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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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앞서 조제프 베디에의 정리본을 통해 이야기 개관을 알 수 있었고, 진일상의 발췌본을 통해서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원작의 단편을 짧게나마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완역본이라고 하니 발췌본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든 이 작품의 전모를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는다. 다만 원본의 운문이 아니라 산문 형식으로 번역했다고 하니 다소간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13세기 초에 씌어진 이 운문소설은 중세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사문학과 영웅 문학이 결부되어 트리스탄이라는 비운의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른바 금지된 사랑의 제재와 사랑의 묘약이라는 소재의 도입, 회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 등 세인의 가슴을 후벼팔 만한 내용이 그득 담겨 있다. 바그너가 이 이야기를 장대한 악극으로 구현한 것은 이 속에 그가 흥미롭게 여긴 모든 요소가 담겨 있어서일 것이다.

 

작품은 트리스탄의 부모인 리발린과 블란셰플루어의 행복하지만 슬픈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두 사람이 서서히 사랑을 느끼고 이윽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청춘 남녀의 감정 추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랑 앞에서는 가족도, 나라도 가로막을 수 없음을 그들의 사랑이 잘 보여준다. 반면 사랑이 행복보다는 불행과 슬픔에 더 연관성이 큼을 또한 깨닫게 해준다. 트리스탄의 이름이 그것을 잘 나타내지 않는가.

 

사랑에서 고뇌가 생겨나지 않는 이에게는 사랑 같은 것도 생길 수 없습니다. 기쁨과 고뇌는 사랑 안에서 이미 불가분의 관계이거든요. 이 둘과 함께 영예와 명성을 얻든지, 그 둘 없이 망하든지 해야 할 겁니다. (P.16)

 

숙모와 조카의 근친상간이라는 외관상 비윤리적 관계를 바라보는 독자의 태도는 한결같을 수 없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명예를 중시하는 중세의 궁정풍 사랑과 트리스탄의 사랑은 결을 달리한다. 모롤트를 쓰러뜨리고 용을 죽이고 독일의 전장을 종횡무진 휩쓸며 거인을 제압하는 영웅적 업적을 거두었음에도 트리스탄에게 전통적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오로지 이졸데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서이리라.

 

달리 생각하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인력으로 모면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다. 실수로 묘약을 마시기 전에 그들의 연인의 감정을 품지 않았음을 독자는 부인할 수 없다. 트리스탄은 숙부인 마르케왕의 신부를 데려가기 위한 일념을 품고 있었고, 이졸데는 삼촌인 모롤트를 죽이고 자신을 타국으로 데려가는 트리스탄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랑의 사랑은 그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으며, 의지로 억제와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과연 누가 그들에게 쉽사리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당신과 저 두 사람은 영원히 일심동체예요. 이 키스가 죽을 때까지 늘 제가 당신이고 당신이 저라는 걸, 하나의 트리스탄이고 하나의 이졸데라는 사실을 봉인해줄 거예요.” (P.438)

 

사랑의 물약은 일종의 마약이다. 현명한 이졸데 여왕이 어찌 나쁜 의도로 묘약을 주었겠는가. 부부 사이의 사랑과 금슬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선한 목적이었음에도 묘약은 뜻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참다운 사랑의 생성은 오로지 두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인공적인 수단의 개입은 한계가 있으며 바람직하지 못함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주인공 두 사람이 아닌 조연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보자. 사실 최대의 피해자는 마르케왕이다. 그는 트리스탄의 아버지로 인해 누이인 블란셰플루어를 잃었다. 사랑하는 조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귀족들과 트리스탄의 의견에 따라 금발의 이졸데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작중에서 마르케왕은 군주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는데, 믿었던 조카에게 배신을 당한다. 트리스탄과 아내 이졸데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들의 부정과 불륜에 대한 의심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마르케왕은 왕관을 떠나 평범한 사내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누차의 위기와 용서 끝에 애정 행각을 자제했더라면 아마도 세 사람의 관계는 파탄 나지 않고 그럭저럭 굴러갔을 테지만, 묘약의 힘으로 한껏 불붙은 젊은 연인의 사랑은 추락의 위험에도 개의치 않는 법. 미완성작이기에 더 이상의 비극적 장면이 전개되지 않았을 뿐 고귀한 마르케왕은 사랑하는 누이를 앞서 잃은 것 외에 이제는 조카와 아내마저 잃게 되었으니 하늘 아래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려나.

