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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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문학과지성사의 책을 읽은 것이 굉장히 오래된 일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였는데.. 문득 신문에서 나온 세 출판사의 매출 규모에서 문지만 두 자리 수였던(물론 단위는 억 단위다) 기억이 나면서, 그래서 그런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정용준의 <가나>라는 이 소설집의 성향은 뭔가 문지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들었기 때문이다.

 

제목을 '불구자들의 세계'라고 하려다가, '의'를 지우고 '과'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세계에 속해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그의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불구자들이 등장한다. 아니면 불구자가 되거나. 어디까지나 신체적인 특징으로 말한 것이지만, 그런 불구자가 갖고 있는 속성 때문인지, <가나>에 실린 소설들은 하나같이 다 어둡고, 절망적이다. 그리고 신체적인 특징이 갖고 있는 불구성은, 결국 그들을 정신적인 불구자로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은 한 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극한에 있다.

 

요즘 나오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는 달리, 정용준의 소설은 전형적인 스토리의 문법을 따른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잘 읽혔다. 하지만 전형적인 문법이 다루는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다 묵직하다. 하지만 그 묵직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으니까. '떠떠떠, 떠'나 '굿나이, 오블로'처럼 벙어리이기도 하고, '벽'에서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잘 말해주지 않는다. 그 점이 더더욱 나를 이 잔혹한 세계에 끌어들인 것 같다. 그들의 무게를 어떻게든 재보려는 사람의 마음으로. 이름조차 몰랐다가 아는 선배가 빌려줘서 읽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정용준이라는 이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하나 아쉬운 건, 문장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전체를 아울러 가장 두드러지고 아름다운,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바로 그 문장. 물론 문장은 미문이라는 말로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운 묘사가 인물들의 비극을 더욱 부각시킬 만큼. 하지만 읽으면서 이건 뭔가 좀 어색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비유가 너무 인위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미문에 집착한 결과일까,하는 의문과 함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 같지만, 내 감상은 그렇다.

 

그렇다고 정용준 소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서사가 뚜렷하고, 그런 서사를 미문으로 감쌀 줄 아는, 그런 작가를 만나게 된 것 같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정용준이라는 작가가 어떻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작가의 본질은 장편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굉장히 궁금해지고, 장편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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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6-2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벨>을 이어서 보시면 더욱 !

아무 2015-06-25 21:28   좋아요 1 | URL
내일 찾아서 읽어보려구요 ㅎㅎ 독특한 개성이 정말 대단했어요^^
 

 

 

 

알라딘 이벤트에 당첨돼서 영화 <파울로 코엘료>를 보고 왔다. 감상평을 짧게 말하자면, 코엘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2장이라 친구랑 보고 왔는데, 친구는 코엘료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 영화가 끝나고 나서 조금 미안했다. 영화는 세 가지 시간으로 나뉘어 철저하게 파울로 코엘료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다룬다. 60년대의 젊은 코엘료, 80년대 산티아고로 순례길을 떠나는 코엘료, 그리고 2013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코엘료.

 

영화에 대해선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고(더 할 얘기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코엘료를 읽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연금술사>를 중학교 때 처음 읽은 이후, 코엘료가 쓴 소설을 미친 듯이 찾아 읽었던 기억들. 그 때 나는 <연금술사>의 어떤 면에 반했던 걸까. 그리고 <연금술사> 붐이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읽을 수 있는 동화적인 스토리,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전 우주가 도와준다는 메시지 때문일까? (너무나 좋아하던 문장이었는데, 최근 어떤 분이 적절하지 않은 맥락에서 사용하는 바람에 온갖 패러디와 풍자의 소재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힐링'을 제외하면, 무엇이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열광했던 건, 그 당시 두 소년이 품고 있었던 낭만주의의 표상 때문이었을지도. 어쨌든 코엘료는 분명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독서 경험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게 하나의 목표가 되었을 정도로.

 

 

 

