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우문고의 이 책의 가격이 1000원이다. 싼맛에 골라들고 잽싸게 읽어치우고 또 다른 책을 기웃거리던 시절엔 아무리 읽어도 허기진 배가 채워지질 않았다. 지금이야 책을 즐기며 행복해 하고 어떤 책은 사 놓은 그대로 먼지가 가라앉아 끄덕끄덕 졸아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삶이 전투였던 때엔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쉼표 하나에도 의미 부여를 하고 진지하고 또 진지해서 걸어다니는 발자국의 무게가 버거웠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생각없이 여유를 부리며 살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몰랐는데.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보내고, 답장을 받아들면 다시 이어지는 답장을 쓰던 아이를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도 같고, 배시시 웃음도 터진다. 세상의 변화에 다리 하나를 끼워넣고 발을 맞출 듯 씩씩했던 그 아이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기자가 되어 세계를 누비고 다니리라던 호탕한  그 아이가 하나 혹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학원비를 걱정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 되어지나. 풍경좋은 전원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살리라던 우리가 생사도 모르는 타인이 되어 불혹을 향해 가고있음에.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집을 점령한 독일을 위해 웃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로 꼿꼿한 자존심을 세우는 프랑스 처녀는 <바다의 침묵> 이고, 그 침묵하는 바다를 향해 조용히 부드럽게 자신의 이상과 꿈을 얘기하는 청년장교 베르너가 있다. 숭고한 정신을 가진 독일군 장교 베르너는 점령지 프랑스를 향한 한없는 애정으로 마침내 거대한 '침묵'을 깨우는듯 했지만 나찌의 의도를 오판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음악가적 섬세함과 순수성은 동경하던 프랑스가 처한 현실을 깨닫자 스스로 지옥행을 선택한다. 청년의 울분과 비통함 앞에서 바다는 침묵을 깨고 말한다. 안녕히 가세요.  

슬프고도 짧은 한 편의 로맨스처럼 잊히지 않고 기억에서 살아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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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담담하게 읽다가 잔잔하게 여운이 남는 게 좋았어요. 밤마다 조용조용 혼자만의 독백과도 같은 대화를 하는 청년 장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처녀와 혹시 사랑하게 되려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런 로맨스는 없더라고요. 모든 소설이 로맨스가 있을 필요는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잔잔한 아름다움, 고요한 침묵이 잘 살아나는 소설이에요. 님의 글도, 그 소설도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