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5권까지 나와있는 만화다. 1권이 막 나왔을 당시에는 어딘가 산만하고 주인공의 성격도 확실하지 않아 읽다가 말았는데 무진장 재밌다는 누군가의 권유로 근래에 다 읽어치웠다. 역시나 흥미로웠다. 경찰들의 정거장 일명 '라쇼몬'에 루미라는 여경찰이 등장하면서 만화는 시작되는데, 이후 그녀는 라쇼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능력있고 용기있는 가슴 따뜻한 인물로 그려진다. 역시 경찰이었던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경찰직에 투신한 그녀에게는 요헤이라는 유치원생 아들이 있다.

이 만화의 장르는 휴먼드라마다. 다양한 색깔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슴에는 저마다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도사리고 있으며,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기를 서슴치 않는다. 세상의 잣대로 볼 때는 성격파탄자에 정신이상자이고 구제불능의 삐딱한 사고체계를 가졌지만 자신들이 가진 약점과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과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경찰 초년생 루미는 괴짜들의 집단 '라쇼몬'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진정한 정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자각한다.

가슴 찡한 감동을 거듭 받고 눈물까지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분발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역시 만화가 있어 세상은 살만하다. 무엇보다 여주인공 루미의 지혜와 강인함, 용기, 불굴의 의지가 감탄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나는 근사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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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시선>의 머리말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기생들에게나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은 노리개감으로 불리워지기 위해서 붙여졌던 이름이었을 뿐이다. 어렸을 때에는 간난이, 큰년이, 언년이 등의 아명으로 불렸지만 정작 족보에는 남편의 이름만 실려졌다. 말하자면 일생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게다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때문에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에게 매어 지내야만 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시대에 살면서 떳떳하게 이름과 자, 그리고 호까지 지니고 살던 여자가 바로 허초희이다.

그는 초희라는 이름 외에도 경번이라는 자를 가졌으며, 난설헌이라는 호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그에게는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남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려내는 행위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어간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스스로가 평범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는 이 땅 위에서 겨우 스물 일곱 해를 살다가 갔지만 그 짧은 세월 속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여자로서, 그리고 을 살다가 간 것이다.

난설헌의 시가 정한의 눈물로 얼룩지게 된 것은 김성립에게 시집간 뒤부터이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이 호당의 동창이었으며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이들 사이에서 혼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김성립은 허초희와 짝이 될 수가 없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얼굴이 못생겼으며 방탕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기보다 너무나 뛰어난 난설헌에게 자존심이 상하여, 그처럼 빗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해서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보냈다는 사실까지도 비난하던 시대상황 속에서, 그의 상상력은 자연히 신선세계에 노닐게 되었다. 그가 죽을 무렵에 이르러, 화려했던 친정은 몰락해 가기 시작하였다. 경삼감사로 내려갔던 아버지 초당은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상주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둘째 오빠 하곡은 율곡과 당파 싸움 끝에 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난 뒤에도 한양성 안엔 들어오지 못한다는 단서가 붙었기에, 금강산을 떠돌다가 끝내 고질병을 얻어서 객사하고 말았다. 아들과 딸이 어려서 죽고 게다가 뱃속의 아기까지 죽었으니, 난설헌의 슬픔과 괴로움은 엎친데 덮친 셈이다.

이러헌 자기의 삶과 갈들을 표현한 것이 바로 <난설헌집>에 실린 211편의 시이다. 난설헌은 죽으면서 자기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렸지만, 아우 허균이 자기가 베껴 놓은 것과 자기의 기억을 더듬어 엮어낸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특히 중국에는 <난설헌집>에도 실리지 않은 시들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들 가운데 90편을 뽑아서 이번 기회에 펴낸다. 난설헌에 관한 글들이 많지만 오해인 여사의 난설헌시집과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연구에서 도움을 받았다. ------1987년 9월 허경진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난설헌의 일대기다. 그녀의 시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노라

아마도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갔을 이 시는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이라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름다운 비단 한 필 곱게 지녀왔어요/ 먼지를 털어내면 맑은 윤이 났었죠/ 한 쌍의 봉황새 마주 보게 수 놓으니/ 반짝이는 무의가 그 얼마나 아름답던지/ 여러 해 장농 속에 간직해 두었지만/ 오늘 아침 님 가시는 길에 드리옵니다/ 님의 옷 만드신다면 아깝지 않지만/ 다른 여인의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반달 모양 만든 노리개는/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붉은 비단 치마에 차고 다녔죠/ 오늘 길 떠나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먼 길에 다니시며 정표로 보아 주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는 않지만/ 새로운 연인에게만은 달아 주지 마셔요

지아비를 향한 이 절절한 소망만 보아도 난설헌이 얼마나 솔직하고 용기있는 여자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사상과 바램은 시대를 앞지르나 두 발을 딛고 선 공간은 하늘을 가린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양반가였다. 자유롭고 진보적인 친정 집에서의 습관이 몸에 배인 것이 결국은 그녀의 숨통을 조르는 무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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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4-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요. 혼자 힘으로 시대를 바꿀 수도 없었구요. 그래도 그녀가 있기에, 조선시대의 역사가 쓸쓸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 2004-04-0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녹녹치 않을 때마다 그녀를 떠올립니다. 그 지독한 세상에서도 영혼만은 자유롭게 신선의 세계를 노닐었지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은 저도 가끔 하는데, 한살 터울인 오라버니 밑에서 받은 차별이 특히나 서러웠을 때인데, 그것도 '써클'이란 이란 영화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학대와 구속을 당하는 여성들을 보니 또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89년 8월이다. 속표지 여백에 초록색의 볼펜으로 선명하게 써 있는 "나는 행복하게 되고 싶지 않다. 다만 생생하고 활동적이길 바란다." 라는 버나드 쇼의 글이 인상적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 지금의 나는 안일한 행복만을 꿈꾼다. 활동적인 생생함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씁씁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아서 두문불출 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 한 권은 마치 종교나 마약과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책읽기를 시도한 것도 아마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모든 책들을 거의 설렵했으니까.

