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판사(그 이름만 생각해도 분노에 차오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팟캐스트 마지막 방송에 방청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김두식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이름은 김두식도 아니고, 황정은도 아닌 바로 정지돈입니다." 대본 담당이라 잠시 무대에 올라왔던 그는 훤칠한 키에 턱수염을 길렀고, 심지어 훈남이었다. 근데 그 목소리는... 너무 가늘고 여렸다. 정말 안 어울리게. 아무튼 나는 그 방송 이후로 어떤 글을 썼기에 김두식 씨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정, 지, 돈. 이라는 그 석 자 이름을 가진 작가가 궁금해졌다.

 

현대시 수업 때 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다. 정말 모던한 작품은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김수영 작품은 <풀>이랑 <눈>만 지겹도록 실리고, 이상은 <거울>이랑 <날개>만 오지게 실린다고..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내가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건 정말 모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나 자신을 변명하기 위함이다. 건축에 대한 무지막지한 양의 지식이 담긴 이 소설은 건축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이 전무한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면 건축에 대한, 아니 건축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 쌓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정지돈이라는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실망스러웠다. 마치 뭐랄까... 서사성과 주지성(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의 균형을 잃어버린 느낌? 나로서는 그래서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지만, 금정연의 해설을 읽어봐도 이건 뭐지...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금정연의 해설도 어렵다. 해설이라는 건 작품으로 가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거나, 여러 갈래로 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창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해설은 그 자체로 해설이 필요한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런 게 후장사실주의라면, 난 이 주의 반댈세.

 

물론 소설의 작법은 끊임없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논제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험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실험을 지지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소설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았을 때이다. 소설의 본질이 뭔지 아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사라고 말하겠다. 서사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라고 하겠다.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이야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정지돈과 그 외 다른 작가들의 지적인 소설로의 실험은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지적 실험이 실패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담겨있는지 이해해보려고 어느 출판사(역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 꼴도 보기 싫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계간 봄호에 실린 황정은과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근데 그래도 모르겠다. 이 작가의 정체를... 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황정은은 '유덕문은 부군당은 왕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문장을 보고 감탄한 걸까. 여전히 궁금증투성이다. 첫만남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난 계속 찾아볼 것 같다. 이 작품이 완전 꽝은 아니었으므로, 건축사 자체의 서사성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읽을 때 엄청 술술 잘 읽혔으므로... 아직 이 책에 담긴 다른 작품을 읽지는 않았으므로 뭐라 평하진 않겠다. 다만 오늘도 계속 읽을 뿐.

 

덧) 후장사실주의라는 게 무엇인가 찾아보니, 정지돈의 '후장은 그 후장이 맞아요...'하는 인터뷰랑 누가누가 동조하고 있는지 정도의 설명밖에 찾을 수 없다. 근데 어떤 글에서 이 사조는 이들이 지향하는 어떤 포즈를 말하는 게 아닐까하는 글을 봤다. 볼라뇨의 '내장사실주의'에서 따온 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 볼라뇨의 작품을 사놓고 읽지 못했으므로 패스. 그리고 그들도 인터뷰에서 보면 제대로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라면, 나는 김수영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코스튬만 걸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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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15-06-21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보물선 2015-06-2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가 말하고 싶은걸 이리 명확하게 해주시다니~~ 공감백배^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사실 금정연씨의 요상한 해설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주범... 소설리스트에 쓰던 서평은 좋았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아쉬웠어요ㅠ

CREBBP 2015-06-21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봐주겠는데 저 역시 금정연씨의 설명은 허세가 지나쳤다고 느꼈어요..

아무 2015-06-21 17:06   좋아요 1 | URL
저도 공감해요 더 미궁에 빠지게 하는 해설이라... 소설보다 더 난해해서 힘들었어요..

2222 2015-06-2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휴. 제가 쓴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완전 공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