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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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 읽기의 마지막 책이다. 최신작이자 최신 번역작이면서 이때 아니면 앞으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 든다. 원서 제목 <Kvitleik>순백색을 가리킨다고 한다. 번역본 제목 <샤이닝>은 직역과 의역 중간쯤에 해당한다. 표제에 욘 포세 장편소설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편소설이란 자구가 내가 아는 의미와 같은 개념인지 궁금하다. 이 책은 120면이 채 되지 않는데, 소설 본문은 80면 미만이며, 나머지는 부록이다.

 

이 소설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한 남자가 어스름한 저녁에 외딴 숲길로 차를 몰다가 숲속에 갇힌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나서 눈 내리는 와중에 숲속으로 계속 걸어들어가고 거기서 순백색의 형체와 마주한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단순하고 함축적인 문장을 표현한다. 작가 특유의 압축과 반복이 작품의 긴장감과 심화 효과를 가져오지만 결말이 명료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이 짤막한 소설에서 그리고자 하는 바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남자인 화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골 도로를 배회하고 갈림길에서 좌우를 번갈아 갈아타다 막다른 숲길로 들어온다. 그를 압도한 심리 상태는 지루함과 공허함이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알아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며, 부모와도 만난 지 오래된 사이임을 독자는 소설 속에서 알게 된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P.7)

 

화자는 언제든 선택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극단의 길로 나아간다. 숲길 도중에 되돌릴 수 있지만 하지 않았고, 안전하고 따뜻한 차 안에 머물 수 있었음에도 굳이 눈 오는 저녁에 차 밖으로 나선다. 상식적이라면 구원을 청하러 숲 밖으로 나가야 함에도 그는 오히려 숲속으로 들어간다.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든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차가운 바위에 앉아 쉬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화자가 숲속에서 마주치는 존재들, 즉 부모님, 검은색 양복 남자, 순백색의 형체가 실체인지 환상인지 화자는 판단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것들은 실체이자 환상을 오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늦가을, 북구의, 눈 내리는, 저녁의, 숲속이라는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내리기에는 불리한 상황에서 화자의 신체와 정신 상태마저 오락가락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정말 화자의 부모님이 맞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 화자는 초반에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고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문득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토로한다.

 

나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아무도 나를 저지할 수 없다. 아무도. 그런데 나는 왜 여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가.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P.67)

 

화자는 아니라고 일견 부인하지만 그의 언행은 내심 죽음을 맞이하기를 고대한다. 죽음을 향한 충동과 이에 대한 두려움이 반복적으로 그를 압도한다. 그가 움직였다가 멍하니 서 있기를 되풀이하는 것 역시 이에 기인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이대로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수렁으로 나아간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순백색의 형체는 과연 무엇일까. 괜히 신비하고 환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단순하게 저승사자와 죽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화자의 손을 잡고 죽음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역할이다. 후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이 맨발임을 깨닫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도, 그의 부모님도 모두 맨발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모두 육신의 존재가 아님을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설정 아니겠는가.

 

그것은 완전히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다. 순백색의 형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밝고 하얀 형체. 반짝이는 순백색의 형체. (P.27)

 

죽음을 색으로 구체화할 때 대체로 하얀색과 검정색으로 양분할 수 있다. 영원한 침묵과 소멸이라고 볼 때 검정색이 지배적이지만, 성인과 천사는 또한 눈부신 흰색이 아니던가. 거기엔 육신의 소멸을 초월하는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상존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이에 대해 더더욱 확실하다. 죽음이란 확실히 두려운 현상이지만, 죽음을 자연스럽고 친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분명 존재한다. 작가는 화자가 목도한 현상과 죽음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죽음은 단지 소멸이 아니라 세계와 하나가 된다는 것임을.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P.79-80)

 

욘 포세의 기존 작품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표현의 압축과 무서울 정도의 반복이다. 기법상으로는 마침표의 거의 부재와 쉼표로의 대치가 두드러진다. 이 점에서 <샤이닝>은 비교적 온건하다. 짧은 분량 탓일 수도 있겠지만 종전의 강박적일 정도의 집착이 여기서는 많이 온화해졌음을 보게 된다.

 

부록으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을 수록하였다. 작가는 이 연설에서 자기 작품의 큰 특징인 희곡에서의 사이, 소설의 반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 말과 말 사이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실체보다 더욱 커다란 드러나지 않는 실체, 즉 침묵의 의미를. 그리고 작가가 하나의 흐름, 하나의 움직임으로 글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기에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음도 알려준다. 이 연설문은 초심자에게 생경할 수도 있는 욘 포세의 독특한 문학세계에 접근하는 비밀 코드와 같다. 아디오스, 욘 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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