 옹호는 아니라고 선언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을 가리키는데, 그게 아니라면 당대의 기독교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모습의 초기 기독교는 이미 현재 우리 나라의 모든 부와 권력의 구도들과 너무나도 맞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동의하에 이미 완전히 포기되어 버리고 말았다. (P.141-142)

 

이후 그는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데, 기독교를 철폐할 경우 발생하는 실제적인 이익과 손해를 비교할 때 철폐에 반대한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일요일에 노동할 수 있으니 이익이라는 의견, 각종 파벌과 파당을 없앨 기회라는 점, 인간은 누구나 비난과 멸시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 제기되고, 철폐할 때 교역과 주식의 경제적 측면에서 손해가 크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나아가 저자는 기독교 철폐를 확장하여 종교 철폐에 더 본질에 접근하는 용어라고 제안한다.

 

기독교를 철폐하자는 건가 아니가. 스위프트의 속내는 당대의 기독교는 초심을 잃은 명목상의 기독교로 악폐에 찌들어 있으니, 진정한 모습의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다. 열광에 빠져들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상 종교 자체를 없앨 수 없으므로 철폐론에 대한 반론으로 기독교 개혁론을 내세운 게 아니겠는가.

 

<아일랜드의 현 상황에 대한 소고>

<겸손한 제안>

 

이 두 산문은 한 쌍으로 간주하는 게 옳다.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기에 스위프트는 비참하고 차별받는 아일랜드에 동정심을 품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온갖 불공평과 탄압에 신음하는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한 고찰과 함께 이 글에서 잔혹하면서 겸손한 제안을 아일랜드 당국과 영국에 제기한다.

 

아일랜드 사람은 나면서부터 가난과 기아, 탄압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굳이 이렇게 아이를 낳고 키울 필요가 없다. 아기들을 목장의 돼지와 소처럼 사육하고 도축하여 고가의 식용 고기로 제공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태어나느니 못할 불행한 운명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남은 가족의 삶이나 개선하고, 국가적으로도 효용성을 높이자는 제안이다. 지극히 잔인하며 냉소적인 주장인데 저자는 굉장히 담담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여 은근히 설득력 있는 게 아이러니다.

 

어떤 사람도 내게 이 방법 이외에, 우리 나라를 구제하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예를 들면, 우리의 부재 지주들에게 1파운드당 5실링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 [......] (P.206)

 

다른 개선 방안을 언급할까 봐, 저자는 사전에 차단한다. 보다 실천적이고 효과적이며 합리적인 방안을 죽 나열하면서 이따위 방법은 논외로 하라면서. 일견 허무적이기도 한데, 합리적 제안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통렬한 자기 인식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