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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에크베르트 - 독일대표단편문학선 ㅣ 세계단편문학선집 1
루이제 린저 외 지음, 이관우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9월
평점 :
<수록작품>
노벨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칠레의 지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금발의 에크베르트/ 루트비히 티크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 클레멘스 브렌타노
임멘 호/테오도르 슈토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르투어 슈니츨러
선로지기 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변신 / 프란츠 카프카
빵/ 볼프강 보르헤르트
붉은 고양이 / 루이제 린저
독일 근현대의 대표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대학생 교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대별 문학사조별로 대표적인 명작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대충 수록 작품 표제나 훑어봐도 명작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편의 작품 중에서 <칠레의 지진>과 <임멘 호>는 앞서 읽은 적이 있어 반가웠다. 클라이스트는 섣부른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자못 비정할 정도로 직진하는 그의 문장은 인간과 종교, 나아가 인간성의 아이러니 자체에 깊은 질문을 던진다. 슈토름의 단편은 청소년 작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가 버린 청춘의 아련한 추억은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다. 헤엄쳐도 호수 중심의 수련에 다가갈 수 없듯이 우리는 과거를 추억해야지 얽매여서는 안 된다. 라인하르트도, 엘리자베트도 모두 알고 있듯이 말이다.
<노벨레>는 괴테의 최후기작으로 표제 자체가 ‘노벨레’다. 중세의 옛날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배경과 구성인데, 영주 부인의 평화로운 자연 예찬은 마을의 화재로 깨어지고, 예기치 않은 호랑이와 사자의 탈출로 일순간 분위기는 급변한다. 서커스단 아이와 아버지의 노래와 피리 연주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데 사자의 순종을 비현실로 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대에서 음악은 자연의 질서를 반영한 예술로서 우주의 본질에 가깝기에 사자가 공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자가 패배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힘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자는 패배자가 아닌 길들여진 자, 스스로의 평화로운 의지에 모든 것을 내맡긴 자처럼 보였다. (P.37)
<금발의 에크베르트> 역시 중세풍의 민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인데, 진주나 보석이 들어 있는 알을 낳는 새의 존재가 한층 설화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금발의 에크베르트’라고 해서 여주인공으로 생각하였는데, 그가 기사임을 알게 되었고, 내용은 기사 아내 베르타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전개된다. 친구 발터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후 부부는 자신들의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움에 빠진다. 베르타가 새를 죽인 행동, 에크베르트가 발터에게 총알을 날리고 후고를 의심하게 된 행동 모두 일종의 원죄와 선택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베르타가 영혼 속 싸움에서 유혹을 극복하였다면 결말은 더 행복한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것은 제 영혼 속의 기이한 싸움이었으며, 제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적대적인 정신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지요. 한 순간에는 평온한 고요함이 무척 멋지게 여겨지다가 다시 온갖 놀랄 만한 다채로움이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념이 저를 매혹시켰지요. (P.68)
<착한 카스페를과 어여쁜 안네를의 이야기>도 또한 중세 배경의 민담이자 동화에 가깝다. 중편에 가까운 분량에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 구성을 지녀서 작가가 치밀하게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낭만주의 작품답게 두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데,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명예다. 착한 카스페를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까닭은 인륜과 윤리의 충돌에서 비롯됨이다. 어여쁜 안네를의 죽음은 처녀로서 자기 아이를 죽인 죄의 대가인데, 귀족의 유혹에 빠져 명예를 놓친 까닭이다. 손자와 대녀의 명예를 되살리고 헌신하는 노파와 그 이야기를 듣고 사방으로 애쓰는 화자, 비록 안네를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에게 명예로운 무덤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얽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명예 회복에 성공하였으니 비극적이지만 비극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순서를 바꿔 <빵>과 <붉은 고양이>를 먼저 보겠다. 둘 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를 배경으로, 물자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당대 독일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전자는 콩트에 해당하는 매우 짧은 작품인데, 배급된 빵의 양이 적어 배고픔에 한밤중 몰래 빵을 먹는 늙은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이 애절하다. 후자는 굶주림에 여위어가는 가족과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는 고양이의 대조, 이에 분노하는 화자의 고양이 학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족한 음식이나마 고양이에게 나누어주고픈 가족들의 마음도, 그런 가족을 보면서 화가 나고 고양이에게 미움과 증오를 품게 되는 화자의 마음 모두 어쩔 수 없다. 이는 시시비비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생과 사의 생존의 사안이므로.