<아웃사이더의 특징으로 서먹서먹한 감정이나 비현실성을 들 수가 있다. 죽어버려서 사후의 세계의 살고 있는 듯한 이 비현실감은 때때로 청천벼락과 같이 사람들을 엄습한다. 건강하고 신경이 민활할 때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불확실한 방향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보았던 사람에게는, 세상은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장소일 수가 없다. 안락한 부르조아의 고립 세계에 안주하면서, 그가 보고 접촉한 것을 현실로써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바르뷔스는 보여주고 있다.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혼돈이다. 부르즈와에게는 이 세계가 질서 있는 정연한 사회인 것이다. 불합리하고 두려운 불온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부르즈와는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아웃사이더에게는 세상이 합리적인 것도, 질서있는 것도 아니다. 부르즈와의 자기만족인 용인의 태도에 저항하여 아웃사이더가 무정부주의적인 감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세속적인 관행을 멸시하거나 조소하려고 한 때문만이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는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인 질서 회복은 바랄 수 없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비록 희망의 여지가 없더라도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아웃사이더는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 지도 모른다. 유태인의 신비 사상에 의하면, 혼돈이라는 것은 질서가 잠재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알은 새가 창조되기 전의 혼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되며, 혼돈에는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다시 읽노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쓴 재기발랄한 주제의 글이지만 무언가 정리되지 않고 엉성한 것이 의미전달이 불분명하다. 아니면 번역상의 오류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런 류의 글이 더이상 감동을 주지 않을 만큼 감성이 녹슬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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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문태준 (현대시학, 2003년 8월호) 동아일보에서 발견한 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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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쇼의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은 '청춘'이다. 아마도 이게 원제이지 싶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가진 책의 저 제목은 너무 신파스럽다. 성장통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한번은 오는 고통스런 기억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이는 죽을 만큼 또 어떤 이는 그저 그렇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전부일 수 있는데,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은 성장통은 죽거나 혹은 살거나다. 그리고 소설의 매력은 타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거다. 

[나는 그 무렵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헌책방에 들렀다. 그리고 막연하게 눈에 띄는 책을 꺼내 들고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겉표지만을 바라보면서 30분이 넘게 내내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책의 제목따위를 읽는다기보다는 변색한 종이라든가 색바랜 문자, 손때 묻은 얼룩, 혹은 그 책이 지닌 음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였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무엇인가 시간 보내기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내 나름대로 책을 사랑하기도 한다.

어느 곳이나 헌책방 앞에는 한 권에 몇십엔 정도하는 싸구려 책들이 한무더기씩 쌓여 있다. 나는 대개 그러한 책을 살 마음도 없이 손에 꺼내들고 있었던 것이다. 볼품없이 더렵혀진 책더미를 한 권 씩 살펴 나가노라면 <육아법>이라든가 <피임법>, 혹은 <혁명과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들과, 가끔은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인 나조차 제목을 알 수 없는 영문학 관계의 낡은 번역서가 섞여 있었다. 번역한 사람 역시 이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책을 손에 들면 본문보다는 번역한 사람의 후기를 먼저 읽었다. 거기에는 대개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책을 일본에 소개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다소 열띤 기세로 역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펴낸, 평생동안의 유일한 한 권의 책일런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후기 역시 어느 정도 흥분한 기색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기대하며 펴낸 책도 거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헌책방의 싸구려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러한 후기를 가지고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꽤나 점잖은 말투로 어떤 문학관의 편향성을 꾸짖는 학자투의 묵직한 어조 속에는 기묘하게도 어린아이 같은 기쁨과 삶의 중대한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흥분으로 인한 의식하지 못하는 쾌활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찌기 나의 친구였던 한 여학생이 자살했을 때, 그녀의 친구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드러내 보이던 쾌활함, 어쩌면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옮긴이에게 있어서 책을 낸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었을 테고, 그것 때문에 다소 흥분하고 쾌활해 하더라도 좋을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살아가는 일이 결국은 갖가지 시간 보내기의 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틈틈이 무엇엔가 몰두할 수 있거나 몰두하는 시늉을 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나는 낡은 헌책더미 사이를 서성거리면서 생각했다. 나 역시 앞으로 반 년이 지나면 지방대학의 강사가 될 터이고, 그리고 머지않아 한 권쯤 번역서를 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 역시 조금은 흥분하고 들뜬 후기를 쓸 것이고, 그리하여 얼마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헌책방에 들르는 어딘가 느슨하고 나태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상념이다. 이 서장을 읽어가노라면 본문에 대한 미련을 떨굴 수가 없게 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권태로운 삶이 번쩍하는 무언가를 찾아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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