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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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최근 우리에겐 기사를 통해, 오바마 대통령이 여름 휴가에 챙겨간 세 권의 소설 중 하나로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전쟁, 고아, 장애 이 세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이미 슬퍼지기에, 첫 장을 열기가 쉽지는 않았다. 


1권에서는 대체로 베르너와 마리로르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준다. 마치 영화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서술했다. 그렇기 때문에 10년 전 이야기인지, 현재의 이야기인지 구분해 읽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하지만 2권에 들어서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수록, 눈을 감으면 1940년대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독일의 베르너는 전자기계를 분해, 조립하고, 집중해서 라디오를 고칠 때 세상의 근심을 잊는, 여동생과 라디오 채널에 귀기울일 때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소년이다. 라디오 수리공으로의 재능을 알아본 누군가의 도움으로 광부로 예정된 삶을 떠나 히틀러 유겐트 양성학교에 다니게된다. 반면, 프랑스의 마리로르는 파리 자연사박물관 자물쇠 기술자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매일 아버지를 따라 박물관을 오간다. 아버지는 타고난 손재주로 딸을 위해 마을의 축소판 모형을 제작하고, 마리로르는 이를 통해 마을의 지리를 익힌다. 


전쟁이 일어나 독일군이 파리로 포위망을 좁혀오자 마리로르의 아버지는 피난길에 오른다. 지닌 자를 보호한다는 전설이 담긴, 박물관 최고 보물 진귀한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를 독일의 손아귀에서 지켜내기 위해 박물관장이 선택한 방법은 모조품 3개를 포함해 총 4개의 다이아몬드를 네 사람에게 각각 맡기는 것이었다. 박물관 금고, 박물관장, 후원자, 그리고 금고담당자. 본인의 보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특수 보관장치에 넣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자물쇠 장인은 눈먼 딸과 생말로(프랑스 서북부지역)의 친척집으로 떠난다.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얼마 전 시리아 팔미라 유적을 지키기 위해 IS에 맞서다 죽임당한 노학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독일의 베르너는 학교에 입학한지 1년 만에, 교사에게 속아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의 임무는 점령 지역에서 무선통신으로 구조 요청을 하거나 정보를 송신하는 적군(그는 그렇다 믿는다)의 위치를 찾아내 처리하는 것이다. 임무중, 적군으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모녀를 사살하는 동료의 모습에 점점 전쟁의 실상을 알아가고 회의감을 품게 된다. 


다이아몬드와 함께 저택에 남겨진 마리로르와 불로의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 저택을 수색하는 독일 본부원사, 그리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지하에 갇힌 베르너. 마리로르는 구조요청을 위해 목숨을 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메시지는 베르너에게 닿는다. 어릴 적 여동생과의 추억이 담긴 목소리로.. 각자 다른 나라, 다른 환경에서 자라, 상상해본 적 없고 선택한 적은 더더욱 없는 상황에 놓인 베르너와 마리로르. 그들의 만남은 의외로 찰라에 이루어진다. 작가는 독자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이야기를 맺는데, 오히려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의 장점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워낙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져 있어, 전쟁을 소재로 한 슬픈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같은 독자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주인공, 시각장애인 마리로르가 소리와 촉감으로 느끼는 세상에 대한 묘사, 기댈곳 없는 고아인 베르너가 나치 교육기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본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져 있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그들이 겪은 일을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소설로, 감성과 생각할거리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독자들에게 권한다.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2권,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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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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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콩닥콩닥하고 긴장으로 어깨가 뻣뻣해진다. 그럼에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서 책장을 넘겨 결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차마 마지막 페이지를 펴기는 아쉬워 힌트라도 있을까 역자 후기를 다시 읽는다. 그러다 읽던 이야기 속으로 되돌아오길 여러 번. 책을 읽는 내내 으스스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영화화 된다는데 아무래도 볼 자신이 없다.