나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내 동생들은 굶주리는데, 너는 살이 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어.” (P.299)
20세기 전반기의 작가와 작품 세 편이 하이라이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선로지기 틸>, <변신>, 각각 인상주의, 자연주의, 표현주의 사조에 해당한다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슈니츨러는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외면과 행동이 아니라, 내면과 무의식에 중점을 두는 작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보면, 남자는 유부녀와 불륜의 내연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폭풍우 치는 저녁에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마차를 몰아 둘 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마차 전복으로 남자는 죽고, 여자는 본능적으로 도망친다. 자신의 정체가 대중에게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녀를 비정하다고 욕하지 말자. 누구나 같은 순간에는 동일한 무조건적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므로. 위험의 순간에 인간은 철저히 개인주의자 나아가 이기주의자가 된다. 그녀가 마차 주변에 남아 서성거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죽은 남자가 되살아나지 않을 텐데, 그녀는 가족, 명예, 경제적 안정 등 모든 것을 잃게 될 뿐이다. 여기서 입에 발린 사랑의 가치는 현저히 위축되고 만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녀는 마주보이는 벽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데, 그것은 잔인하게 미소 짓고 있으며,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본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고 전율한다. (P.186)
<선로지기 틸>은 잔인한 소설이다. 자연주의 사조 자체가 지향하는 인생의 비극적 단면을 철저하게 헤집고 있다. 남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진 틸과 첫 번째 부인의 관계가 정신적, 영혼의 측면에서 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독자는 그녀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알게 된다. 틸의 서두른 재혼은 전적으로 아들 토비아스를 위한 것인데, 두 번째 부인의 세속적, 물질적 속성은 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꾹 참고 외면하는 틸이 안타까운 동시에 계모에게 학대받는 아들의 모습을 목격하는 틸의 비통함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절망감마저 자아낸다. 틸에게 결별을 고하는 첫 번째 부인의 환영, 그리고 아들의 철길 사고로 인한 사망으로 그는 생존의 이유를 상실한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틸이 못된 사람이 아님을 이미 독자는 알고 있다. 두 번째 부인이 악독하지만 일방적으로 매도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첫 번째 부인의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부인과 재혼, 계모와 전처의 자식 등 온갖 비극적 요소가 충분히 한데 모였다. 비극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그 정도만이 궁금하였을 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자 자신이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있는 것을 알았다. (P.227)
문학사상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시작 문장의 대표격이 아닐까. 카프카의 <변신>이다. 오늘날은 워낙 공상과 환상 문학이 유행하고 있기에 이 정도 설정은 평범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시간을 거슬러 백 년 전의 시도다. 카프카는 파격적 개시에 이어 아무렇지 않게 벌레가 된 잠자의 사고와 행동을 풀어나간다. 몸은 서서히 벌레로 퇴화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인간인 잠자. 그는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고 부끄럽게 여긴다. 가족들은 타인에게 그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다. 그를 드러내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생계를 위해 하숙을 하고, 여동생은 물론 은퇴한 아버지마저 직업전선에 뛰어들지만 벌레 잠자의 존재는 그들에게 점점 무거운 짐으로 자리한다. 잠자에게 서서히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으로 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특히 그나마 친절했던 여동생의. 여기서 오빠는 괴물로 지위가 완전히 전락한다.
“엄마 아빠!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두 분은 아마 절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아요. 저는 이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우리는 저것을 없애버려야만 해요. 우리는 저것을 돌보고 참고 견뎌내는 등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왔다고 믿어요. 그러니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P.279)
독자는 비난할 수 없다. 잠자도 자신의 소멸이 필요불가결함을 인정한다. 누구를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굶주림과 쇠약함으로 인해 벌레 잠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까? 아니다. 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막힌 하수도가 뻥 뚫린 듯이 가족은 홀가분함을 느낀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꿈꾼다.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 작품이 실존주의의 선구로 일컬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켠에 벌레와도 같은 구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기대하지 못하기에 철저하게 숨기려고 애쓴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지극히 피상적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도. 작가는 이처럼 무거운 진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독자에게 툭 던져놓는다. 마치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이.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딸이 가장 먼저 일어나 싱싱한 젊은 몸을 쭉 폈는데, 그 모습은 부부에게 그들의 새로운 꿈과 멋진 계획이 실현된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듯했다. (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