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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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엊그제 배스킨라빈스 31에서 내가 좋아하는 체리쥬빌레를 사왔다. 아내는 별로 좋아하는 맛은 아닌데 입맛이 조금 유아틱한 나를 위해서 굳이 넣으셨다고 하신다. 물론 와이프와 내가 그 체리쥬빌레 맛을 좋아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달다'는 데는 합의했다. '체리맛'이라는 것도 동의했을 것이다. 근데 그게 정말 동의일까? 내가 느낀 맛과 와이프가 느낀 맛이 100%똑같을까? 그리고 그것이 '체리맛'에 100% 수렴할까? 말도 안되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 어느 하나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모님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빌린 언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아마도 진솔하게 느끼고 있을 법한 감정을 절반도 표현하지 못하고 소위 짱깨식으로(어머!) 소통할 뿐이다. 어디 소통뿐일까? 애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사물 또는 사건은 그 영역과 분석과정에서 이미 언어로 인하여 왜곡되어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영역과 인식하는 과정, 소통하는 과정은 모두 왜곡과 해명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내가 인터넷상에서 소통 운운하는걸 굉장히 짜증내하는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일찌기 '기호란 모든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인식, 소통, 이해 모두 기호에 의해 틀지워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 의미를 추측하고 있는데,-_-;;;; 아무튼 기호에 의해 인간의 인식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규정된다는 이러한 분석은 묘하게 짜릿하면서도 위험한 구석을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 이성과 이로 인한 인식이라는게 애초부터 취약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기호의 사용과 조합을의 살짝 뒤틀고 엊갈려 배치한다면, 인간을 이성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결과물에 대한 '이성적인 광신(?)'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러한 기호의 연관관계와 의미와 활용양태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기호학자'다. 그의 소설이나 사회비평서가 다루는 부분은 공항 면세품 광고에서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중세의 신학논쟁까지 이어져있지만, 사실 큰 틀에서 기호가 창조되는 방식과 그것이 자체적으로 소통되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의미 왜곡에 대한 분석이라는 취지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후기의 작품으로 갈수록(아, 벌써 이렇게 쓰게 되었구나. 움베르토 에코는 이제 역사속 인물이 되어버렸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대놓고 이론서'로 보이는 듯한 움베르토 에코의 이 소설 또한 이러한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독특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중인격자가 자신의 기억을 역추적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그 내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추리해 나가는 방식은 에코의 전매특허로 보일 지경이다(사실 몇 되지도 않는 에코 소설에서 '일기', '기억상실증' 이런 소재는 좀 지겨운 느낌도 있다). 아예 대놓고 구조주의 철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는 이 소설은 이성의 틀거리를 뒤집어쓴 광신적인 정치적 주장이 대중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아니면 단순한 증오에의해서 주인공이 벌이는 구라-대표적으로 시온의정서 같은 것-의 패턴이 오늘, 우리사회의 유언비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법이라던지, 기억을 편집하여 연결하는 법이라던지, 인간의 인식가능한 경로에 의존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것을 이용하여 여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설익은 노력 같은건 그냥 21세기 최첨단 소통의 무기라는 SNS만 돌아다녀봐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제목이 '프라하의 묘지'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을 위시한 그 주변 인물 그 누구도 프라하의 묘지에 가본일이 없다. 아니 애시당초 소설의 주무대는 체코는 커녕 독일도 폴란드도 아닌 라틴 유럽-그러니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쪽이다. 그저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의 배경일 뿐인 '프라하의 묘지'는, 역설적으로 등장인물들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제목으로 적당해 보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이러한 '기호'는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만, 이러한 텍스트는 역으로 인간의 현실, 나아가 미래까지도 규정한다. 이게 꼭 '프라하의 묘지'시절의 일만은 아니다. 펙트의 외피를 뒤집어쓴 텍스트에 대한 광신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광증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 팩트의 진위여부를 떠나 기본적으로 맥락에서 동떨어진 펙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편견으로 가득찬 기호로부터 자유로운 텍스트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순수한 사실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오늘날 '올바른' 이성을 위한 노력과 '총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새삼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큰 구획에서 볼 때 에코는 포스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학자이다. 기호학 자체의 학문적 성격도 그렇거니와, 소설가로서도 에코는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로 분류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에코는 이전부터 누누히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낸 바 있고, 심지어 그러한 사고의 흐름을 '새로운 중세'와 비견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려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려들고 있다는 것 또한 의식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근대의 폭력과 인간 이성의 취약성을 고발하기 위한 포스트주의적인 반성이 '올바른 방향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반성이 반성으로만 남을 경우 이는 또다른 '이성적인(?) 