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영화를 '접한'적이 있다. 근데 그게 그야말로 정말 '접한' 수준인데, EBS에서 두번이나 방영(한번은 '제5도살장'으로, 한번은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그러고보니 주인공의 이름이 Pilgrim이다-으로 방영한바 있다.)하는 동안 두번다 '일부분'만 봤기 때문이다. 일부분만 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계속 봐주기 괴로울 정도로 다소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중간부터 본 입장에선)어른이 되었다가 나이어린 병사가 되었다가 외계로 갔다가 하는데 이거 뭐 종잡을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그런 인연이 있는 본서를 이제와서 갑자기 접하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이 있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결정적으로 알라딘 반값할인 행사도 큰 이유가 되겠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기회를 부여해주신(?) 알라딘에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한달음에, 책장 넘어가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르가 SF라고는 하는데 정말 SF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찮은(?!), 아울러 포스트모던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포스트모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또 무엇한, 그렇게 모호한 성격의 본 소설은 적어도 '반전(反戰)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명확한 것 같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모든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능력을 지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다 알게 된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가는거지'라는 말이 이 소설에서 가장 빈번히 쓰이는 문구라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그러한 '허무주의'가 뭔가 의도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힘빠지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가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없지않다. 역자 해설에도 언급된 바이지만, 저자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그는 2년 전인 2007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전집회에 열렬히 참여하고 부시의 애국법에 반대하여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는 캠페인에 참여한, 일반인이 보기엔 굉장히 '열혈'이라고 비칠 정도의 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 그런 허무주의라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고,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의 '허무주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마주치는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자'들은 본질상 그것이 지시하는 바와 다른 의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아닌게 아니라 세상이 다 그런거지, 니들이 그렇게 악다구니 쳐봐야 어쩔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치고 세속적 욕망을 충족할 기회를 굉장히 열정적으로, 호시탐탐 노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우리안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사안마다 선택적으로 현현하기에, 따지고보면 그러한 허무주의를 우리는 허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내비치는 허무주의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그러니까, 부도덕하거나 무신경한 자신의 태도를 면피하기위한 방패로 종종 쓰여지곤 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다. 책 초반에 언급된 바, 저자의 아버지가 저자에게 악당이 등장하는 소설을 쓴적이 없음을 이야기하자, 저자는 대학시절 내내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구역질나거나 나쁜 사람이 없음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숙명론적 허무주의의 그 무차별적 성격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사람은 다르지 않고 전쟁은 나쁘며 빈곤과 독재는 척결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돕는 것이 좋은 것이고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고 배운다.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선량하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안다. 그게 힘들건 어쩌건 그렇게 살아야 함을,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알고있다. 엊그제 지하철역에서 본 행려가 냄새나고 무서워서 싫고, 의견이 다르면 때려주고 싶고,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완력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고 싶은게 사람마음이어도 어려운 사람을 돕기위해 노력하고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독재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물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저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순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엇하나 바꾸기 쉬운 일도 아니고, 우리가 평생 아무리 이런저런 활동을 한들 나아지는 구석은 아주 천천히, 일부분이나마 개선되는듯 마는듯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그런 것들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그래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그런 것들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인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기에는 세상 일이란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히 세속적인 이유에서 뿐만아니라 양심의 충돌 또한 우리를 제지한다. 거시폭력에 맞서다 벌어지는 미시적이거나 국소적인 폭력과 불합리는 거시적인 대의에서조차 우리를 물러서게 만든다. 오늘의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거대한 계획에 비추어보면 우리들 하나하나의 일상은 보잘것없고 모순과 역설의 연속이기에 우리 스스로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세속적 안위와 거대담론의 실현가능성과 엮이다보면 간단한 신념을 '대체적으로라도'지키며 살기조차 쉬운일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누구는 '허무주의'라는 탈을쓰고, 누구는 '현실주의'라는 탈을 쓰고 우리가 알고있는 '좋은 삶'의 지향점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내팽개치고 살게된다. 내가 보기엔 저자가 내비치는 숙명론적 허무주의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그만큼 허약한, '올바름'을 향한 우리의 이상과 그에 따른 삶을 지켜나가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점에서 저자의 허무주의야말로 지극히 근본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너무 우울하지 않을까, 근본적인 허무주의로 우리의 상식과 이상을 방어하며 살아가는 것은 암담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을 저자는 트랄파마도어 인의 삶의 자세를 통해 제시하는 듯 하다. 즉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하루하루 우리가 아는 상식과 이상에 기초해 살며, 그러한 이상의 좌절과 진보의 역설조차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낙관을 잃지말자는 것. 이런 식의 삶의 자세라면, 나도 허무주의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독특한 구성, 참신한 내용만큼이나 즐거운 책이다. 하지만 라이프지의 말마따나 본서는 '웃어서는 안되는 웃기는 책,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픈 책'이기도 하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허무주의적인 열정'과 그에 따른 삶의 자세가 솔직담백하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더더욱 좋았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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