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작가

먼댓글이라는 걸 처음 해봐서... ㅎㅎ

 

장강명 작가의 인기의 시작이 확실히 현재 사람들의 울분과 통했기 때문이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대표적인 게 <표백>과 <한국이 싫어서>가 되겠죠. 그리고 현재 한국문학의 특징이 말씀하신 세 가지 안에 다 들어간다는 것도 슬프지만 사실이구요. 대표적인 것이 백수죠. 혹자는 2000년대 초까지 한국문학의 지배소가 신경숙의 고백하는 문체였다면, 현재의 지배소는 백수 캐릭터라 말하면서, 한국문학사상 가장 처치곤란한 인물들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현실성이 강한 소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건 리얼리즘이 현실 참여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전통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이 더 소설같은 상황에 그 이유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국적인, 혹은 스케일이 큰 문학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겠죠(본격문학만을 중시하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운동권 자살을 같이 엮었던 건, <표백>에서 중간중간에 나오는 자살 선언 관련 기사 중 '88만 원 세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이 있어서 떠올렸던 것입니다. 찰스 맨슨에 대한 얘기가 앞부분에 나오는데, 자살 선언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세계에 대한 복수' 역시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 자살이라는 방식이 표백 세계에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대안은 아니라고 보구요.

 

장강명 작가의 강점이라면 그동안 굉장히 어렴풋이 에둘러 다루었던 현실을 마치 날것인 듯 독자들에게 들이밀었다는 점이겠죠. 그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근력을 좀더 키우는 몸 만들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전략이라고 하고, 방대한 주제를 다룬 소설을 쓰는 것이 야심 중 하나라고 하니, 저는 앞으로의 행보가 좀더 기대됩니다. 현재 작가는 좀비물(...)을 연재하고 있고, 한국전쟁에 대한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을(저번 북토크 때 설문조사를 부탁하시더라구요..ㅎㅎ)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http://blog.aladin.co.kr/line/7756829)

 

답이 충분히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횡설수설한 느낌이네요^^;; 그러니 제목도 횡설수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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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을 바랐다기 보다 장강명 작가 얘기가 나와서 저도 이런저런 생각을 말해본 거였는데, 수고를 끼친 듯해서 죄송한데요^^; 하지만 아무님의 진지한 성찰을 또 읽어 좋네요~

한국 실정상 ˝잉여인간˝은 늘 주요소재였죠. 전쟁으로든, 정치 사회적으로든, 노동으로든 파생될 수밖에 없었죠. <광장>이나 <무진기행>도 본질적으론 그 카테고리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그래서 <잉여인간>이란 제목을 아예 붙이고 나온 손창섭과 장강명을 비교 분석해도 재밌을 것이란 말을 한 것이고요. ˝반사회성˝ 의 발전상까지 비교해 볼 수 있겠죠.

저도 인터뷰 보고 스케일이 큰 작품 구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애초에 장강명 작가가 sf에서 소설쓰기를 시작했고, 작품에 과학을 많이 담는 게 보여서 좀 더 확장된 한국문학을 선보여주길 바라죠.

아무 2015-10-17 18:39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생각만 했던 이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댓글을 읽다가 문득 한국문학에서 `잉여인간`이 그 모습만 바꾸었을 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사회성`의 발전상처럼 그런 인물의 변천사를 다루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러면서도 요즘 다루어지는 `잉여인간`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인물들 중 가장 무기력한 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표출하지 않고 꾹 참는 첫 번째 유형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만,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이나 <잉여인간>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었던 반면 지금의 작품들에는 그런 것도 부재한 것 같은, 세계 자체에 대한 무력함이 표출되는 것 같다고 할까..(당장은 윤성희의 작품이나 천명관의 `숟가락아, 구부러져라`가 생각나네요)
장강명 작가가 최근의 한국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특이한 면이 많이 있긴 해요. 그래서 제가 계속 기대하며 작품들을 찾아보는 걸지도.. ^^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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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술만 마시면 잠깐 졸았다가 깨고 나서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주량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보다 낮은 밑바닥이라 누구에게는 마신 것도 아닐 테지만, 그 정도의 양만으로도 나는 치사량에 도달한다. 오늘 역시 잠이 오지 않아서, 머리는 계속 띵하고 쿵쿵하고 누군가 머리를 두드리는 기분이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취중리뷰 정도 되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맨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걸 왜 영화로 안 만들었지?'였다. 영화로 잘 만들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 거 같은데... 그러면서 내 마음대로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와이두유리브닷컴의 메시지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하고... 이런 식으로.

 

이 작품에 대한 안 좋은 평가 중 하나는,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오는 불쾌함에 있다. 실제로 공감할 수 없었다는 평가 중에는 자살 선언과 연쇄 자살로 인한 것이 많았는데, 사실 이것은 이 소설의 논점을 벗어난 평가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청년 세대의 극단적인 선택의 방편이었을 뿐, 정말 중요한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78p)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출간 연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2011년 7월 20일. 무려 4년 전이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래서 소름끼친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지칭하지만, 모든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유동한다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절대로 변치 않는 이 시대의 본질이 아닌지.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류가 구축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새 것이 없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 여기서 나는 지젝을 떠올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했던 <실재의 사막>에서의 지젝을.