광신'의 촉매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호의 홍수 속에서 올바름을 탐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더욱 절실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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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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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있는집'에서 태어났음에도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본공산당에 가입한 아버지를 둔 저자는,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전통의 소산이라 할법한 '평화와 사회주의에 관한 제문제'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이 되어 프라하로 가게 된 아버지 덕택에 프라하의 '국제학교'를 다니며 구 공산권의 다른 나라 친구들과 생활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된다. 본서는 이러한 저자의 학창시절 경험담과 함께 동구권 몰락 이후인 1990년대 중반,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변화된 생활을 보며 느끼게 된 감정을 굉장히 아름다우면서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주로 프라하 국제학교에서 만났던 세 친구에 관한 에피소드를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본서에서, 흥미롭게도 그 친구들 중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랄 법한 소련이나 현지인인 체코 출신은 한명도 없다. 그리스에서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 프라하로 망명한 가족을 따라 온 리차, 루마니아 공산당의 고위층 자제이지만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싶어하던 아냐, 공산주의 주류로부터 굉장히 이탈하여 있던 유고슬라비아(이지만(?) 보스니아) 출신의 야스나와의 학창시절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명시적으로 정치나 네셔널리즘에 관한 언급을 거의 하고있지 않지만,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뿌리를 갖고 외국의 학교에 다니게 된 소녀들의 경험담, 그리고 동구의 몰락 이후 친구들을 만나 그 친구들이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하여 얼마나 변하였고, 뜻밖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속에서 그런 것들은 매우 세련되고 은은하게 서술되고있다.  

동구가 몰락하고 역사라는 수레바퀴에 치이고 깔리면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인생을 살게 된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저자의 문체는 여전히 담담하다. 리차-아냐-야스나 모두 자신이 유년시절에 품었던 꿈과 자의반 타의반 다른 삶을 살고 있고, 그러한 삶을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는 때로는 비판적이고 때로는 감성적이지만 이를 이용해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보편적인 감상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헌데 책을 읽고 난 후에서야,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모여 송곳하나 들어갈 곳 없는 짜임새가 엿보이더라는 점은 개인적으로 정말 짜릿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심지어, 세 명의 친구들의 이미지는 세가지 색깔-파랑, 빨강, 하양-으로 엮이고, 그 친구들은 색깔이 상징하는 것들에 대한(즉, 자유 우애 평등에 대한) 표상으로 읽히기까지 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학창시절의 추억과 90년대 중반의 만남 사이에서, 소녀들에게 역사는 어디까지나 조연이고 정치는 엑스트라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연과 엑스트라는 이 세상 모든 '주연'들의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녀'시절과 글이 쓰여지던 당시의 변화된 상황 사이를 오가며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하기보다는 그저 그 친구들을 조용히 비추고 묘사해준다. 물론 저자 자신의 생각 자체가 아예 서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생각이 표현될 경우 친구가 받을 섭섭한 감정에 대해 저자는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로부터 소외되고, 때로는 자기자신으로부터까지 소외된 친구들의 모습을 보듬으며 추억을 거슬러올라가는 저자의 어조는 담담하기 이를데없지만, 독자는 그 속에서 무지개처럼 많은 감상을 쏟아낼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서 무어라 콕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 글쎄, 그와 유사하긴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따뜻한 무엇말이다.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라는 기치를 내건 공산주의 운동과, 그 이상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의 일환으로 운영되던 국제학교에서의 저자의 경험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네셔널리티라던지 애국심 같은 것이 더 도드라져보인다. 저자 또한 가끔씩 지나가듯 언급한 바, 보편성(즉, 국제주의)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어찌되었건 결국 개별성(내셔널리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하지만 타국 국적의 어린시절 친구들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 속에서 '무슨'이론을 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자의식을 확립하기 위해 어떠한 집단에 의지하는 것은, 그것이 가족이건 국가건 무엇이건 간에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론이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로 설정될 수는 있겠지만, 잊지 말하야 할 것은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이다. 국제주의라는 이상은 초기 공산주의에도 있지만 신자유주의에도, 68년 프라하를 진압하러 온 소련군에도 있다. 네셔널리즘은 나치나 파쇼들에게도 있지만,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하고, 그 차이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소녀들의 따스한 대화 속에도 존재한다. 

