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레고리 헨더슨 지음, 박행웅.이종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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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다보면 리영희 선생님께서 저자인 헨더슨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이 책을 '당대 한국 정치에 관심있던 미국 지식인들의 필독도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다소 머뜩찮게 생각하는 어느 보수 언론인도 이 책을 20대에 꼭 읽어야할 책으로 꼽았던 기억도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구조'에 대한 이해가, 딱히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더라도 종종 이런저런 경로로 언급되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서가 그렇게 많이 읽혀지는 것 같지는 않다.(참고로 2000년에야 초판 번역본이 나온 본서는 한동안 절판이다가 작년인 2008년 새판이 나왔다)  

1968년 쓰여지고 1987년~1988년 사이 보완이 이루어진 본서가 무려 30년이라는 시간터울을 두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데에는 군사정권의 편협함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는 너무 옛날에 쓰여진 책이라는 점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핑계 삼기에 본서의 분석은 매우 도발적이고 문제적이며,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책은, 새로운 장이 덧붙혀진것이 아니라 60년대 판을 80년대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기에 시차마저 혼동되고, 오늘날 보기에는 틀려버린 듯한 저자의 예상도 없진 않지만 그런 단점은 정말 하잘것 없어 보일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의 사회와 정치문화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한국의 정치패턴은 한국만의 특수한 두가지 성격, 바로 동질성과 중앙집권성에 기원한다. 이러한 두 축은 한국 사회의 모든 주변을 중심으로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같은 사회구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고 계급, 인종, 종교 그 어떤 것으로도 구분할 수 없는 동질적인 사회는 역설적으로 개개인이 파편화, 원자화되어 어떠한 매개체 없이 상승기류로 휩쓸려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소용돌이'는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내부의 수많은 제도 변화와 외세의 침입, 민주화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큰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똑같은 제도나 규정도 애초 서양이나 기타 제3세계 국가에서 처음 도입했을 때의 의도와 취지와 달리 한국에 이식된다. 계급을 구분하기 수월했고, 인종이나 민족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서양의 경우, 대부분의 제도는 상이한 것들간의 응집과 구분되는 것들간의 타협을 위해 존재한다. 각각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이익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평화적으로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타협책으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면, 이는 한국정치와 다소 상이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 동질적인 구성원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 사회는, 정당을 만들고 노조를 결성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때문에 그러한 동질성에 의한 원자화가 유구한 전통을 지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에 결합되는 순간, 정당이나 노조 등 중간매개집단의 존재의의는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오로지 권력을 향한 도구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의 중심은 중앙권력이고, 주변부는 중앙으로의 상승기류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지방은 서울이라는 권력에 휩쓸리고 입법부는 입법보다는 권력에 대한 견제에 집중한다. 정당은 정강이나 이념, 계급의 이해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집권당과 그렇지 못한 정당간의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로 날밤을 지샌다. 중앙은 중앙대로 이러한 상승기류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상층부 관료기구를 무분별하게 확대하고 각 부서의 업무를 전문화하기보단 빈번한 인사교체로 자체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민주주의는 균형과 책임, 기본권과 계층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탱되기 보단 중앙을 향한 더 많은 기회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이래 아직까지도 수많은 정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불문하고(심지어 거스르면서까지) 오로지 반대당의 권력을 앗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중앙으로 향하려는 개개인의 야망이나 동질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색깔없는 권력을 위해 국가도 이념도 관습도 일찌감치 버리는 개개인의 행태들 또한 좋게보면 '개방성'으로 볼 수도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나 미국의 지배 때 반만년 역사를 지닌 국민들의 행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속절없이 그들의 교육기관과 행정기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또 실제로 들어가서 그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알고 살았다지만, 같은논리로 전근대적인 양반제도 같은 신분제 또한 아무론 충돌없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와 관행의 취지나 목적은 사라지고 파편화된 개인의 권력을 향한 무한경쟁만이 반복된다. 정치는 언제나 중앙 권력을 향한 경쟁에 의해 교착상태고, 사회는 간단한 합의를 위해 언제나 불필요한 비용을 너무 많이 치른다.

이것을 통제하여 그나마 행정의 수월성이라도 달성한 시도로 저자가 든 모범적인 사례는 역설적으로 일제등 외세와 독재정치다. 토착 공산주의가 한때 그러한 역할을 하며 한국 정당사상 유례없이 긴 25년의 기간동안 어느정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나마도 외래에서 온 공산주의에 의해 완전히 '박살난다'. 아울러 독재와 외세는 자체의 행정효율성을 높이고 소용돌이적 구조만 완화시켰을 뿐, 인권이나 민주주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사법권 독립을 위시한 삼권분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난맥상에 빠진 한국정치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얼까. 바로 중간매개그룹의 강화다. 거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지방분권이고 나아가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한반도에 새로 발생한 가장 특이한 조직이랄법한 대기업집단, 즉 재벌에까지도 기대를 건다.  