 

세연이 생각했던 자살 선언과 청년들의 자살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아가는 표백 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으로 그려진다. 모든 것의 정답(正答이 아닌 定答)을 체화하길 강요당하고, 소소한 것에 만족하는 법을 세뇌시키는 시대, 이것이 안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은 갓 등단한 작가의 패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카뮈의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영감을 얻었을 지도.

 

물론 이런 발상은 위험하다. 어쩌면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있었던 운동권의 자살 소동과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표백을 강요하는 사회의 질서에 편입할 기회가 주어진 청년들의 자살은, '죽음의 굿판'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자유를 박탈당한 표백 세대의 모습, 정말 이 체제가 인간이 구축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체제인가? 라는 생각을 박탈한 세계. 자살을 비판하는 세대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개인의 문제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소설 속 '나'의 모습이 내 모습과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의 질서에 가장 깊게 체화된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를 한다. 교사가 나의 꿈이지만, 그것은 더 높은 꿈을 가질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것이 아닐까. '자살'하기가 두려워 세계의 질서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 말' (342p)

 

작가는 자신이 대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휘영과 '나'를 남겨두었다. 휘영의 세연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자살이 그저 젊음의 치기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들이 잘못되었고,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런 결말의 설정은, 자살이 아닌 진정한 가능성을 찾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마지막의 '사이트 개편 공지'는, 자살 선언 역시 일종의 유행처럼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혔다.

 

나는 소설에 있어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믿는 형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형식에 제대로 된 내용이 담길 수 없다고 믿었다(물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표백>은, 형식이 다소 불안정해도 제대로 된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소설만큼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이 정말 훌륭한 세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믐>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소장해야 할 책의 목록에 이 책을 추가했다.

 

그녀는 문과대 뒤 학교 연못으로 향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빌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336p)

 

상처받지 않은 자, 이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없다. 상처받았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 역시 이 세계의 균열을 인지할 수 없다. <표백>은 우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낸다. 아픔을 통해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이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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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와 작가
    from 공 음 미 문 2015-10-17 03:53 
    운동권의 자살이 "항거"였다면, 리뷰를 통해 본 <표백> 속 자살은 "세계에 대한 복수이자 자기 지배로서의 처단"이군요. 이 세계의 의미없음에 침 뱉어주는 게 단발성이 아니라 피로서 얼룩지게 만들고 싶어 한달까요. 자주 드는 생각인데, 이런 점은 장강명 작가 세계관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의 작품들에서 그가 세계에 가지는 증오심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지금 장강명 작가에 대한 열광은 현재 이 한국
 
 
AgalmA 2015-10-17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보니 말이 길어져서 먼댓글로^^;;
아무님 공부도 걱정됩니다. 리뷰를 이렇게 열심히 쓰시는데, 공부할 시간 뺏기시는 건 아닌지.

아무 2015-10-17 08:48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게 현재 저에겐 일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낙인지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 같은 것이죠. 머리 쓰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머리를 쓰는 일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하다'라는 동사는 '이해하다'라는 동사 다음으로 폭력적인 말, 이라고 전부터 생각해왔다.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던 시간과 공간을 내 틀에 맞추어 찍어내고, 덧칠하고, 때로는 지우기도 하는 폭력. 상처받는 기억이라는 것은 결국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맘대로 바꾼 나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학드라마 '하우스' 시즌 7의 12화에는 지율처럼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자 '나디아'가 나온다. 그녀는 언니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도 자꾸 잊어버리는 언니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이후 자신에게 신장을 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가지만, 언니에 관한 나쁜 기억이 그녀를 눌러버렸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기억은 결국 자신이 마음대로 뒤틀고 재단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율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오히려 객관적인, 아니 모든 결을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율과 나디아는 한없이 작은 세계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같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이유마저도.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애틋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늙은 나무가 잘려나가거나, 추억의 장소들이 문을 닫았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 내게 그런 슬픔은 '인간'의 표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머릿속에 내가 가본 모든 장소를 언제까지나 담아둘 수 있었기에 그곳들을 그렇듯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19p)

 

그런 그의 조그만 세계에 은유가 들어왔다.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여전히 지율은 괴롭다. 불현듯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억들, 그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이 은유를 보면 떠올라서다. 그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조차도 자신을 온전히 열어놓을 수 없어서다. 말하자면,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에게도 자신은 '인간'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괴로운 것이다. 그가 '오브'를 복용하기로 선택한 것도, 결국은 '비-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의 사랑을 하고 싶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다'가 가장 폭력적인 동사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하는 사이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자기 나름대로'라는 말이 빠져있다. 어쩌면 오해가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해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라는 뜻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비-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나는 정말로 너무 평범해. 간신히 살아가고 있고, 그게 부끄럽다고. 내가 너라면...... 너는 왜 자기 능력을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는 거야? 나라면, 어떻게든 있는 힘을 다해서 그걸 쓸 텐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가 났다. 나 자신과 부모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세계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겨웠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싸움을 계속하는 내가 그저 여유를 부리고만 있는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서운했다. 은유의 입에서 나오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이, 거기 묻은 그녀의 수치심이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그녀는 내가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녀에게 나는 실은 평범한 사람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99-100p)