이처럼 저자의 독특한 경험은 자연스럽고 세련된 서술로 인하여 자연스레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아니, 그런 부분은 따지고보면 '너무 당연한'메시지이기에 전한 것이 아니라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본서의 가치는 민족이나 국가, 혹은 사회주의와 그 이후 정치의 역설적인 부분에 대한 것에 있지는 않은 듯 하다.(사실 명시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아름답다고 할만큼 빈틈없는 짜임새와 문체, 그리고 그 경험담을 통해서 느낄수 있는 따뜻함. 우리 모두 한 때 가지고 있었던, 하지만 이제는 잊어버린(그리고 되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기약도 없는) 민족이니 국가니 정치적인 차이니 하는 것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만큼 강력했던(?) 어린시절의 호기심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사람에 대한 꾸밈없는 애정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이 본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인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의 한국어판 제목이 '소녀'시대라는 점은 나름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가 그 무엇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고, 그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던 가장 강인했던 전성기(?)는, 이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소년 소녀 시절이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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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11-13 16:06   좋아요 0 | URL
편협한 국수주의를 가리기 위한 국제주의...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는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率路 2010-11-16 17:26   좋아요 0 | URL
어찌보면 그런 틀거리에선 조화라는게 애시당초 어불성설인것 같기도 하구요..

2011-04-2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率路 2011-04-25 09:32   좋아요 0 | URL
아 확인했는데 제가 잠깐 정신이 없어서 바로 답을 못했어요ㅋㅎ 지송지송ㅋ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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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영화를 '접한'적이 있다. 근데 그게 그야말로 정말 '접한' 수준인데, EBS에서 두번이나 방영(한번은 '제5도살장'으로, 한번은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그러고보니 주인공의 이름이 Pilgrim이다-으로 방영한바 있다.)하는 동안 두번다 '일부분'만 봤기 때문이다. 일부분만 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계속 봐주기 괴로울 정도로 다소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중간부터 본 입장에선)어른이 되었다가 나이어린 병사가 되었다가 외계로 갔다가 하는데 이거 뭐 종잡을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그런 인연이 있는 본서를 이제와서 갑자기 접하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이 있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결정적으로 알라딘 반값할인 행사도 큰 이유가 되겠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기회를 부여해주신(?) 알라딘에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한달음에, 책장 넘어가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르가 SF라고는 하는데 정말 SF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찮은(?!), 아울러 포스트모던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포스트모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또 무엇한, 그렇게 모호한 성격의 본 소설은 적어도 '반전(反戰)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명확한 것 같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모든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능력을 지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다 알게 된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가는거지'라는 말이 이 소설에서 가장 빈번히 쓰이는 문구라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그러한 '허무주의'가 뭔가 의도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힘빠지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가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없지않다. 역자 해설에도 언급된 바이지만, 저자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그는 2년 전인 2007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전집회에 열렬히 참여하고 부시의 애국법에 반대하여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는 캠페인에 참여한, 일반인이 보기엔 굉장히 '열혈'이라고 비칠 정도의 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 그런 허무주의라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고,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의 '허무주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마주치는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자'들은 본질상 그것이 지시하는 바와 다른 의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아닌게 아니라 세상이 다 그런거지, 니들이 그렇게 악다구니 쳐봐야 어쩔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치고 세속적 욕망을 충족할 기회를 굉장히 열정적으로, 호시탐탐 노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우리안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사안마다 선택적으로 현현하기에, 따지고보면 그러한 허무주의를 우리는 허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내비치는 허무주의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그러니까, 부도덕하거나 무신경한 자신의 태도를 면피하기위한 방패로 종종 쓰여지곤 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다. 