이야기는 네살배기 두 아이와 엄마 맬로리가 긴 여정을 떠나는 날 아침에서 시작한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집 밖 풍경을 본 적 없는 보이와 걸. 날 때부터 혹독한 청각 훈련으로 눈을 감고도 엄마의 눈물, 미소, 감정변화까지 숨소리로 알아차릴 정도로 예민하다. 맬로리도 지난 4년간 창 밖을 내다 본 적이 없다. 모든 창문은 담요로 가리고, 집 밖에 나갈 땐 항상 안대를 착용한다.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4년의 준비를 마치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시간이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맬로리가 겪은 시간을 교차해 보여준다. 4년 전, 사람들이 정신 착란을 일으켜 타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공통점은 '무엇'인가를 '보았다'라는 건데, 그걸 본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크리처(creature)'라 부르고, 혹시라도 크리처를 보게 될까 눈을 감고, 창문을 모두 가리고 집 안에만 은둔한다. 거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묻어주지 못하고, TV도 라디오도 진작에 끊어지고, 새장을 문 앞에 걸어두고 새소리를 통해 누군가의 접근을 감지한다. 피신처를 찾아온 사람을 집 안에 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생존자끼리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안전가옥으로 피신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작은 사회와 같았다. 위기상황에서 각자의 태도가 달랐다. 호기심을 갖고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사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밖을 탐험하는 사람, 리더가 되는 사람, 팔로워가 되는 사람, 회의주의자, 항상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까지 변할 수 있는지, 어머니가 될 여성은 얼마나 강인해질 수 있는지도 드러난다. 


두 아이를 데리고 눈을 감은 채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목숨을 건 모험을 시작한 맬로리. 그녀가 가려는 곳은 어디일까,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미지의 존재인 크리처나 야생의 들짐승들보다 마음 속의 죄책감, 같은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이하게도 이 책은 록밴드의 보컬이자 작사가가 썼다. 얼굴을 보는 자마다 돌로 변하게 했던 그리스 신화의 마녀, '메두사'에 영감을 받아 첫 작품을 써냈다. 지금은 후속편을 구상중이라는데, 어서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4년이 지나서야 올림피아, 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두 아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 더욱 강인해진 맬로리를 속편에서도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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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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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AKENING. 도서관 서가의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서 발견한 두툼한 책(무려 620쪽), 제목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도서관에서는 표지와 띠지를 벗겨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서의 제목은 모른채 순전히 어웨이크닝이라는 제목만 보고 읽었다.) 나중에 책정보를 찾아보니 국내에는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라 번역되어 있었고, 미스터리 소설이라기엔 너무나 샤방샤방한 파스텔 표지를 입고 있었다. 꼬박 반나절을 투자해 한 권을 독파하고 드는 생각은, 책의 원제 Awakening이 내용과 훨씬 잘 어울린다는 것. 직관적으로 확 와 닿는 제목이 있는 왜 굳이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라고 지었을까.

 

어웨이큰의 사전적 의미는 자각, 인식(의 계기), 자각(함), 일깨움이다. 기독교에서는 영적 각성, 영적 경계심을 의미하고, 동물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현상은 Spring Awakens라 한다. 내가 이 책의 제목에 흥미를 느꼈던 이유는 어웨이큰을 첫 번째 의미인 자각, 인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를 보면, 샤론 볼턴의 "모든 작품에는 상처를 지닌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경계를 풀고 세상으로 걸음을 내딛는"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 형식을 취한 성장소설이라 짐작하고 흥미를 느꼈다. 어웨이큰을 '뱀이 깨어나는'으로 포장한 표지의 책인줄 진작 알았더라면,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거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영국의 작은 마을 수의사인 '클래라'가 사건 현장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이웃, 바이얼릿 할머니 집을 방문한 클래라는 거실의 젖은 자루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할머니의 애완견 베니가 뱀과 함께 죽어 있었다. '포에나 쿨레이'는 고대 로마에서 극악무도한 죄인(패륜아)을 처형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박한 사형수를 개와 뱀, 원숭이나 다른 가축과 함께 자루에 집어 넣어 강에 빠뜨렸다고 한다. 익사하지 않으려고 할퀴고 발버둥치는 짐승들과 한 자루 안에서 죽어가는 사형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동네 여기저기 집 안에서 자꾸만 발견되는 뱀들, 공격 당하는 사람들. 그해 봄이 뉴난히 따뜻했고, 불법 오소리 사냥으로 천적이 부쩍 줄었다 해도, 맹독을 지닌 열대지방의 뱀이 영국 시골마을에서 발견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클래라는 파충류를 전공한 현장 경험 풍부한 수의사이지만,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시골에 머물며, 수도회에서 후원하는 작은 야생동물 보호센터에서 일한다. 지역 주민과의 교류도 최소화한 채, 야생동물을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는 그녀는 얼굴 큰 흉터만큼이나 큰,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소설에서는 알에서 깨어나 마을을 활보하는 뱀과 독사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누군가를 쫓는 과정이 숨막히게 그려진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고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소설이 단순히 스릴 넘치는 미스터리로만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 클래라의 내면의 변화에 독자가 공감하며, 그녀의 성장을 응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제는 책의 제목과 연관이 있다. 앞서 밝혔듯, 어웨이큰은 뱀이 알에서 '깨어나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상처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틀에서 '깨어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종교적 의미에서의 '영적 각성'도 포함한다. 마을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클래라에게 교회는 집과 다를 바 없는 곳이며, 끊임없이 내면의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주인공인 클래라가 세상과 교류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 장면에서 독자는 Awakening 이란 제목이 품고 있는 희망의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이 더운 날씨에 등골 서늘하게 얼려줄 미스터리 소설이 주는 흥미진진함에 더하여, 여운이 있는 성장소설로의 매력도 느끼길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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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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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한번 읽었음에도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내겐 하퍼 리의 <파수꾼>이 그런 책이다. 소설은 <앵무새 죽이기>의 모체가 되는 작품이자 저자가 55년 만에 발표한 후속작으로, <앵무새>의 화자였던 9세 소녀 스카웃이 26세 여인으로 성장해 고향 메이콤을 방문해 그가 상상치도 못했던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갈등을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본 스토리나 인물, 주요 사건은 출판사 리뷰나 다른 분들께서 이미 잘 짚어 주셨기에, 본 리뷰에서는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느낀 두 가지 부분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서로 다른 '우리'의 범위, 각자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파수꾼'