 

어쩌면 이해한다는 착각은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에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단순화시켜버린 것이 기억이기에, 그것을 토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그래서 어떤 변형도 없이 온전하게 머릿속에 담게 된 지율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편파적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왜곡하기도 하고, 착각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오류투성이에 아집에 사로잡힌, 그것이 인간이다,라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단어만 보면 굉장히 부정적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지율처럼, 끝없이 자신을 가두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진정으로 이 세계를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 그렇게 나와 세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뿐이다. 지율처럼 모든 걸 기억한다면 나와 세계를 구분할 수 없어 무너질 것이고, 끊임없이 망각하고 오해하면서 그에 대한 자각마저 없다면 나와 이 세계는 별개의 것이 되어버리므로.

 

개인적으로 실망했던 장면들도 있었지만(은유의 실종 같은), 지율의 처절함이나 좌절 같은 것들이 이루는 쓸쓸하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아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작품이 주는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소설이 훌륭하다/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선을 상실했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날 항상 사로잡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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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10-09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아무님의 리뷰. 늘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아무 2015-10-09 12: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쓰면서 정리가 안 돼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분발해야겠어요😊
 

올해는 문예지를 구독하고 문학상 수상집을 여러 권 읽게 되면서, 작품 해설이나 문학평론을 읽을 기회가 평소보다 많았다. 이런 글들이 선입견을 준다든지, 그 해석에 갇히게 만든다는 위험성이 있지만, 가다머의 말을 도용하자면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런 선이해가 쌓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작품 뒤에 실리는 해설이나 비평을 피하지는 않고 항상 다 읽는 편이었다(하지만 그런 '해석학적 순환'이 정말 진정한 이해로 나아가게 해줄까? 글쎄..) 그런데 그런 선이해로 나아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를 가로막는 암벽들이 있었으니, 들뢰즈, 라캉, 아감벤, 한나 아렌트, 데리다... 그리고 지젝이었다. 평론이나 작품 해설을 읽다가 그런 암벽에 막히면, 나는 주위 맥락을 살펴보며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무지막지한 사상가들의 암벽은 그런 행위를 허락해주지 않아 나는 번번이 선이해로 가는 걸 포기해야 했다. '왜 이렇게까지 어렵게 해설을 써야 돼?' 하며 짜증내기도 하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나를 막는 수많은 암벽 중 '지젝'이라는 이름의 암벽을 타기 위해 내가 부른 전문가 같은 책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암벽들을 빙빙 돌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책은 지젝의 수많은 저서 중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하 <실재의 사막>)를 주된 해설 대상으로 삼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실재의 사막>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필자가 '피상적인 읽기'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실재의 사막>을 읽지도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오랫동안 지젝에 관심을 두고 주목해오던 필자의 설명은 굉장히 이해하기 쉽게 지젝의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막힘 없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좋은 암벽 타기 선생님을 찾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암벽은 결국 혼자 타야 되는데, 전문가의 조언만으로는 이것이 안된다는 것이다. 지젝을 좀더 매끄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 헤겔, 마르크스, 레닌이라는 근육을 써야 하는데, 이건 내가 써본 적도 없는, 쓰려다가 좌절을 맛보았던 근육이었다. 한때 <소피의 세계>나 <철학 콘서트>, <시간여행>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헤겔만 나오면 그렇게 술술 넘어가던 책장이 안 넘어가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리고 구조주의 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라캉인데, 지금 이 암벽은 나에게 그들의 이름을 한 근육을 쓰기를 원한다. 이건 전문가 열 명이 와도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단련시키는 것밖에는.

 

헤겔과 라캉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다 싶은 나에게 4장 '라캉주의 좌파'는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장에서는 필자의 친절한 설명과 예시(지젝이 드는 예시+a)가 있으므로 그렇게 겁먹고 읽을 필요는 없었다. 지젝이라는, 굉장히 과격하면서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과 허상을 짚어내는 지젝의 사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은 '냉소주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내가 이런 걸 꼭 해야 돼?"라면서도 마지못하는 척하는 것, 그것이 냉소주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임무를 전적으로 떠맡지 않으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행한다." (<실재의 사막>, 102쪽)

(109p)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인 현대 사회에서, 냉소주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배하는, 그리고 불합리한 체제를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남사스러운 시대를 보면 이 주장은 유효해 보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관심과도 연결되기까지 한다.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인상깊게 기억되는 것일지도...

 

9.11 테러 사태 이후의 사건들을 분석하는 지젝의 시선은 냉철하고, 그 이면에 담긴 계급적이고 사상적인 시도를 들추어낸다. 하지만 정작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공산주의는 굉장히 막연해 보이는데, <실재의 사막>에는 이것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급진적인 그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괜히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린 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사상에 100%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암벽은 반도 오르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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