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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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엊그제 배스킨라빈스 31에서 내가 좋아하는 체리쥬빌레를 사왔다. 아내는 별로 좋아하는 맛은 아닌데 입맛이 조금 유아틱한 나를 위해서 굳이 넣으셨다고 하신다. 물론 와이프와 내가 그 체리쥬빌레 맛을 좋아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달다'는 데는 합의했다. '체리맛'이라는 것도 동의했을 것이다. 근데 그게 정말 동의일까? 내가 느낀 맛과 와이프가 느낀 맛이 100%똑같을까? 그리고 그것이 '체리맛'에 100% 수렴할까? 말도 안되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 어느 하나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모님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빌린 언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아마도 진솔하게 느끼고 있을 법한 감정을 절반도 표현하지 못하고 소위 짱깨식으로(어머!) 소통할 뿐이다. 어디 소통뿐일까? 애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사물 또는 사건은 그 영역과 분석과정에서 이미 언어로 인하여 왜곡되어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영역과 인식하는 과정, 소통하는 과정은 모두 왜곡과 해명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내가 인터넷상에서 소통 운운하는걸 굉장히 짜증내하는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일찌기 '기호란 모든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인식, 소통, 이해 모두 기호에 의해 틀지워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 의미를 추측하고 있는데,-_-;;;; 아무튼 기호에 의해 인간의 인식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규정된다는 이러한 분석은 묘하게 짜릿하면서도 위험한 구석을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 이성과 이로 인한 인식이라는게 애초부터 취약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기호의 사용과 조합을의 살짝 뒤틀고 엊갈려 배치한다면, 인간을 이성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결과물에 대한 '이성적인 광신(?)'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러한 기호의 연관관계와 의미와 활용양태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기호학자'다. 그의 소설이나 사회비평서가 다루는 부분은 공항 면세품 광고에서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중세의 신학논쟁까지 이어져있지만, 사실 큰 틀에서 기호가 창조되는 방식과 그것이 자체적으로 소통되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의미 왜곡에 대한 분석이라는 취지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후기의 작품으로 갈수록(아, 벌써 이렇게 쓰게 되었구나. 움베르토 에코는 이제 역사속 인물이 되어버렸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대놓고 이론서'로 보이는 듯한 움베르토 에코의 이 소설 또한 이러한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독특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중인격자가 자신의 기억을 역추적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그 내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추리해 나가는 방식은 에코의 전매특허로 보일 지경이다(사실 몇 되지도 않는 에코 소설에서 '일기', '기억상실증' 이런 소재는 좀 지겨운 느낌도 있다). 아예 대놓고 구조주의 철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는 이 소설은 이성의 틀거리를 뒤집어쓴 광신적인 정치적 주장이 대중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아니면 단순한 증오에의해서 주인공이 벌이는 구라-대표적으로 시온의정서 같은 것-의 패턴이 오늘, 우리사회의 유언비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법이라던지, 기억을 편집하여 연결하는 법이라던지, 인간의 인식가능한 경로에 의존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것을 이용하여 여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설익은 노력 같은건 그냥 21세기 최첨단 소통의 무기라는 SNS만 돌아다녀봐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제목이 '프라하의 묘지'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을 위시한 그 주변 인물 그 누구도 프라하의 묘지에 가본일이 없다. 아니 애시당초 소설의 주무대는 체코는 커녕 독일도 폴란드도 아닌 라틴 유럽-그러니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쪽이다. 그저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의 배경일 뿐인 '프라하의 묘지'는, 역설적으로 등장인물들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가본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제목으로 적당해 보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이러한 '기호'는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만, 이러한 텍스트는 역으로 인간의 현실, 나아가 미래까지도 규정한다. 이게 꼭 '프라하의 묘지'시절의 일만은 아니다. 펙트의 외피를 뒤집어쓴 텍스트에 대한 광신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광증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 팩트의 진위여부를 떠나 기본적으로 맥락에서 동떨어진 펙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편견으로 가득찬 기호로부터 자유로운 텍스트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순수한 사실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오늘날 '올바른' 이성을 위한 노력과 '총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새삼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큰 구획에서 볼 때 에코는 포스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학자이다. 기호학 자체의 학문적 성격도 그렇거니와, 소설가로서도 에코는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로 분류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에코는 이전부터 누누히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낸 바 있고, 심지어 그러한 사고의 흐름을 '새로운 중세'와 비견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려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려들고 있다는 것 또한 의식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근대의 폭력과 인간 이성의 취약성을 고발하기 위한 포스트주의적인 반성이 '올바른 방향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반성이 반성으로만 남을 경우 이는 또다른 '이성적인(?) 광신'의 촉매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호의 홍수 속에서 올바름을 탐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더욱 절실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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