사실 코엘료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리고 일곱번째 날...> 3부작이다. 7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작품들이지만, 제한된 시간이 주어지면서 전개되는 스토리나 철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질문들이 잘 어우러져 있는 작품들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종교적인 색이 강해서 공감대를 얻기 힘든 작품도 있지만, 코엘료를 이야기할 때 종교를 떼어놓는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기에, 종교가 없는 나도 눈감아줄 수 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종교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적 체험을 강렬하게 했으니...(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그런 것들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세 작품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일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물론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나 <악마와 미스 프랭> 역시 살면서 한번쯤은 품게 될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악마와 미스 프랭>의 결말은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 결국 선을 선택하지만 그 이유에 있어서 꺼림칙한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이후에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열심히 찾아서 읽었는데, <오 자히르> 이후로는 종교적인 색채가 지나치게 짙어져서, 공감하기 어려웠던 게 많았다. 종교 얘기가 거의 없는 <승자는 혼자다>의 경우에도 많이 실망해서, 그 이후로는 안 찾아봤던 거 같다. 새로 나온 <불륜>도 그렇고... 청소년기에 너무나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작가이기에, 언젠가는 찾아서 읽어보겠지만, 과연 다시 예전처럼 열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 의문)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던 건데, 코엘료는 영화에서처럼 정말 뒤에 꽁지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걸까? 평소에 보던 사진은 앞모습만 찍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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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판사(그 이름만 생각해도 분노에 차오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팟캐스트 마지막 방송에 방청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김두식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이름은 김두식도 아니고, 황정은도 아닌 바로 정지돈입니다." 대본 담당이라 잠시 무대에 올라왔던 그는 훤칠한 키에 턱수염을 길렀고, 심지어 훈남이었다. 근데 그 목소리는... 너무 가늘고 여렸다. 정말 안 어울리게. 아무튼 나는 그 방송 이후로 어떤 글을 썼기에 김두식 씨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정, 지, 돈. 이라는 그 석 자 이름을 가진 작가가 궁금해졌다.

 

현대시 수업 때 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다. 정말 모던한 작품은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김수영 작품은 <풀>이랑 <눈>만 지겹도록 실리고, 이상은 <거울>이랑 <날개>만 오지게 실린다고..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내가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건 정말 모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나 자신을 변명하기 위함이다. 건축에 대한 무지막지한 양의 지식이 담긴 이 소설은 건축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이 전무한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면 건축에 대한, 아니 건축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 쌓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정지돈이라는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실망스러웠다. 마치 뭐랄까... 서사성과 주지성(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의 균형을 잃어버린 느낌? 나로서는 그래서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지만, 금정연의 해설을 읽어봐도 이건 뭐지...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금정연의 해설도 어렵다. 해설이라는 건 작품으로 가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거나, 여러 갈래로 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창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해설은 그 자체로 해설이 필요한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런 게 후장사실주의라면, 난 이 주의 반댈세.

 

물론 소설의 작법은 끊임없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논제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험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실험을 지지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소설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았을 때이다. 소설의 본질이 뭔지 아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사라고 말하겠다. 서사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라고 하겠다.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이야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정지돈과 그 외 다른 작가들의 지적인 소설로의 실험은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지적 실험이 실패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담겨있는지 이해해보려고 어느 출판사(역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 꼴도 보기 싫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계간 봄호에 실린 황정은과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근데 그래도 모르겠다. 이 작가의 정체를... 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황정은은 '유덕문은 부군당은 왕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문장을 보고 감탄한 걸까. 여전히 궁금증투성이다. 첫만남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난 계속 찾아볼 것 같다. 이 작품이 완전 꽝은 아니었으므로, 건축사 자체의 서사성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읽을 때 엄청 술술 잘 읽혔으므로... 아직 이 책에 담긴 다른 작품을 읽지는 않았으므로 뭐라 평하진 않겠다. 다만 오늘도 계속 읽을 뿐.

 

덧) 후장사실주의라는 게 무엇인가 찾아보니, 정지돈의 '후장은 그 후장이 맞아요...'하는 인터뷰랑 누가누가 동조하고 있는지 정도의 설명밖에 찾을 수 없다. 근데 어떤 글에서 이 사조는 이들이 지향하는 어떤 포즈를 말하는 게 아닐까하는 글을 봤다. 볼라뇨의 '내장사실주의'에서 따온 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 볼라뇨의 작품을 사놓고 읽지 못했으므로 패스. 그리고 그들도 인터뷰에서 보면 제대로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라면, 나는 김수영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코스튬만 걸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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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15-06-21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보물선 2015-06-2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가 말하고 싶은걸 이리 명확하게 해주시다니~~ 공감백배^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사실 금정연씨의 요상한 해설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주범... 소설리스트에 쓰던 서평은 좋았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아쉬웠어요ㅠ

CREBBP 2015-06-21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봐주겠는데 저 역시 금정연씨의 설명은 허세가 지나쳤다고 느꼈어요..

아무 2015-06-21 17:06   좋아요 1 | URL
저도 공감해요 더 미궁에 빠지게 하는 해설이라... 소설보다 더 난해해서 힘들었어요..

2222 2015-06-2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휴. 제가 쓴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완전 공감이요.
 
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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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은 나에게 항상 물음표같은 작가다. 한번만 읽어서는 작품에 담긴 심연을 잘 찾기 어렵다. 다시 읽어내려가는 일이 되게 많은데, 이번 단편집도 담긴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들이 몇 편 있었다. 특히 동명의 단편인 `파씨의 입문`은 더더욱.. 무엇일까. 파도와 파씨와 처절한 그들의 일상에 담긴 의미는.

묘씨생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디디의 우산과 양산 펴기, 파씨의 입문은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옹기전도 좋았지만, 이 아이의 나이는 도대체 몇 살인가 싶을 정도로 왔다갔다해서 아쉬웠다.