물론 저자의 대안제시가 살짝 힘이 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다. 지방분권은 언제나 개혁파의 화두가 되어왔고, 일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되돌아 평가하건데 어찌되었거나 중앙에서 제기되어 시작한 분권화가 진정한 분권화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지방은 여전히 서울로 가기위한 교두보일 뿐이며 지방으로가는 국도 주변의 흉물스런 공사판은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지방자치는-적어도 지금까지는-그러한 중앙으로의 욕망을 자체적으로 재조직하고 흡수하기보단 더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기재로 보인다. 중간매개집단으로서 재벌에 재삼재사 기대를 거는 저자의 입장 또한 맥이 빠진다. 리버럴 계열이라 할법한 저자의 정치적 포지션과, 냉전시대라는 책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은 저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너무 나이브하게 끌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벌은 21세기 한국 사회 소용돌이 구조의 정점이 되었으며, 재벌은 정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입장은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부에 의해 다소 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니까, 현실은 외려 재벌과 정부가 하나의 '평의회'로써 권력의 정점에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분석이 흘러간 옛노래라고 하기에는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물론 몇몇 근거는 소용돌이 구조에 맞추기 위해 너무 의제적으로 끌어쓴 듯한 느낌도 들고, 사료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책이 쓰여진 이후 시대상황은 급변하여,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두번이나 있었고, 더이상 한국정치에 군부가 개입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책이 쓰여질 당시만해도 최첨단(?!) 조직이었던 군대는 오늘날 가장 전근대적인 조직 중 하나로 남아있다) 노조는 그 잠깐 사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 계급과 자신의 어렴풋한 이념과 스타일을 가진 정당도 그 맹아를 보이고 있다. 다양한 시민단체도-정부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것 같다만-사회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소용돌이 구조로 인한 한국정치의 전통적인 특성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 폐단은 전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중간매개집단 강화'라는 화두 자체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부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결국 중간매개집단의 강화가 중앙의 계획과 지시에 의해 주도될 경우 이는 다시 새로운 소용돌이 구조를 복제하던지 아니면 소용돌이의 상승작용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은 자유당-공화당-민정당 등의 여당과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자체가 독점화, 일원화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집단 또한 한국사회의 소용돌이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으며, 사회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소용돌이 구조의 중심에는 관료가 아닌 재벌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기에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결국 중간매개집단이란 결국 아래로부의 필요로 형성되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찾을 때에야 진정한 중간매개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생적인 생협이라던지 시민단체, 지방에서의 다양한 운동등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고 있지만 이런 것이 어찌보면 소용돌이 정치구조를 해체하는 작은 싹이 될 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계급에 대한 자각과 연대의식으로 뭉친 노조 또한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만큼 소용돌이 구조의 폐단을 중화시켜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하나 쉽지 않아 보인다. 소용돌이 패턴은 소위 '옛날사람들'의 복귀와 함께 외려 부활, 조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저자도 밝혔다시피 우리의 정치 패턴은 그 오랜 역사와는 무관하게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노력과 상상력으로 충분히 극복가능하며 이러한 한국 특유의 패턴은 어느정도 조절될 경우 외려 독특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현현할수도 있다. 짧지 않은 책이고, 오래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물론 마냥 웃어넘기기엔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문제라 그런지 떨떠름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저자의 유머가 묻어난 조선시대 이후의 정치패턴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은 정말정말 '재미있다') 한국정치, 혹은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라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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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革 2009-08-10 09: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한우는 이 책을 좀 이상한 맥락에서 추천한 느낌이에요. 한국 정치학자들은 전부 작금의 민주주의 문제만 집착하는데, 핸더슨은 조선 시대부터 살펴보고 있다면서 전통에 관심을 가지라고 일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 에둘러서 최장집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나중에 보니까 조선시대 군주 열전 시리즈를 쓰고 있더군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더라죠. ㅎㅎ

시대가 변하면서 세부적인 사실에서 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생기기는 했지만, 소용돌이라는 틀로 한국 정치를 분석한 부분은 아직도 유효하고, 그런 점에서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는 현상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일 것 같습니다.

