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님의 이전 소설 <장길산>을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설만큼 현실에서의 삶도 치열했다고 기억합니다. 때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당신의 책을 펴기가 겁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 마음이 놓였습니다. 분노나 증오의 코드가 아닌 화해와 용서, 인내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정원'이라는 제목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오래된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질긴 생명력의 뿌리를 가진, 그 풀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면서도 존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못한다. 이름이 없음이다. 그러나 그 잡초가 피워내는 꽃은 얼마나 작고 어여쁜가. 살아남은 이에 대한 열렬한 찬사에 이마가 시릴 기도의 결정체처럼.

오래된 정원에는 추억으로 다져진 마당의 흙과 돌이 뒹군다. 먼지와 거미줄과 이슬의 조화로운 휴식도 깃든다. 말못할 서러움과 고독과 비밀을 빠트린 우물은 텅 빈 어둠을 간직하고 입을 벌린다. 그러나 감나무 잎은 무성히 푸르고 석류꽃은 소담하며 휘드러진 보리똥 나무 열매도 그 선연한 빛깔이 생기롭다.

오래된 정원에는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다. 옛주인을 기다리던 가축도 떠나고 낡은 편지함은 녹이 슬어 허물어졌다. 바랜 기억과 아문 상처를 기억하는 친구도 없고 연인은 먼 나라로 떠났다. 다만 끊임없이 죽으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풀만이 정원을 가득 채운다. 죽음은 다시 살아나기 위한 준비라고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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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
과거,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여 이주 후 개척한 행성이 아나레스이며 이 소설은 아나레스에서 태어나 성장한 물리학자 쉐벡의 이야기다.

소유의 개념과 개인 이기주의, 성의 차별이 없는 꿈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들을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 과연 이상이 실현된 후,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며 그것을 발전 혹은 진보라 부를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나레스는 근본적으로 척박하고 황폐한 환경이었고 기근과 가뭄으로 인해 식량배급이 원활하지 않지만 공정한 분배로 인해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곳이다. 단 지나친 모자람으로 인한 작은 균열이 굳건한 신념에 균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창의적 개인성을 소멸시키고 억압하는 가운데 불신과 의혹의 싹이 스며들기 전까지 그들의 삶은 평온했다.

천재물리학자 쉐벡으로 하여금 아나레스 밖 우라스로의 망명을 필요케 한 요인은 자급자족의 안일에 안주하고 진보와 발전을 두려워하는 집단이기주의다. 고인 물이 언젠가는 썩어 냄새를 피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른 별의 사람들과의 소통과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를 갈망하는 창조적인간에게 아나레스의 폐쇄성은 감옥일 따름이다.

물론 우라스도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곧 알게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지만 권력과 부의 분배가 평등하지 않고 성차별 등 어둠과 빛같은 양면성을 가진 우라스 사회는 쉐벡에게 지독한 공허와 절망을 안겨준다. 그는 평등한 인류를 위해 그의 지식을 사용하려 하지만 몇몇 권력자의 손아귀가 뻗쳐올 따름이다. 쉐벡의 선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은 불행이자 행복이다. SF문학은 여기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상상의 물적 증명이자 기회이다. 어슐러 르귄의 상상력이 뿜어내는 이 거대한 오라는 독서하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 상상하는 자의 위대함과 즐거움이 그야말로 축복의 비처럼 쏟아진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각각의 고유한 특색을 지닌 생명들의 안식처라고 할 때, 여기 현실에 사는 자의 고독과 암울은 훨씬 가벼운 데미지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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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7-0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 주소를 바꾸면서 잃어버렸던 리뷰. 이렇게 퍼오는 방법이 있었다니..
 

언젠부턴가 초등학교 1학년인 원이의 별명은 '떼쟁이 대마왕'이 되었다. 싫어, 싫어는 기본이고 뭔가를 해라하면 조건을 달기 시작했고, 엄마와 이모의 속을 바글바글 끓이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매사에 부정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밥을 먹이기 위해서도 뭐해줄까? 라는 애원과 부탁조의 말이 앞서나가서 버릇을 고치기는 커녕 한몫을 한다. 에디오피아의 난민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깡말라서는 오가는 유행병이란 병은 다 걸려와서 가족을 고생시키는 이 말썽꾸러기를 어찌해야할 지 모르다가 동생은 급기야 최후의 수단으로 매를 들고 호령하고 만다.

너, 이리와. 맞을래, 먹을래.

