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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
로버트 그린 지음, 이영주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10월
평점 :
막 구분 없이 총 16장의 구성으로 당대로서는 독특한 작품이다. 내용에서도 마법 대결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역시 이색적이다. 표제는 이 희곡의 주요 플롯 중 마거릿과 레이시 간의 사랑의 시련을 담고 있지 못하다. 마법과 사랑은 낭만주의 사조의 전형적 제재에 해당하는데, 르네상스 시기 작품이 이를 전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흥미롭다.
베이컨 수사는 번게이 수사는 물론 독일 마법사인 밴더마스트마저 악마를 동원하여 가볍게 물리친다. 그가 악마를 부리는 사례는 번게이 수사 납치와 밴더마스트의 귀국, 그리고 조수 마일스의 추격 장면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베이컨 수사가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놋쇠 머리가 어이없게 부서지는 대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잉글랜드의 방어 내지 지혜의 경구 등 인간의 정당한 노력과 신을 향한 참다운 믿음이 없다면 바람직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그의 마법 거울 또한 좋지 않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제13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종교적 가치관과 새로운 인간본위의 정신의 병립을 찾아볼 수 있다.
마거릿과 레이시 경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이 희곡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사건이다. 레이시는 왕자와의 우정 대신에 진실한 사랑을 선택하였고, 마거릿 또한 자신의 사랑을 지조로 지켜냈다. 왕자는 결정적 순간에 욕정에 굴복하지 않고 왕자다운 위엄과 이성을 회복한다. 사랑과 우정의 행복한 결말, 그리고 무모한 열정에 대비되는 이성의 가치 등 역시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마거릿을 둘러싸고 친구사이였던 시골지주 램버트와 설스비는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인다. 마거릿이 평범한 외모였다면 이런 비극은 물론 왕자와 레이시 또한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여인에게 있어 외모의 가치가 매우 중요함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레이시와 설스비의 대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당대적 상황으로 치부하기에는 씁쓸하다.
극중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한 배역으로 광대 레이프와 베이컨 수사의 조수인 마일스가 한몫을 담당한다. 특히 마일스는 엉터리 라틴어를 시종일관 떠벌리며 현학적인 바보 역할에 충실한데, 희망에 부푼 채 악마 등에 올라타고 지옥으로 향하는 장면은 어처구니없기만 하다.
마지막 장은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다이애나의 장미”)에 대한 찬미로 장식한다. 아울러 독일과 스페인의 군주들과 나란히 행진함으로써 영국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하면서 대단원을 내린다. 놋쇠 방벽과 함께 작가의 애국주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영국 왕실의 호감과 지원을 바라는 내심이 반영되어 있음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주요인물의 행복한 결말과 조커들의 활약으로 대체적으로 희극으로 분류되지만, 램버트와 설스비 부자의 참극 장면은 결코 섣불리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작품해설에서 언급되었듯이 베이컨 수사의 실패는 일종의 경고라고 하겠는데, 맹목적 지식과 능력의 추구가 제어되지 않을 경우의 사례를 독자는 조만간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