 

브랑게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졸데 여왕이 그녀에게 사랑의 묘약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비록 관리 실수로 사달이 났지만, 작중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지혜와 올바른 판단력은 눈부신 미모의 이졸데를 능가한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이졸데 대신 처녀성을 왕에게 바치며, 자신을 의심하는 이졸데에 의해 살해의 순간에까지 몰리게 되지만 변함없는 성심과 충심을 드러낸다. 고귀한 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브랑게네가 작중에서 지고의 수준이라고 하겠다. 또한 주군의 아들 트리스탄을 자신의 아이처럼 키워내고 갖은 애정을 아끼지 않은 포이테난트 원수와 부인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너무나 고매하고 훌륭한 처신은 차라리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사랑은 무엇 때문에 가슴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걸까.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항상 불행이 개입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돌이켜봐도 짧은 기쁨, 긴 슬픔이 사랑에 동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랑이 강렬하고 뜨거울수록 슬픔의 골짜기는 더욱 깊어짐을 우리는 인생사에서 자주 목도한다. 그것이 작중 화자가 프롤로그에서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작품의 큰 줄기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흥미로운 장면이 몇몇 인상적이다. 소년 트리스탄이 수사슴 사체를 절묘하게 해체하는 대목이 이채롭다. 할육거피, 푸르키에, 쿠리에 등 전문용어를 구사하여 꽤 장황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중세 시대 사람들이 중시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흥미롭다. 트리스탄의 장엄한 기사 서임식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당대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을 쭉 나열하면서 그들의 특장점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을 향한 상찬 못지않게 화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나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의심과 불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건 더 큰 실수입니다. 그전에 그저 의심만 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알고자 노력했던 그것이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큰 불행의 원천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전에 그를 괴롭히던 두 가지 걱정이 오히려 지금 그에게는 가벼울 겁니다. (P.337-338)

 

사랑학 이론도 빼놓을 수 없다. 아내든 연인이든 부정을 의심하더라도 결코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은 의외로 현실적이다.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계속 의심할 것이며, 사실이라면 더 큰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니. 처용의 관용이 떠오른다. 또 하나 여성의 부정을 의심하면 감시 대신에 다정한 조언을 하라고 권고한다. 감시는 도리어 반발을 사게 된다나.

 

사랑은 눈과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눈과 이성이 올바로 보는 것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지요. 마르케의 경우도 그랬답니다. 그는 아내 이졸데가 몸과 마음을 바쳐 트리스탄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지요.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P.426)

 

마르케왕은 이졸데의 잇따른 부정에도 그녀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한다.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반증만 있다면 그걸 통해 오히려 이졸데를 불러들일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마르케왕이야말로 사랑의 물약 없이도 이졸데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하면 이졸데는 도리어 간교하고 영활 하기조차 하다. 자신의 순결을 맹세하기 전에 순례자로 위장한 트리스탄과 넘어지는 설정 등이 특히 그러하다. 이처럼 사랑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남자도 제 몸을 안 적이 없으며, 폐하를 제외하고 이 세상 어떤 남자도 제 품에 안기거나, 제 옆에 누운 적이 없습니다. 이 맹세에 포함시킬 수 없거나 맹세를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까 그 불쌍한 순례자[트리스탄]입니다.’ (P.380)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추방당한 트리스탄은 흰손의 이졸데를 만나 혼란스러워한다. 동명이인, 금발의 이졸데는 멀리 볼 수 없는 곳에 있고 외로운 트리스탄 가까이에는 그를 연모하는 흰손의 이졸데가 있다. 그녀의 가족들도 두 사람의 결합을 은근히 바라고 있다. 트리스탄의 고민은 현실적이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들 마음이 약해지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서서히 마음 한구석이 약해진다. 트리스탄의 불성실과 불충실을 비난하지 말라. 목석이 아닌 이상 사람은 대개 그러하기 마련인 법.

 

산문 형식으로 번역하였음에도 5백 면 가까운 분량이니 원본대로 운문체로 옮겼다면 훨씬 두꺼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일단은 <트리스탄>의 전체적 내용과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제대로 걸을 줄도 모르는데 뛰라고 요구할 수 없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달리기도 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여전히 여러 생각을 품게 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독자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분명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난하는 게 마땅한데 거꾸로 그들의 사랑에 공감하고 불행에 애달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그게 사랑의 가치이자 힘을 보여주는 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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