"여러분, 제가 이 세상에서 믿는 구호가 하나 있다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

딸 스카웃이 따뜻하고 편안하다 기억하는, 아버지 애티커스의 목소리이다. 누명을 쓴 흑인 청년을 변호하는 법정에 울려 퍼졌던,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변호사의 목소리인 동시에 두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진 루이즈는 스카웃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에 들었던 그 목소리를, 메이콤 주민 협의회에 참석한 아버지를 보고 떠올리게 된다. 

(메이콤 주민 협의회는 부녀간 갈등이 시작된 곳으로, 이 모임에 대해 딸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들의 회합으로 여기고, 아버지는 흑인들로부터 백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어책이라고 답한다.)


진 루이즈가 통찰력을 지녔더라면, 그래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도로 선별적이고 배타적인 세계의 장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더라면,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평생 동안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색맹이란 것을. (173쪽)


"모두들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캘퍼니아가 물었다.

"우리?"

"네. 우리." (225쪽)


애티커스와 핀치 삼촌, 메이콤 주민들, 은퇴한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가 생각하는 '우리'는 피부색과 인종으로 나뉜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지만, 백인과 흑인으로. 그러나 진 루이즈는 그 둘을 합쳐 '우리'라고 여겼다. 작가는 이런 인종적 편견이 (상대적으로) 없는 진 루이즈를 '선천적인 색맹'이라 칭했는데, 이러한 비유는 책 말미에 삼촌 핀치의 지적을 통해 재차 드러난다.


"너는 색맹이야, 진 루이즈." 그가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거야. 네가 보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오직 생김새나 지력, 인격 같은 것들에 있지. 너는 한 번도 사람을 인종으로 보도록 부추김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종 문제가 현재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급한 사안인데도 아직까지 인종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어. 네게는 사람만 보이는 것이지." (379쪽)


소설의 제목이 <파수꾼>인 이유는, 각자가 구분하고 믿는 '우리'라는 범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파수꾼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성경 이사야서 21장의 파수꾼이 등장한다. 바빌로니아 왕국 멸망을 목전에 두고, 적의 침략으로부터 성을 지키기위해 망대 위에서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 진 루이즈에게는 자기 양심에 따라 약자의 편에 서는 파수꾼의 역할이 중요했다. 애티커스는 그보다 복잡했는데, 다른 인종의 수적 확대, 이로 인한 자기 영역(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로서의 파수꾼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진 루이즈의 '우리'는 개인, 가족, 그리고 흑인을 포함한 메이콤까지였다면, 애티커스의 '우리'의 범주는 개인, 가족, 넓게는 메이콤의 백인과 연방정부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희망하는 주정부까지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둘은 의견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태도


진 루이즈가 아버지의 타협적인 행동에 실망하고, 신적으로 옳다 믿어왔던 아버지의 양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양심을 세워가는 모습은 한 편의 성장소설을 보는 듯 했다. 한 집에 살았지만 70대의 아버지가 보는 미국과 20대 젊은 여성이 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이렇게나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사회 내 세대 간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의견의 간극을 어떤 방식으로 좁혀 나가느냐, 나와 의견이 다른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하고, 회피했다가, 정면으로 반박하며 심한 말도 서슴지 않는 진 루이즈를 삼촌 핀치는 '고집불통'이라 불렀다. 