率路 2009-08-12 00:52   좋아요 0 | URL
오옷, 감사합니다. 서평쓰다보면 이런 리플을 받게되어서 참 좋은것 같아요. 이한우는 최장집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자신한테 마이너스일텐데 그걸 아직도 에둘러 비판하고 싶을 정도라면 은근 트라우마가 심한가봐요. 사실 책읽으면서 조선시대부터 살피는게 좀 신선하긴 했던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쪽(?)분들 가끔 조선시대부터 거슬러가는걸 보면 이건 뭐 거의 환타지라..(이를테면 지역감정의 기원이나 좌파의 기원 혹은 우리에겐 민주주의가 왜 안맞는가! 뭐 이런소리 하고 싶어서 거슬러 올라가 자신만의 소설을 쓰시니..-_-;;;;)

노이에자이트 2009-08-20 17:10   좋아요 0 | URL
오...이 고전을 읽으셨군요.제겐 그가 한국사에 대해서 쓴 50년대의 논문과 말년인 1987년에 쓴 논문이 있어요.요즘은 구할 수 없는 책에 실려있지요.헨더슨은 한국의 문민전통이 강해서 군사정권은 예외적일 거라고 했고 군사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지요.박정희가 제일 싫어한 미국인이었습니다.

率路 2009-08-22 18:43   좋아요 0 | URL
예, 대학 1학년때 박명림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소개받아(?그보단 그냥 언급하고 넘어간 수준이었죠)구입한 책을 얼마전에 다 읽은거니 텀이 꽤 길었던 셈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요. 따지고보면 헨더슨이 급진주의자나 좌파(?)도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독재정권의 입장에선 이념의 간극보다 우리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던것 같아요.
 
만들어진 현실 -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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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책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혼란스럽게 '읽힌'책이라고 말해야 옳겠다. 사실 이러한 혼란스러움에는 저자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는 듯 싶은데 '지역주의', '지역할거' 나아가 '지역패권'까지, 우리가 정치적으로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주의의 정의라는 게 매우 모호하고 어찌보면 사람마다 각양각색일텐데도 불구하고 본서의 경우 그러한 개념정의를 거의 넘어가다시피 한 후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서가 문제로 삼고 있는 '지역주의'의 개념은 책을 다 읽고나면 어느정도 어렴풋이 추측이 가기는 한다만 그래도 조금 석연찮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마도, 그 점이 이 책이 가진 유일한(그런데 조금 치명적인것 같기는 하다) 단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본서는 참신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있기도 하다.

핑계를 갖다 붙히다 보니 결국 고려시대 훈요10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하는 옛 기록상의 지역차별논리부터 1971년 대선을 거쳐 1987년 정초선거에의 지역주의 관련 자료를 실증적으로 아우르며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망국적'이랄 법한 지역주의라는게 존재하기는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지역주의 관련 '자료'라고 해야 1987년 이후에나 급증했고, 유권자들이 지역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도 1987년 선거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통계에서부터나 잡히기 시작한다. '71년과 '87년 선거의 경우 권위주의대 민주주의라는 다수의 유권자가 선거 초기 수용한 명명백백한 이슈가 있었음에도 언제나 그 결과는 지역할거 운운하며 해석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한 해석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이야기인지 저자는 무려(!) 게임이론 같은것까지 동원해가며 비교적 흥미롭고 합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적 투표는 외국과 같이 한번도 분리지향적인적은 없었고 외려 중앙권력지향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는 굳이 따지자면 '경제투표'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그러니까, 저자에게 이러한 투표행태는 지역주의가 '아니다'.) 아울러 역대 선거과정에서의 투표행태도 언제나 지역보다는 다른 이슈가 중심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올해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운운하는 단선적인 논리에만 의존하다보니 가끔씩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2004년 총선에서의 조순형씨가 갑작스레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며, 아무리 입법부 의원의 역할이 지방자치단체장과 다르다고는 해도 연고도 없고 그 지방의 사정도 잘 모르는 동네에 출마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일게다. 

