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버스를 타면서 읽을 만한 책이 필요해 도서관을 찾았다. 이리저리 돌아보다 읽으려고 벼르던 츠바이크의 책을 빌렸다. 두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츠바이크와의 첫만남이 시작되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약간은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들은 인물이 책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식이다. 츠바이크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일정 부분은 이해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두 단편 모두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본 인물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를 다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한 심리소설이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좁은 생각이라는 것을 번역가의 해설을 보고서야 알았다. 혹시나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해설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히려 해설을 먼저 읽고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이 좋을 지도...

 

'체스 이야기'에는 B박사와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B박사가 나치에게 납치되어 당한 고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無)의 상태에 가두는 것이 그 어떤 육체적인 고문보다 폭력적이라는 것을 B박사의 고백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까스로 자신이 정신을 쏟을 체스 교습서를 발견한 뒤 그가 보여주는 체스에 대한 집착은 소름이 끼쳤다. 계속해서 집착하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서 체스를 둘 정도라니..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B박사와 체스를 두게 된 첸토비치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마다 곧바로 대응하지 않고 시간을 계속 끄는데, 이것이 B박사를 점점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B박사는 과거 나치에 의해 독방에 갇혔을 때처럼 신경증적인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심지어 말을 잘못 두는 실수까지 저지른다. '나'의 저지를 통해 제정신을 겨우 차린 B박사는 게임을 중단한 채 자리를 뜬다. 그렇다. 체스 외에는 일자무식의 면모를 보이는 세계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를, 작가는 나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체스기계'로 묘사되는 첸토비치의 비인간성은, 과거 파시스트들의 그 모습에 대응되며 교양인인 B박사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체스에서 첸토비치가 보여주는 심리전은, 처음부터 마수를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세계를 장악했던 나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한 여성이 소설가 R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한다. 열세 살부터 오직 그만을 사랑해왔던 한 여자의 사랑고백은, 너무나 아름답기도 하면서 처연하기도 하다. 어떻게든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 그의 눈에 띄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심리를 드러내는 작가의 묘사는 무척이나 섬세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마다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여자를 만났을 때도, 이후에 클럽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도. 그에게 그녀는 그저 성적 탐닉의 대상이었을 따름이었지만, 너무나 그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의 의지에 순순히 따른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열세 살 때 당신이 살던 마을에 살던 여자아이였다는 것도, 당신 생일 때마다 장미를 보냈다는 것도,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묘사와 뒤로 갈수록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훌륭하지만,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비판할 수 있는 거리가 한둘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성상, 누구에게도 헌신하지 않고 바람둥이처럼 욕망하고 즐길 뿐인 그의 모습 등등.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러면 왜 편지를 다 읽은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 여자를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 역시 해설을 읽고 난 뒤에야 실마리가 풀렸는데, 당시의 성도덕은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매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띠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요구에 무작정 따르는 그녀를 보며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집에 들여 잠자리를 갖는 그의 모습은 이런 이중적인 성도덕의 온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를 읽은 후에야 그녀에 대해 불멸의 사랑을 느꼈던 것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작품들에서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다. 작가가 프로이트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로 인해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가 소설 곳곳에서 이루어졌다는 해설을 읽은 뒤, 그가 썼다는 <정신의 탐험가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터라 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을 읽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가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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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0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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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0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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