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쇼의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은 '청춘'이다. 아마도 이게 원제이지 싶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가진 책의 저 제목은 너무 신파스럽다. 성장통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한번은 오는 고통스런 기억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이는 죽을 만큼 또 어떤 이는 그저 그렇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전부일 수 있는데,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은 성장통은 죽거나 혹은 살거나다. 그리고 소설의 매력은 타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거다.
[나는 그 무렵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헌책방에 들렀다. 그리고 막연하게 눈에 띄는 책을 꺼내 들고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겉표지만을 바라보면서 30분이 넘게 내내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책의 제목따위를 읽는다기보다는 변색한 종이라든가 색바랜 문자, 손때 묻은 얼룩, 혹은 그 책이 지닌 음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였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무엇인가 시간 보내기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내 나름대로 책을 사랑하기도 한다.
어느 곳이나 헌책방 앞에는 한 권에 몇십엔 정도하는 싸구려 책들이 한무더기씩 쌓여 있다. 나는 대개 그러한 책을 살 마음도 없이 손에 꺼내들고 있었던 것이다. 볼품없이 더렵혀진 책더미를 한 권 씩 살펴 나가노라면 <육아법>이라든가 <피임법>, 혹은 <혁명과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들과, 가끔은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인 나조차 제목을 알 수 없는 영문학 관계의 낡은 번역서가 섞여 있었다. 번역한 사람 역시 이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책을 손에 들면 본문보다는 번역한 사람의 후기를 먼저 읽었다. 거기에는 대개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책을 일본에 소개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다소 열띤 기세로 역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펴낸, 평생동안의 유일한 한 권의 책일런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후기 역시 어느 정도 흥분한 기색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기대하며 펴낸 책도 거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헌책방의 싸구려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러한 후기를 가지고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꽤나 점잖은 말투로 어떤 문학관의 편향성을 꾸짖는 학자투의 묵직한 어조 속에는 기묘하게도 어린아이 같은 기쁨과 삶의 중대한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흥분으로 인한 의식하지 못하는 쾌활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찌기 나의 친구였던 한 여학생이 자살했을 때, 그녀의 친구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드러내 보이던 쾌활함, 어쩌면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옮긴이에게 있어서 책을 낸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었을 테고, 그것 때문에 다소 흥분하고 쾌활해 하더라도 좋을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살아가는 일이 결국은 갖가지 시간 보내기의 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틈틈이 무엇엔가 몰두할 수 있거나 몰두하는 시늉을 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나는 낡은 헌책더미 사이를 서성거리면서 생각했다. 나 역시 앞으로 반 년이 지나면 지방대학의 강사가 될 터이고, 그리고 머지않아 한 권쯤 번역서를 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 역시 조금은 흥분하고 들뜬 후기를 쓸 것이고, 그리하여 얼마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헌책방에 들르는 어딘가 느슨하고 나태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상념이다. 이 서장을 읽어가노라면 본문에 대한 미련을 떨굴 수가 없게 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권태로운 삶이 번쩍하는 무언가를 찾아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