"고집불통이 자기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양보하지 않아.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지.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그저 비난만 하고. (...)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지. <나는 이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이 싫어, 그러니까 나는 이들과 상대하지 않아>라고 말이야. 이것아, 그들과 상대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절대로 성장하지 못할 거야. 예순 살이 되어도 지금과 똑같을 거라고." (375-376쪽)


한편 애티커스는 한결 성숙한 모습이었는데,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독설을 퍼붓는 딸에게 '자랑스럽다'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물론 내 딸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물러서지 않았으면 했지. 가장 먼저 내게 맞섰으면 했어." (390쪽)


책이 쓰여진 1950년대 미국, 인종 관련 이슈로 양쪽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그중 누군가는 이슈를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으로 작가가 이 책을 썼을지 상상해 본다. 소설 속의 이야깃거리를 통해 저자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에게 네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틀렸을 때"라며 진 루이즈에게 고향에 내려올 것을 권유했던 삼촌 핀치의 말처럼, 메이콤 사람들과 진 루이즈의 신념은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차이를 포용하고 다양성을 인정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붙잡아 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개인의 성숙은 물론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공동체의 발전도 이룰 수 있는 것 같다. 



읽는 이에게 이렇듯 다양한 인사이트를 선사하는 하퍼 리의 <파수꾼>. 먼저 발표된 <앵무새 죽이기>를 먼저 읽고,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이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그래서 작가가 더욱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90세의 연로한 할머니가 된 그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번역자의 각주와 역자 후기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 주요 인물들의 주장을 색깔 별로 태그 표시해 읽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 읽기 편했다는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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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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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기원전 110년 전의 로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로마 시내를 가만히 걷고 싶다눈을 감으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율리아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보일 것 같다율릴라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떻게 될까아프리카 대륙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 1권을 완독하자마자, 나머지 두 권도 주문했다저자가 20년이란 세월을 쏟아 완성한 역작엄청난 양의 사료와 연구서적을 검토하며 글을 썼던 그는 결국 시력을 잃었다는데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을 동시대에 읽을 수 있어 행운이다.

로마의 일인자(왠지 제목에서 낯간지러움이 느껴진다) 1권은 기원전 110년부터 108년까지의 로마의 모습을 보여준다한 권의 분량으로는 비교적 짧은, 3년이라는 시간에 세 명의 주요인물과 그들 가문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로마 이야기가 그려진다로마의 유서깊은 명문귀족이지만 재산이 많지 않아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무관 출신의 실력자에 재력도 겸비했지만 귀족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계에 제대로 진출할 기회가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가문의 피를 물려 받았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재산을 탕진한 아버지 때문에 빈민가에서 자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인물 한 명한 명이 작가의 손을 빌려 생생하게 살아나 자기 이야기를 들려 준다.

남성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시대 여성들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기에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입도가 높다또한기원전 110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 벌어질 법한 에피소드도 많다가문의 재력이 부족해 자녀들이 꿈을 펼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마음에 믿을 만한 신랑감을 골라 정략 결혼을 제의하는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려 깊음기쁜 마음으로 부모의 제안에 따라 결혼을 결심하는 장녀 율리아의 태도율리아를 소중히 여기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자상함과 명문가의 결혼으로 로마 최고 권력자에 도전하는 배짱그리고 장인과 사위 간의 신뢰가 특히나 인상 깊었다반면 말괄량이 막내딸 율릴라가 짝사랑하는 술라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단식 투쟁을 하는 모습은 우스웠는데막내의 철없음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로마의 정치구조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새로운 용어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점이다다행히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기에 스토리 파악에 지장을 줄 정도로 방해가 되지는 않았지만로마 역사를 처음 접하는 초심자의 경우에는 집정관호민관법무관원로원 등의 낯선 용어를 접하면 책에 충분히 몰입하기 전에 흥미가 반감될 수도 있을 것 같다앞쪽에 간략하게라도 언급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 책을 꼭 역사물로만 접근할 필요는 없다로마사로마 정치체제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콜린 매컬로가 이끄는 대로 인물들의 흐름을 따라 가다 보면 한 편의 대하소설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재미있는 소설도 읽고 로마사도 자연스럽게 익히고평소 로마사에 관심이 있던 분들은 물론이고쏟아지는 긴 이름에 지쳐 로마사 읽기를 포기한 분들께도 조심스럽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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