한마디로 지역주의적 '해석'이 지역주의적 '현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저자는 과연 누가 지역주의적 해석을 도모했는가,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현실을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그에 대한 저자의 근본적인 답은 아마도 '구체제'정도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87년 당시 민정당과 그 밖의 정당이 선거정국에서 보인 태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아울러 87년 대선 당시의 조선일보 사설에서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과도한 권력의 집중화와 권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구체제 그 자체는 민주화라는 그 자체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지역주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조장해왔다. 여기에 차별성이 없는 보수독점적 정당체제 또한 이러한 지역주의 담론을 유통시키는 데에 한몫을 했는데 정당간의 정책적 무차별성은 결국 정당 지도자의 출신지역이 과다대표(?)되는 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추가로 90년대 중후반 재야세력의 극우정당 가입에 지역주의가 인기있는(?) 알리바이로 쓰여지면서 지역주의 담론은 정치적 신념과 세력에 관계없이 소비되었다.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어려움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합리화하려는 집권세력의 욕구'가 결국 지역주의적 현실을 주조했다고 보는 저자가 제시하는 지역주의에 대한 처방은, 그러한 비판만큼이나 명쾌하고 간단하다.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을 지역주의에 의한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지역정당체제 극복 또한 지역주의 해소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당이 정책으로서 자신의 선명성과 정체성을 갖추고, 기존의 모든 이슈들을 그저 지역주의 때문으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적인 담론에 진지하고 성찰적인 자세로 맞서자는 것이다.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는 어느 국가건 특정 지역에 특정 정당이 강한 경향이 존재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미국에선 이를 일컬어 '섹셔널리즘'이라고 한다) 지역마다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와 우선을 두는 가치관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부응하는 정당 또한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표행태를 분석하며, 여타의 현안에 대한 고려는 없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며 매번 유권자들의 '멍청함'(?)을 성토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런식의 담론의 해악은 비교적 커서, 정당 그 자체의 주요 목표가 어떠한 정책입안이라거나 이념적 지향의 달성이 아닌 까놓고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받는 것'으로 보일 지경인 웃지못할 상황이 구축되기까지 했다. 이는 우리 정치를 현실로부터 괴리시키고 역설적으로-현실과 괴리되었다는 의미에서-이데올로기화 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지역주의라는 괴물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시민을 정치로부터 괴리시키고 소외시킨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약화와 위기를 의미한다. 지역주의적 담론이 '진지한 수준으로' 만연하기 시작한 87년 선거 이전과 이후의 투표율이 천차만별인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다. 지역주의 하나만 해결된다면 뭐든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버리고,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로 보는 것, 아마도 그것이 이 열망-절망의 싸이클을 깨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민주주의 구축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굉장히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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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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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 시리즈 만드는 데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듯한 책세상 출판사의 '비타 악티바'시리즈 중 여섯 번째 책이다. '개념사'라는 제목과 '비타 악티바'(우리말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하는)라는 제목이 함께 쓰여져 시리즈의 지향하는 바가 다소 의문스럽기는 한데,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본서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내용 또한(!) 그렇다.  

8~90년대의 그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헐겁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21세기형 공안정국 하에서, 매주 주말이면 이런저런 시위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시국에 출간된 본서는, '개념사'라는 시리즈 제목을 통해 속시원한 무엇을 바라고 접한 독자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폭력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명징한 비판을 내놓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느 정치학자가 쓴 수필 모음 정도로 읽히는 본서는 다소 중구난방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각 꼭지마다 유기적으로 엮여져 있지도 않은데, 저자 또한 서두에서 그런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맡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폭력의 상대성이랄지 폭력과 권력의 문제랄지 상징적 폭력 문제같은것을 흘러흘러 논하는 본서에서 '폭력'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아무래도 미시적인 부분에 조금 더 천착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이 상당부분 80년 광주나 9.11사태 등 거대한 폭력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제한적이라는 점, 소음공해랄지 '베토벤 바이러스'에서의 예화를 이용하여 폭력을 해명하는 부분이 두드러진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폭력의 상대적 특성을 날카롭게 분석해놓고는 그 부분에 대해 일정정도라도 매듭을 짓지 않은 채 폭력과 권력의 논의로 넘어가버린다거나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는 힘에 대한 논의와 폭력이 과연 악인가에 대한 논의가 정리되지 못하고 중첩되어버린다는 점은, 본서가 자칫 '미시 폭력에 대한 한담'정도로 읽혀질 소지가 있지 않나 하는 우려마저 자아내게 한다. 

사실 폭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공론장에서 운위되는 개념중에 그나마 명징한 편이라고 여겨지는 '법'에서 이야기되는 폭력의 정의만해도 한가지가 아니고 이것이 정치학이나 윤리학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아울러 폭력인지 아닌지는 결국 피해자가 결정한다는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의 특수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 개념에 대한 각별히 섬세한 접근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을 '절대적으로 상대적인'개념으로 이해한다거나 무조건 '악'으로 이해한다면 어떠한 법적, 정치적, 윤리적 기획도 올바로 정립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의 난해함을 감안한다면, 차라리 폭력에 대한 몇 가지 논점과 그 논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두서없이 풀어놓고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려는 저자의 전략이 바람직한 부분도 없지 않겠다. 