책 초반에 언급된 바, 저자의 아버지가 저자에게 악당이 등장하는 소설을 쓴적이 없음을 이야기하자, 저자는 대학시절 내내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구역질나거나 나쁜 사람이 없음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숙명론적 허무주의의 그 무차별적 성격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사람은 다르지 않고 전쟁은 나쁘며 빈곤과 독재는 척결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돕는 것이 좋은 것이고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고 배운다.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선량하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안다. 그게 힘들건 어쩌건 그렇게 살아야 함을,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알고있다. 엊그제 지하철역에서 본 행려가 냄새나고 무서워서 싫고, 의견이 다르면 때려주고 싶고,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완력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고 싶은게 사람마음이어도 어려운 사람을 돕기위해 노력하고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독재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물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저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순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엇하나 바꾸기 쉬운 일도 아니고, 우리가 평생 아무리 이런저런 활동을 한들 나아지는 구석은 아주 천천히, 일부분이나마 개선되는듯 마는듯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그런 것들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그래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그런 것들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인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기에는 세상 일이란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히 세속적인 이유에서 뿐만아니라 양심의 충돌 또한 우리를 제지한다. 거시폭력에 맞서다 벌어지는 미시적이거나 국소적인 폭력과 불합리는 거시적인 대의에서조차 우리를 물러서게 만든다. 오늘의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거대한 계획에 비추어보면 우리들 하나하나의 일상은 보잘것없고 모순과 역설의 연속이기에 우리 스스로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세속적 안위와 거대담론의 실현가능성과 엮이다보면 간단한 신념을 '대체적으로라도'지키며 살기조차 쉬운일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누구는 '허무주의'라는 탈을쓰고, 누구는 '현실주의'라는 탈을 쓰고 우리가 알고있는 '좋은 삶'의 지향점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내팽개치고 살게된다. 내가 보기엔 저자가 내비치는 숙명론적 허무주의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그만큼 허약한, '올바름'을 향한 우리의 이상과 그에 따른 삶을 지켜나가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점에서 저자의 허무주의야말로 지극히 근본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너무 우울하지 않을까, 근본적인 허무주의로 우리의 상식과 이상을 방어하며 살아가는 것은 암담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을 저자는 트랄파마도어 인의 삶의 자세를 통해 제시하는 듯 하다. 즉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하루하루 우리가 아는 상식과 이상에 기초해 살며, 그러한 이상의 좌절과 진보의 역설조차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낙관을 잃지말자는 것. 이런 식의 삶의 자세라면, 나도 허무주의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독특한 구성, 참신한 내용만큼이나 즐거운 책이다. 하지만 라이프지의 말마따나 본서는 '웃어서는 안되는 웃기는 책,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픈 책'이기도 하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허무주의적인 열정'과 그에 따른 삶의 자세가 솔직담백하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더더욱 좋았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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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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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일종의 신파극이 될법했던 메인스토리가 괴상하게 변해버린 것은 오로지 미디어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지극히 얌전하고 성실한 아가씨가 술집에서 처음만난 탈주범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그가 도피하는 것을 도와 곤경에 처한다는 스토리 자체는 그 누구라도 기시감을 느낄법한 뻔하디 뻔한 고전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황색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부풀려져 급기야 평범한 한 여인을 '실제'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바, 결국 본 소설은 아마도 '언론'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굳이 우리에게 읽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70년대에 쓰여진 본 소설은 독일에서 거의 조중동을 합한 수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빌트지를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애초에 소설은 본 소설상의 신문인 '차이틍'과 '빌트'지의 관련성을 '굳이'부인함으로서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이미 정해놓은 수순대로 취재원의 언급을 왜곡하고 잡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키는 거대 언론의 횡포라던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심지어 너무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카타리나의 생활 자체가 언론 자체에 의해 이미 덧씌워놓은 이미지와 맞지 않자 그마저도 '악마의 주도면밀함'으로 해석해버리는 과정은, 그저 소설로 치부하고 읽기에는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다.