근데 북플은 왜 컴퓨터로는 쓸 수 없을까 밑줄 긋다가 눈빠질뻔....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엔 뭘 할까 뭐라고 말할까 고마워요 정도면 친절할까. 친절하게 충돌해주어서 고마워요. 아무에게도 아무곳에도 닿지 못하고 떨어져내린다.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더라도 이렇게 떨어져서야 가망이 없다는 낙담뿐이다.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
- <낙하하다>

꼬마야.
네.
그 항아리, 끔찍하게도 생겼구나. 너 그런 몰골의 항아리 같은 것만 유심히 보고 있다가는 뒤처진다. 사람이 매사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못쓰게 된다. 못쓰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건지 너 아냐. 변변한 직장도 없어 돈도 못 벌고 비웃음당하고 사람 구실 못해 친척들에게 무시당한다. 너 그런 어른 되고 싶으냐. 항아리 같은 것을 따지면서 그렇게 살고 싶으냐. 그런 것 말고도 좋은 게 얼마나 많은 세상이냐. 내가 너만한 나이였을 때는 온갖 난리에 살기가 어려웠어도 지금은 말이다, 터널도 파고 지하철도 뚫고 고속도로도 만들어서 이 나라 벌써 선진국 아니냐. 이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보고 살아도 인생이 모자라거늘 하물며 꼬마가 말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어디 내버려라. (96-97)

남자는 삽을 바닥에서 뽑아내 그걸 끌먀 천천히 내 주변을 돌았다.
어쨌든 옹기는 맡기고 꼬맹인 가라. 우리가 묻어주마. 우린 이 일을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으니 내일도 할 거다. 전문가들이란 말이다. 지금이라면 아직 묻을 수 있다. 자리가 있다. 언제나 있다. 어떻게 있느냐. 지반이 가라앉는다. 옹기란 무겁잖아. 덕분에 우린 계속 묻는다. 어제도 묻고 오늘도 묻고 내일도 묻고. 그렇게 묻어서 뭐 난리난 적 있냐. 이렇게 묻고도 세상은 멀쩡하다. 당장 어떻게 되는 일 없다.
어떠냐, 하며 그가 뒤쪽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이제 그거 묻을까.(100)
- <옹기전>

인간도 고양이 못지않게 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다가 이 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생물이 인간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억울해 땅을 칠 노릇인 것이다. 도무지 이 몸이란 짐승 역시 먹고사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처지, 먹고사는 일로 따지자면 어느 짐승의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한지는 누구도 간단히 말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만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듯 아무 데나 눈을 흘기는 인간들이 승하는 세계란 단지 시끄럽고 거칠 뿐이니 완파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114-115)

털을 곤두세우고 인간으로서의 노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웃는다 운다 애석하다 통쾌하다 어느 것도 아니게 다만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몸과 같은 묘씨생보다도 못한 일생으로서의 인생, 바로 그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120)

다시 산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또 한 번의 일생을 두려워하고 있다. 너무 많은 갓들이 그들의 손에 달렸으니 목숨조차도 내 것 같지 않은 이런 세상은 두 번도 성가시다. 일생일사로 기품있게 살아가는 다른 짐승들과는 다르게 눈물 흘린다. 다시 일생이 어떨 것인가 내일이라도 이 장막 안에 나타날 인간은 또 어떨 곳인가 생각하며 어디까지나 비천하게 걱정하고 있다.
묘생 십오년, 이름은 몸.
일생이 곧 끝날 것이다. (129)
- <묘씨생>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 <디디의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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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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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게 된 건 사실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를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읽다보니 다른 작품에 더 눈이 많이 갔다. 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이었지만..
대상 수상작인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는 금방 읽히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러고나서야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더 깊숙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 찜찜함이 있다. 결국 진심은 그 안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던 맹금류의 시선, 그것이 전부일까...
작품을 읽으면서 눈길을 끌었던 건 윤이형의 `쿤의 여행`과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였다. `쿤의 여행`을 읽으면서 결국 나도 나 자신의 쿤에게 업혀 살고 있진 않은가하는 생각을 했다. 상상력이 기발하면서도 냉철했다고나 할까... `쇼코의 미소`는 요즘에 보기 힘든 전형적인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독특한 기법도 없고, 기발한 상상력도 없다. 오직 이야기와 인물이 가진 힘으로 이런 흡인력을 끄는 소설을 쓰다니.. 게다가 이게 등단작이라니.. 가장 긴 분량이었는데도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읽었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더 쓸까..
다 읽고 다시 쭉 훑으면서, 상을 받은 일곱 명의 작가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남녀를 가리는 건 아니지만, 문학상 작품집에 여성작가만 있는 걸 본 게 처음이라서..(하긴 남성작가만 있는 경우도 본 적이 없다) 현재 문단의 흐름이 반영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p.271)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최은영, 쇼코의 미소(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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