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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벨린 - 전예원 세계 문학선 324 ㅣ 셰익스피어 전집 324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2년 8월
평점 :
고전문학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소재 중 하나는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는 남편의 이야기다. 최근에 읽은 <겨울 이야기>도 부인의 정조를 의심하는 남편에 관한 작품인 걸 보면, 여성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한 남성 배우자의 경계심이 자고로 매우 강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굳건한 나머지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욕망도 마음 한구석에는 동일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머젠) 차마 들을 수가 없군요. 당신이 비록 주피터 신의 아들이라 해도 아무 쓸모 없는 자이니 내 남편의 마부도 될 자격이 없는 야비한 사람이야. 사람됨으로 따진다면 내 남편은 국왕이고 당신은 기껏해야 그분의 왕국의 처형장의 망나니의 부하가 알맞으며 그것도 너무나 과분해서 사람들의 시기를 살 거고 너무나 출세했다 해서 미움을 살 거구. (P.71, 2막 3장)
이 희곡에서 포스튜머스는 신분을 제외하면 공주 이머젠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로 소개된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머젠의 자부심도 매우 드높다. 그런 포스튜머스조차 야키모의 제안에 쉽사리 넘어갈 정도이니 탁월한 이성도, 고매한 품성도 이런 면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믿음이 크면 배신감도 큰 법이랄까, 야키모의 교묘한 속임수에 빠진 포스튜머스는 배신한 아내를 비난하며 심지어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조차 내린다. 이성과 연관된 사안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불타오르기 쉽다.
왕이 왕비를 잃고 재혼하였는데, 새 왕비는 전남편의 아들을 데리고 온다. 왕을 사랑하지 않는 왕비, 자기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획책하는 왕비. 역시 생소한 글감은 아니다. 독자의 시각에서는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악인을 사랑하고 선인을 박대하는 왕이 답답하겠지만, 새 왕비에 홀딱 빠진 왕은 이미 귀먹고 눈먼 존재이다.
이 작품은 세 가지 사건이 뒤얽혀 진행한다. 포스튜머스와 이머젠, 클로텐의 결혼과 증오에 관한 것과, 벨라리어스와 두 아들- 사실은 두 왕자 -이 웨일즈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브리튼 왕국과 로마제국 사이의 갈등과 전쟁. 각각 진행되던 사건은 서서히 응축되고 양국 사이의 전쟁을 계기로 합쳐져 감춰진 진실이 밝혀지고, 해묵은 은원이 세상에 드러난다.
(포스튜머스) 난 어차피 죽어야 하는 사람이니, 어느 편에서든지 숨을 거두기는 매한가지. 이 이상 더 살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죽고 싶으니, 이머젠을 위해서도 말이다. (P.160, 5막 3장)
아내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시달린 포스튜머스는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나 그는 다만 스스로 죽기를 원할 뿐이다. 이때 그의 선조 유령이 나타나 주피터 신을 비난하고 하소연하는 장면은 뜨악하지만, 이 모든 게 훗날의 은총을 위한 시련이라는 신의 말을 통해 장차 기쁨이 다가올 것이라는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벨라리어스를 충신으로 평가해야 할지 애매하다. 그가 제아무리 왕의 처분에 분개하였더라도 왕자 둘을 유괴한 행동은 분명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다. 그럼에도 왕자 둘을 훌륭하게 키워냈다는 점과, 대 로마 전쟁에서 두 아들과 참전하여 위기에 빠진 왕과 브리튼을 구원한 점은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이 양립한다. 궁금하다, 전쟁이 없었다면 벨라리어스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려고 했을지 어떨지.
주인공은 아니지만 피사니오의 충성과 사리분별은 돋보인다. 왕비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이머젠의 곁을 꿋꿋이 지키며, 분노에 이성을 잃은 포스튜머스의 명령에 침착하게 대응한다. 위기에 빠진 이머젠에게는 남장을 하고 궁궐을 떠나라고 조언하는 등 단순한 하인 이상의 소임을 수행하지만, 오해를 받아 이머젠의 비난을 받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그의 존재감은 흔적조차 없다. 그야말로 이 작품의 이름 없는 영웅이다.
<심벨린>에서 이머젠은 영특하면서 매우 지혜로우며 분결같은 고운 심성을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 그녀의 사랑은 줄리엣처럼 서정적은 아니지만 적극적이며 정결하며 그녀의 숨결은 이사벨 못지 않게 지순하게 묘사되어 있어 감동의 진폭을 넓혀주게 된다. (P.202)
이머젠 공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허울과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민 출신의 포스튜머스를 남편으로 선택한 혜안과 용기. 왕비와 클로텐의 간사한 욕심을 간파한 현명함. 남편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과 흔들림 없는 믿음. 야키모의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지조. 남편 가까이 찾아가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낯선 세상에 뛰어드는 대담함 등 통상적인 여성상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면모의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이머젠) 자, 어서 가자. 생각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아, 하지만 어떻게 하든 뚫고 나가 봐야돼. 군인의 기개를 가지고 왕자다운 용기를 발휘해 끝까지 나가 보겠다. 자, 어서 가자구. (P.105, 3막 4장)
이 작품은 마지막 장에서 모든 고난과 갈등, 비밀이 해결되면서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비희극이다. 심벨린은 모든 포로를 풀어주며, 포스튜머스는 야키모를 용서한다. 심벨린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적장을 풀어주고 로마와 평화 관계를 제안한다. 기쁨, 용서, 평화로 넘쳐나는 대단원이다, 죽은 왕비와 클로텐을 제외하고는.
죽은 왕비와 클로텐은 극 중에서 그다지 동정받지 못할 악역이지만, 그들의 모든 언행을 완전히 무시하고 비판하는 건 곤란하다. 그들은 심벨린 왕을 부추겨 로마에 대한 조공을 끊도록 하였다. 로마의 지배에 대한 억눌린 감정을 표출한 건 동기의 선악을 떠나 왕과 귀족, 국민에게 잠재돼 있던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심벨린) 오만한 로마인이 조공을 강요하기 전까진 우리 브리튼은 자유로운 나라였다. 시저가 전세계를 다 집어삼킨다는 부푼 야망 때문에 부당하게도 그런 멍에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용감무쌍하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그 멍에에서 한사코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P.87, 3막 1장)
사극을 제외한 셰익스피어의 전 희곡 작품 읽기를 끝낸다. 한숨 돌린 후 남은 사극에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