(첨언하자면, 저자의 언급-일종의 '팜플렛'이라는-이 무색하게도 본서는 소설적으로도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본서는 단순히 개인과 언론간의 관계뿐 아니라 메카시즘적인 마녀사냥이 어떠한 구조로 돌아가는지, 그 과정속에서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인은 어떻게 유착되는지를 굉장히 미시적인 사건 속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하며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무엇에 의해 돌아가는가, 현대사회가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또 그만큼 얼마나 주도면밀한가, 아울러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방어할 수 있는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본 소설은, 저자 스스로도 표현했듯 팜플렛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상징적이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건 오늘 우리의 현실일게다. 상황이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늘날의 언론이 카트리나 블룸의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절보다 더욱 주도면밀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언론은-카타리나 블룸에게 행했던 것처럼-노골적으로 기사를 부풀리고 취재원의 말을 조금 비틀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촌스러운'방법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언론은 오로지 진실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진실에 의해 거짓을 말한다. 그게 뭔소리냐고? 다들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목도했을꺼다. 전문대에 백수, 골방에 앉아 혼자 책만파던 네티즌이라는 '사실전달'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전달 자체가 왜곡이었다.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의 파괴적인 힘은, 말과 글이라는 도구로 이루어진 근대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수단 즉, 법률과 규정에 의해 통제되는 것조차 어불성설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68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지독했던 경험 속에 쓰여진터라, 본서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 또한 오늘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에 대해서, 소수자에 대해서는 사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성을 보여주면서도 권력과 자본에는 알아서 굴종하는 언론과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시각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하지만, 미디어는 현대사회에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미디어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딱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속에 국회는 지난주 미디어법을 지들말로는 '강행처리'했단다. 이런. 눈앞에 빤히 보이는 김이박씨의 잃어버릴 명예를, 그리고 부당하게 살아날 또다른 김이박씨의 때이른 복권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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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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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러시아 예술에 있어 문학의 그 특수한 지위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서 흔히 떠올리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인데, 정작 러시아 본토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는 체호프라고 한다.(물론 나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라 확언하긴 어렵다마는) 체호프와 푸쉬킨을, 삼음절이라는 것 외에는 한글자도 일치하지 않는 이 두사람을 언제나 헷갈리곤 하는 나로써는 다소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야기이긴 한데, 그러던 중 세계3대 단편소설 어쩌고에 체호프의 이름이 또 보이길래 등수놀이 좋아하는(?!) 못된 독자로써 엉겁결에 읽게 된 책이 본서이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고, 사실 서점에서 사람 기다리다가 본서에 수록된 첫단편인 '관리의 죽음'이 너무 웃겨서(-_-;;;;) 본서를 읽게 되었다. 마치 120여년 후 한반도에서 하나의 개그 코드가 되어버린 듯한 '허무개그'랄까, 그런 것을 선취한 듯한 체호프의 시대를 앞선 유머감각(?)은 고전의 근엄함에 대비되어 더욱 경쾌하게 읽혔고, 이는 웬지모를 가을의 우울함에 빠져있는 나에게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본서에 실린 10편의 단편(아무리 세어봐도 10개인데 왜 책 말미의 소개에는 아홉편이라 쓰여있는건지?)을 다 읽은 결과 '관리의 죽음'이 단순한 개그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단편을 읽고 좀 더 유쾌해보고자 했던 나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체호프의 모든 단편들을 꿰뚫는, 일종의 공집합으로서의 정조는 딱 한가지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고 그런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렇고 그렇다는게 뭐가 그렇고 그렇다는 것인지? 그것은 '인간의 삶이란 원래 덧없는 것'으로 풀어 말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관리의 죽음'이나, 아마도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법한 '드라마' 또한 오늘의 독자가, 저자의 다른 단편을 읽지 않고 그것만 읽었다면 애초에 습득한 '코드'에 의해 유쾌해지겠지만, 다른 단편과 함께 그 작품을 읽을 경우 체호프가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의도한건 바로 그 인간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음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체호프의 작품에 유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체호프의 모든 단편에는 대놓고건 아니건 어디에나 묘한 익살이 깔려있다. 문제는 이 부분에서 유쾌함을 느끼고 있는 독자의 감상을 독자 스스로 다시금 돌이켜볼 때 곱씹을 수밖에 없는 우울함이다. '티푸스'에서 클리모프는 조카가 자신의 병에 전염되어 죽었음에도 회복기의 동물적 기쁨을 이겨내지(?)못한다. 사실 내가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으며 느끼는 유쾌함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기에 본서를 읽는 내내 우울했다. 진리라는게 알려고 한들 알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라는게 죽고나면 덧없이 잊혀지는 것인데, 우리는 왜그리 아둥버둥 난리인걸까. 그런 것들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결국엔 그 속에서 살아가며 '덧없음이 예정된 즐거움'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것은, 일종의 인간 본성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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