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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평점 :
『아우스터리츠』의 근저를 이루는 ‘나’의 관찰기는 북미산 너구리에 대한 관찰로 시작된다. “(…) 분명히 녀석은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8쪽) 뒤에 이어지는 아우스터리츠의 건축사를 읽다 보면 너구리 이야기는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아우스터리츠의 탐원기(探源記)를 다 읽고 저 문장을 다시 보았을 때 밀려오는 상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부분이 아닌, 여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하는 생각.
정체성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는 선을 톺아보며 구성하는(또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아우스터리츠에게 정체성 찾기의 길은 요원하다. 물론 그러한 내력을 가진 그였기에 공간에 상흔처럼 새겨진 시간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독자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는 “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30쪽)을 기록할 수 있게 된 대가로 얻게 된 “매우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40쪽)는 그를 불안정한 외줄로 내몬다. 그의 감정을 일렁이게 했던 정거장이라는 공간이 떠남과 머묾의 이중주가 새겨진 장소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기행이 안착하는 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다. 결국 소설에 기록된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간 나에게 남은 그의 정체성은 그가 언제나 들고 다녔던,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베라의 정확한 표현”(192쪽)인 륙색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 동쪽 끝에서 내려 한두 시간 그곳에 머물렀고, 아침 일찍부터 벌써 피곤한 다른 여행객들과 노숙자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거나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으면, 그때 내 속에서 지속적인 당김, 혹은 일종의 심장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흘러간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나온 것임을 예감하기 시작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43-144쪽)
개인의 기원을 찾아 장소를 끊임없이 수색하던 그의 방랑은 건축사라는 그의 전공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시간 탐색으로 확장된다. 인간이 구축한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배음을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꾸준하면서 집요해 보이기도 하는 발자취는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으로 귀결되는데, 브렌동크 요새로 대표되는 별 모양의 방어 시설에서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어지는 공간사(史)의 끈은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156쪽)이라는 그의 시간론과 상통한다. 그것은 36도라는 온도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105쪽)라는 “마술적 경계”가 부여하는 나방과 같은 숙명. 그 와중에 공간에 남겨진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사(史)는 끊임없이 시간의 권위에 저항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과의 부딪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 또는 진술의 진술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공간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과 부딪치며 전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파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사 또는 문명사라는 이름으로 그어진 선에서 벗어난, 그래서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113쪽)의 말들은 진술 또는 증언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술들은 (미처 다 읽지 못한) 『공중전과 문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고와 감정의 작동 능력이 마비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우스터리츠의 회상이 선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끝없이 곁가지를 치며 주변 인물과 장소로 확장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아이러니를 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거둔 뛰어난 승전의 장소이자,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82쪽)는 역사 속 장소는 끊임없이 가장자리를 일각으로 끌어 올리려 헤매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침잠시키는 역사-시간의 폭력이랄까. 시간의 무자비함 앞에서 그는 한 권의 책을 결코 완성할 수 없었고, 무한히 확장되는 페이지들이 반감과 구역질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137쪽)이었다. 모든 것을 추구(芻狗)¹와 같이 여기는 시간의 물결 앞에 모든 시도는 끝에 이르면 무위로 남겠지만, 실패의 연속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간 몰다우 강에서 바라본 도시가 "꼭 그려진 그림 속의 니스 칠처럼 지나간 시간의 구불구불한 틈과 균열에 의해 관통되고 있는 것처럼"(180쪽) 보임에도 호명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어떤 이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 수만 권의 책들, 유명하고 위대한 이름들. 그것들은 일각一角이었다. 일각에 불과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 황정은, 「명실」 중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이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이 할퀴고 간 자리를 기록하려는 아우스터리츠-제발트의 집념 때문이기도 하고, 이를 표현하는 문장들이 품고 있는 애수와 처연함 때문이기도 하다. 엄혹한 역사가 진행 중인 현실을 마주하려는 그의 문장이 이런 감정을 빚어내는 것은 잠겨 있는 이름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자, 압도하는 시간의 폭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회의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취하는 기록자로서의 태도는 ‘이민자’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름들과 무관한가. “(…) 이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고 말했어요. 일라이어스가 그녀에게 대답했지요. 잘 모르겠소, 여보, 난 모르오.”(73쪽) 평생을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섭리 속에 살다가 무너져버린 일라이어스처럼, 우리 역시 아우스터리츠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공간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할 감각을 기르지 않았을 뿐.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 속에 있기에, 난처하고 허망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아우스터리츠의 진술은 자신의 아버지와 마리 드 베르뇌유를 찾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작업은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과 같이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87-88쪽)이기에, 아우스터리츠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종종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이었다. 허망하며 허망하고, 이미 그 끝이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호명하기를, 기억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마저 없다면 무너질 것이라는 윤리적 감각의 외침 때문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그들, 또는 당신을 불러야 할지 그 자세를 생각할 따름이다..
¹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노자, 『도덕경』) 추구(Straw Dogs)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원제이기도 하다.
덧붙임) 『행복한 책읽기』와 『책읽기의 괴로움』
오랫동안 나에게 『아우스터리츠』는 숙제와 같은 책이었다. ‘제발트 읽기’라는 다짐이 긴 시간 동안 미뤄지고 있다는 반성의 외침이기도 했다. 결국 불현듯 손에 집게 된 이 책을 다 읽은 뒤 내가 느꼈던 감정은 故 김현 평론가의 책 제목들과 같았다. 때로 한 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제발트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현기증. 감정들』에서 내가 담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으니 행복한 책읽기였다고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같은 구태의연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이 다른 감정을 상쇄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단순한 공존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뒤섞임은, 내가 다시 이 책을 펼쳐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강들은 필연적으로 양쪽으로 경계를 갖지요. 그렇게 본다면 시간의 강변이란 무엇일까요? 유동적이고 상당히 무겁고 투명한 물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간의 특성이란 무엇인가요? 시간 속으로 잠기는 사물들은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과 어떤 차이가 날까요?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동일한 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을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13-114쪽)
그들의 체온은 포유동물이나 고래,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징어의 체온과 마찬가지로 36도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36도는 자연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입증된 수위계, 즉 일종의 마술적 경계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언젠가 이 규범에서 이탈한 것과 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와 관련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알폰소는 말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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