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 서점을 내가 알게 된 건 언제, 어떤 매체를 통해서였을까? 월간 이었나, 아니면 팟캐스트? 어쨌든 초창기부터 '위트앤시니컬'이라는 이름은 내 눈길을 끌었고, 언젠가 꼭 한 번은 방문해보겠다는 마음도 먹었었다. 다만 시를 다른 분야의 책들만큼 자주 읽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차일피일 미뤄오기만 하다가 결심을 한 지 몇 년 만에 드디어 방문하게 되었다.

 

  '위트앤시니컬'은 대학로에 위치한 '동양서림'2층에 있는 시집서점이다.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곳. 동양서림에 들어가 나선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타나는 공간은 작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 시집과 시에 관련된 서적만으로 빼곡히 들어찬 공간은 색다르면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중간중간 붙어있는 포스트잇에서 시인의 추천도 하나씩 살펴보던 나는 어떤 시집에 눈길이 머물렀다. 대학생 시절 나를 붙들고 있었던 최승자 시인의 시집 리커버판을.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은 작년 12월인데,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보니 연말이라 일에 치여 열심히 찾지 않던 시기인 듯하다. 표지의 질감, 쨍한 형광색의 표지, 문지 시인선 같지 않은 낯선 글꼴과 편집 스타일을 하나하나 훑으며 어느새 나는 시집을 한 손에 쥔 채 서점을 돌고 있었다. 감정의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함께 했던, 오래도록 가슴 속에 박혀 있던 시집에 대한 향수랄까.

 


  3년 전 그의 초기 시집 두 편을 읽으면서 내 나름의 감상을 정리하고([링크]존재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이후의 시집들을 연거푸 찾아서 읽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날카롭고 섬뜩한 이미지와 언어, 허무와 죽음만이 상존하는 세계에서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화자의 분투는 즐거운 일기에서 끝난 듯했다. 가장 최근작인 빈 배처럼 텅 비어를 읽다가 덮은 것도 어떻게든 존재론적인 고독과 고통을 언어와 이미지로 붙잡으려는 시는 없고 '()'만 남은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말했기에 남은 것은 이제 공()과 허무뿐인 것인가. 세월이 지나 시인의 "괴로움 / 외로움 / 그리움 /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은 이제 닳고 닳아 둥글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공(球)과 공(空). 독자였던 나는 이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삼십 세) 온다는 서른도 넘겼는데, 나이를 먹으며 단단해진 것이라 생각했던 마음도 사실은 시를 읽던 그때보다 닳아버린 것일까?

















  일찍이 절판되었던 그녀의 산문집이 난다 출판사에서 연거푸 다시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 반갑게 구매하여 쟁여놓고 있다(한 권은 이미 왔고 한 권은 예약구매를 했다). 아직 펼쳐보진 않았지만(그러기엔 당장 다음주까지 읽어야할 책이 있다..) 오래 되었으면서 새로운 산문에서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시니컬했던 언어들을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오랜만에 다시 본 이 시대의 사랑의 자서(自序)에서 말하듯, 아무리 고통과 절망과 폭력의 언어여도 그것을 "꿈꾸는 건강한 힘"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시인의 언어이니까.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자서

















  《이 시대의 사랑말고도 두 권의 책을 더 골라 계산을 했다. 하나는 시집, 하나는 시론집. 오랫동안 인터넷 주문을 애용하다 보니 서점의 자체적인 도장을 본 지도 오래 되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으며 시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주인장인 유희경 시인의 시 세계도 알아두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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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18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트앤시니컬 시집서점 기억해야겠어요.
다음주에 혜화동 갈 일이 있는데 시간 내어 봐야겠어요. 책도장도 깜찍하네요.
무한화서 저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최승자 산문집 하나는 이미 모셨고 하나는 예약해 뒀어요. 리커버판 강렬합니다.
열흘 정도 남은 올해 알차게요 아무 님.

아무 2021-12-19 10:18   좋아요 1 | URL
조용하고 아담한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프레이야님도 남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주의: 《반쪼가리 자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9.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은 메다르도 자작이 포격을 받아 몸이 반으로 잘리면서 악한 반쪽과 선한 반쪽 자작으로 나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말에 이르면 두 자작은 한 여인을 둘러싸고 결투를 벌이다가 서로의 단면을 베면서 쓰러지고, 의사가 두 자작을 결합시켜 완전한 몸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선과 악의 이분법보다는 완전성을 잃고 분열된 현대의 인간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는데,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난 이후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칼비노는 고대의 조화로운 인간성, 또는 완전성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현대란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핵심적 가치들이 무너지고 단 하나의 보편적인 이론보다 개별적인 실존이 부상하기 시작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소외된 가치에 눈을 돌리고 이성이라는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시대.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전체성보다 파편화가 더 익숙하다. 그럼에도 다시 하나가 되어 온전해지고 더욱 현명해진 메다르도 자작과 나무 위에서 세계와 거리를 두고 조감하며 저항하는 코지모 남작에게 눈길이 가는 건 완전성, 전체성을 향한 욕망 때문일까? 복잡다단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제1의 원리, 또는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완전무결한 가치에 대한 욕망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작이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옴으로써 놀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114

















  고체처럼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체처럼 유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일까?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칼비노는 완전성과 조화로운 인간의 회복을 말하고, 거대 서사가 붕괴된 시기를 포스트모던이라 이름 붙인 리오타르는 담론의 파편화를 증대시켜 사회가 다원적인 성격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거칠게 표현하자면). 전체가 아닌 파편,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우리의 눈길이 가도록 이끄는 것이 문학이 아닌지를 잠시 생각하고, 그럼에도 세계를 조감하는 이성이 여전히 필요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고, 파편화(혹은 개별화)와 완전성(또는 전체성)이 아니라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인 길이 아닌 것인지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일천한 지식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흐름 없는 생각에 이름을 붙일 언어와 지식이 더 쌓인다면 파편과 전체에 대한 미완의 논의를 머릿속에서 다시 풀어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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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3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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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지모가 세상과 유리되지 않고 끊임없이 땅 위의 삶에 관여한다는 점이 비슷한 작품들과의 차이. 재치있는 에피소드 사이에서 보이는 계몽주의적 이성과 지식인에 대한 향수. 이별 이후 내적 파도가 가라앉아 동력이 약해지나, 바틀비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저항의 아이콘으로 그를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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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2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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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에 관한 칼비노식 환상우화. 파편화된 세계에서 완전성, 전체성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향수. 짧은 분량이지만 재치 있는 환상과 위트가 어우러져 칼비노의 작품세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다소 도식적인 이분법이 걸릴 수도 있지만 우화적, 동화적 요소로 납득할 수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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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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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황정은, 《일기》, 60~61쪽). 여전히 숨쉬는 모든 김동준들이 평안을 찾을 때까지, 이 책의 목소리들이 힘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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