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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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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헬프』라는 영화를 보고 원작을 찾아 밤새 읽은 적이 있다. 1960년대 인종차별 심한 미시시피주,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유색인 가정부의 삶과 그녀들의 용기를 다룬 이야기였다. 『노예12년』은 그보다 100년 전 미국상황을 보여주며 인권과 정의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뉴욕의 평범한 자유민이던 솔로몬 노섭은 1841년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플랫’이라는 이름을 달고 루이지애나주로 팔려간다.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윌리엄 포드를 위해 성실하게 일했지만, 주인의 재정난으로 난폭한 목수 티비츠에게 양도된다.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두 번째 주인을 거쳐 노예에게 채찍질하기를 즐기는 무자비한 농장주 에드윈 엡스 밑에서 10년간 일하다가 노예제도에 대해 진보적 입장인 떠돌이 목수 배스를 만나 자유를 되찾는다.

 

 

노예를 ‘말하는 재주가 있어 조금 더 값나가는 동물’ 쯤으로 여기는 주인에게 비인간적 대우를 받지만, 솔로몬은 한순간도 자유인임을 잊지 않고 ‘백인의 정신’으로 살았다 고백한다.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그가 겪은 일을 들려준다. 자녀와 생이별당하는 어머니, 채찍질이 고통스러워 탈출을 감행하다 붙잡혀 죽는 노예, 가장 일을 잘하지만 젊고 예뻐 가장 많이 맞는 노예, 앉아서 점심을 먹을 새도 없이 온종일 착취당하고 얻어맞는 노예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잔혹함에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솔로몬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희망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2년간 노예로 살면서 인간성의 바닥을 접했지만, 그를 지배하는 감독관과 농장주를 절대적인 악인으로 단정 짓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의 어린 아들이 늙은 노예를 엄하게 혼내고 채찍질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할 정도다.

 

 

그들에게 가장 잔인한 형태로 존재하는 노예제가 그들이 지닌 인간적이고 훌륭한 감정들을 야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중략) 노예 소유자가 잔인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잘못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습과 사회의 영향을 이겨 내지 못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채찍은 노예의 등을 후려치라고 있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에, 그는 성장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가 쉽지 않게 된다. (p.199~200)

 

 

영혼의 색깔은 다르지 않고, 인간의 잔인함은 체제와 환경에서 비롯한다는 그의 신념과 이미 맛본 적 있는 자유의 힘이 버팀목이 되어줬다. 비록 그가 기소한 노예상인에게 당대에는 정의가 구현되지 않았지만,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정신은 승리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선’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시선과 약자에게 귀 기울이는 배스의 마음, 그리고 『헬프』 여인들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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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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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사춘기 중학생들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재치있게 다룬 '몽정기'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는 조금 더 솔직한, 소녀 버전의 몽정기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소설 속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 1980년대, 5월 혁명 후 프랑스이다 보니 더욱 파격적이다.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당시 80년대는 68혁명이 가져온 성 해방과 나중에 대두할 에이즈의 출현 사이에 끼인 무렵이어서 인류 역사상 성적 자유를 가장 크게 만끽한 시기다. 젊은 여자아이들은 어서 빨리 처녀성을 버려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렸다. 그 아이들이 혼란 속에 성에 대해 경험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그리고자 한 작품이 ‘가시내’”라고 한다.


제목부터 과감하다. 원제는 클레브(clèves)라는 극중 가상의 마을인데, 클리토리스와 레브르(lèvre ; 입술, 복수로 쓰일 땐 음순이란 뜻도 있음)의 합성어라며, 작가는 극중 화자인 솔랑주의 입을 빌어 설명한다.
 


책은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 '시작하다'에서는 사춘기 소녀가 초경을 시작하면서의 심경변화와 당혹스러움을 그렸고, 2부 '사랑하다'에서는 또래 남자아이들과의 데이트와 첫 경험, 3부 '다시 시작하다'는 성인 남성인 비오츠와의 관계를 다룬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동급 여학생들끼리 속닥속닥 얕은 성 지식을 공유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읽으면서 어쩜 이리 성에 대해 무지할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들에게는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주는 어른도, 제대로 된 콘텐츠도 없다. (특히 솔랑주가 비오츠와 관계를 갖고 성병에 걸릴 지경에 이르러도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그녀 친구인 로즈 어머니도 눈치챘는데.)


솔랑주는 성기를 뜻하는 정확한 단어도 모른 채 비속어를 사용하고, ‘몸을 활처럼 휘고’, ‘숨을 헐떡거리는’, ‘난폭하게 소유하는’, ‘몸을 꼬며 신음하다’와 같은 주워들은 문장으로 관계를 묘사하며 자신을 성적매력이 넘치는 여성으로 상상한다. 친구들과 비오츠씨 앞에선 성경험이 많은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시쳇말로 ‘중2병’ 환자 같아 실소했다.