이 경우, 오빠인 현이는 쭈뼛쭈뼛 먹다가 토할지라도 먹는 시늉을 하는데, 역시나 원이는 다르다. 매를 드는 시점부터 왕!하고 울기 시작해서 도망을 치는데 결국 애엄마는 매는 사용도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삐져서 울다가 잠이든 아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잘 삐지고, 눈물도 많고, 겁도 많냐고 뿌리찾기를 하는 가족들이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집에서는 그렇게 어리광을 피우고 말을 안 들어 구제불능으로 낙인이 찍혔는데 밖에만 나가면 조숙한 숙녀마냥 저보다 어린애들을 챙기고 보살펴준다는 것이다. 숫기도 없어 앞에 나서서 떠드는 일도 없고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평을 듣는다는데, 그렇다면 문제는 저에게는 한없이 약한 엄마나 이모를 의식적으로 골탕을 먹인다는 것. 제일로 만만한 사람으로서 이 경우 정말 난감하다. 애버릇을 고칠 것인가. 알아서 철들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원이야. 언제쯤이면 눈높이를 마주하고 앉아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눌 수 있겠니? 얼마든지 기다려줄 터이니 아프지말고 무럭무럭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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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의 이 책의 가격이 1000원이다. 싼맛에 골라들고 잽싸게 읽어치우고 또 다른 책을 기웃거리던 시절엔 아무리 읽어도 허기진 배가 채워지질 않았다. 지금이야 책을 즐기며 행복해 하고 어떤 책은 사 놓은 그대로 먼지가 가라앉아 끄덕끄덕 졸아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삶이 전투였던 때엔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쉼표 하나에도 의미 부여를 하고 진지하고 또 진지해서 걸어다니는 발자국의 무게가 버거웠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생각없이 여유를 부리며 살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몰랐는데.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보내고, 답장을 받아들면 다시 이어지는 답장을 쓰던 아이를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도 같고, 배시시 웃음도 터진다. 세상의 변화에 다리 하나를 끼워넣고 발을 맞출 듯 씩씩했던 그 아이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기자가 되어 세계를 누비고 다니리라던 호탕한  그 아이가 하나 혹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학원비를 걱정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 되어지나. 풍경좋은 전원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살리라던 우리가 생사도 모르는 타인이 되어 불혹을 향해 가고있음에.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집을 점령한 독일을 위해 웃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로 꼿꼿한 자존심을 세우는 프랑스 처녀는 <바다의 침묵> 이고, 그 침묵하는 바다를 향해 조용히 부드럽게 자신의 이상과 꿈을 얘기하는 청년장교 베르너가 있다. 숭고한 정신을 가진 독일군 장교 베르너는 점령지 프랑스를 향한 한없는 애정으로 마침내 거대한 '침묵'을 깨우는듯 했지만 나찌의 의도를 오판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음악가적 섬세함과 순수성은 동경하던 프랑스가 처한 현실을 깨닫자 스스로 지옥행을 선택한다. 청년의 울분과 비통함 앞에서 바다는 침묵을 깨고 말한다. 안녕히 가세요.  

슬프고도 짧은 한 편의 로맨스처럼 잊히지 않고 기억에서 살아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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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담담하게 읽다가 잔잔하게 여운이 남는 게 좋았어요. 밤마다 조용조용 혼자만의 독백과도 같은 대화를 하는 청년 장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처녀와 혹시 사랑하게 되려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런 로맨스는 없더라고요. 모든 소설이 로맨스가 있을 필요는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잔잔한 아름다움, 고요한 침묵이 잘 살아나는 소설이에요. 님의 글도, 그 소설도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소박함이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스스로 선을 긋는 능력이다.]

[소비는 인격의 표현이다.]

[미래에는 대량생산품의 공정한 분배가 아닌 다른 것들이 중요해진다. 빠른 자동차, 금제 샴페인 박스, 향수 따위는 드물거나 희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갈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대신 삶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것들, 이를테면 한적함, 깨끗한 물, 넉넉한 공간 따위가 중요해진다. 미래에는 산업생산품의 풍요가 아니라, 그런 걸 만들어내느라고 우리가 파괴해버린 것들, 즉 자연. 시간. 공간. 여유. 건강. 환경 등이 중요해진다.]

[돈 없는 삶을 더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남들과 비교할 때 찾아드는 인격적인 낭패감이다. 사회적인 동정은 있을지언정,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경제와 정치에 그 책임이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의 책임을 가난한 사람들 자신에게로 돌린다. 가난이 자신의 탓인한, 그것은 터부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육식을 하면서 제3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가축의 사료는 대부분 제3세계에서 수입해온다. 따라서 제3세계는 농사를 짓기 위해 우리보다 더 넓은 땅이 필요하다. 튀니지의 사헬 지역에 기근이 덮쳤을 때 국제원조기구는 비상식량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이 선진국의 가축사료로 이 굶주림의 나라를 빠져나갔다.]

[산업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극단적 시도, 과열된 소비욕은 여러 면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한계를 휠씬 넘어서버렸다. 우리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설 참에 있다. 그 결과는 재난이다.]

[광우병은 순전히 식물성을 섭취해야 하는 가축에게 고농도의 동물성 사료를 먹인 까닭에 생겨난 질병이다. 이것은 속도에 대한 광기어린 신념이 축산업에 불러일으킨 재난이다.]

[행복은 더 많이 갖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덜 갖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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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박한 삶이란, 그리고 사회적 연대감이란, 행동하는 사유를 하게 하는 책인 것 같네요. 그저 님의 페이퍼에서 오는 느낌이요.^^ '굶주리는 세계'도 가난과 기아의 범세계적인 연대책임에 대한 생각을 주는 책이겠군요. 다음에 읽어봐야겠어요. 둘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열두시를 막 넘기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