소설의 첫 장면은 마을 축제에서 만취한 아버지가 꺼낸 성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솔랑주의 기억이었다(그게 솔랑주만의 기억일 수도,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걸, 독자는 친구 로즈의 말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마지막 장면은 실질적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그녀를 양육한 비오츠 씨를 배신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모습이다. 솔랑주는 그의 사랑(혹은 책임감)을 깨닫고도 그 이상 생각하기를 귀찮아한다.


병문안 가기 꺼려하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꼭 네 아버지 같다’며 혼을 낸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비행사라 믿고(실은 공항 포터였는데) 자랑스러워하던 그녀는 어쩌면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솔랑주의 문제는 부모의 불화와 그녀의 애착 대상인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온,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비정상적 자존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직업이 '정신분석가'라지 않나. 그녀는 솔랑주를 통해 이 사회에, 문학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문학은 답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질문이라도 맥락은 변하겠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상투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답들에 대한 투쟁을 하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저자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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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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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이야기 <푸른수염>은

대저택에 혼자 사는 푸른수염에게 시집 온 어린 신부가 금지된 방에 몰래 들어가

살해된 전 부인들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수위가 높은 잔혹동화다.

노통브는 이야기를 각색해 현대판 푸른수염을 창조해 냈다.

저렴한 월세에 끌려

파리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입주한 여주인공 사튀르닌.

이전에 입주한 여덟 명의 여자가 모두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쿨한 척,

집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해 위험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벨기에 여인으로 나온다.

집주인은 스페인 귀족 출신이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저택에 은둔하는 돈 엘리미리오.

그는 결혼은 하지 않고 세입자를 바꿔가며 사랑을 고백하는 집주인이자

저녁 요리와 지난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짓는 걸 즐기고 컬러에 집착하는 괴짜다. ​

이 둘이 매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사랑(?)에 빠지고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금지된 방의 비밀은 조금씩 풀린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약간씩 일그러진 모습이다.

상처없는 사람은 없고,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도 없다지만 

그가 그리는 인물은 그 비뚤어진 내면을 극대화해 보여 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렇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 하지만 자기의 내면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비밀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듣고 싶어하지 않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사튀르닌.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가리지 않고, 

죽더라도 컬렉션을 완성하려는 돈 에리미리오. 

​​

노통브 스타일대로 눈에 보일듯 이야기의 흡입력은 강하지만

막상 읽고 나면 저자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곰곰히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다. 

​ 

 


사랑에 빠지는 건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나마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은 형식의 기적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전에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시한폭탄처럼 나중에 찾아오는 벼락같은 사랑은 이성에 대한 가장 거대한 도전이다.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이 계란 노른자와 금의 결합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에게 반하고 만다. 우리는 사튀르닌의 노여움을 이해할 수 있다. 고작 그런 걸로 사랑에 빠져? 사실, 돈 엘레미리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니까.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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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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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강 다리 위에서 시작된다.
투명인간이 된 사실을 감추려 싸이클 복장으로 위장한 한 남자는
도로 건너편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듯 강물을 내려다보는 이는, 투명인간 김만수다.
 
소설은 김만수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주변인들이 그에 대해 회상하며 증언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가족, 친구, 선생님, 동료, 상사 등 
그를 인생의 일부로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에 따라 독자는 김만수를 들여다 본다.
3남 3녀의 차남으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는 고단한 그의 인생을.
 
독립운동을 하다 낙인이 찍혀 야반도주를 한 할아버지부터
농사짓고 소팔아 자녀를 대학보낸 아버지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컴퓨터의 노예가 된 아들까지
김만수의 가족사는 한국사이고, 서민의 일반적인 삶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에게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읽으며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겪은 김만수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지만
정작 주인공인 김만수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관찰하고 유추할 뿐 진짜 속마음은 알 수가 없다.
속을 모르니 미련하도록 헌신적인 그가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아, 화가 나기도 한다.
 
똑똑하진 않지만 착하고 순수한 김만수. 인정이 많은 김만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믿음이 그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붙든다.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사실 돈 모아서 부자 될 게 아니고 남들한테 자랑할 게 아니면 돈 많이 필요 없다. 투명인간이 되면 어차피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옷 자랑, 돈 자랑, 피부 좋다 자랑할 일이 뭐 있는가. 기본적인 생활만 해결되면 끝이다.
                                                           - 싸이클 복장을 한 남자와 김만수의 대화에서
 
저자가 김만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 
그에게는 속내를 읊조리는 것조차 사치였을까?
어쩌면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지 모른다.
진짜 인간됨이 무엇이냐고.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고통의 비명으로 가득찬 김만수의 속을 차마 들여다보지 못해서라  
짐짓 결론냈던 난, 크게 한 방 맞았다.

그는 내 아버지였다. 코끝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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