해서 본서를 폭력을 해명하고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는 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외려 매주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상황 속에서 폭력이라는 개념의 모순성을 고민하가 시작한, 폭력에 대한 조금 더 깊이있는 논의에 접근하기 위한 징검다리가 필요한 독자에게라면 적격일 것 같다는 소리다. 나쁘지 않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스러운 책도 아니다. 여력이 되는 독자라면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아렌트의 책이나, 혹은 사카이 다카시의 책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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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엣센스 - 쿠바 미사일 사태와 세계핵전쟁의 위기
그레이엄 앨리슨.필립 젤리코 지음, 김태현 옮김 / 모음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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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제 정치학'이라는 장르의 책들이 의례 그러하지만, 본서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무지개 같은'책이다. 집단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주제로 한 본서는, 사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를 소재로 하지 않았다면 경영서나 행정학 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온당할 정도로 다른 학문 분과에 다양하게 응용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한 집단의 전략적 선택을 의례 하나의 동일체로 전제하고 판단하곤 한다. 어떠한 담론이건 미디어의 보도건 이를테면, 한나라당의 전략, 미국의 판단, 일본의 속셈 운운하는 식이다. 아울러 이러한 형식의 판단은 어느정도 충분한 합리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집단, 특히 국가나 기업체같은 고도로 근대화된(그래서 관료화된?!) 단위라면 어느정도 일의적인 결정을 위해 나름의 어떠한 절차적 장치나 문화를 갖추고 있고, 이와 교호적 작용의 결과로 집단 내부의 문화랄까, 정서 같은 것 또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정도의 동질성을 보이는 것도 어느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집단의 절차적 장치나 결정 논리 또한 그것이 기반한 근대문명에 의거해 대부분 '합리성'이라는 준거틀에 맞추어져 안정성과 지속성을 확보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도태되거나 사라지곤 한다. 이러한 합리성과 일의성이라는 조직의사 결정의 기본적 매커니즘을 통해 우리는 한 조직의 의사결정 방향을 예측하고 평가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처럼 우리가 기본적인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조직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합리적 행위자 모델'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모든 집단이 언제나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어느정도 일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외려 그런 상황이 예외적인 경우로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오늘도 초등학교 학급회의에서나 벌어질 법한 눈에 보이는 과오가 국무회의에서도 재방송되는 것을 쉽게 목도하며, 똑똑한 사람들은 몽땅 갖다놓았다고 '가정'되는 학술모임이라던지 국제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보는사람이 심히 민망한 결정들이 횡행함에 의아해하고는 한다. 어떠한 인재(人災)에 대해 모든 세력들이 서로 비난하며, 각 집단의 해명을 듣다보면 정말이지 그 결정에 대해 책임 질 세력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듯한, 마치 그야말로 재앙만이 홀로 남겨져 부유하는 듯한 포스트모던한 상황(?)은 이미 질릴 정도로 종종 벌어지곤 한다. 논자들은 이러한 결정을 어찌저찌 그 집단으로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평가하고는 하지만 아무리봐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평가하는 데에는 다른 렌즈도 존재함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조직행태'모델과 '정부형태'모델이다. 

전자는 조직 자체의 특성에 주목한다. '근대화'된 개인이 합리성이라는 준거틀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려 노력하듯, 조직도 조직자체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 다른 조직보다 힘을 쓰고자 하는 논리, 조직 자체의 메뉴얼에 끼워맞춰 일하고 싶어하는 논리, 조직 자체가 존속하고자 하는 본능 그런 것들이 모여 조직논리를 이룬다. 이러한 조직을 통제하는 힘도 물론 존재하지만, 조직자체가 나름의 논리를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 부분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후자는 조직 자체가 온전한 하나가 아님을 가정한다. 인간이란 쉽지 않은 존재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완전히 동질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허구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 하에서도 다양한 투쟁과 음모가 등장하며, 성문화된 절차는 각 개인의 구미에 맞게 변용되고 해석된다. 

이러한 상이한 모델로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파악하면 한 집단의 의사결정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정확해진다. 이러한 이론들을 토대로 한 저자들의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 분석은 상기 이론들의 유용성을 반증하는데, 이 위기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어갔고, 어떠한 비상식적인 결정들이 내려졌으며, 그 와중에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봉합되었는지를 저자들은 각 이론을 설명한 후 (책에서의 1,3,5장) 그 이론을 이용하여 풀이한다.(책에서의 2,4,6장) 이를 통한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한마디로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부분 있으며,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조직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이고 예외는 아니겠지만, 오랜기간(아울러 지금까지도) 분단된 사회에서 분단된 사고를 강요받고 '군대논리'라는 투박하고 유치한 논리가 지배해 온 우리 사회의 특성상, 조직에 대한 단선적인 판단이 심각할 정도로 횡행하곤 한다. 문제는 단선적인 판단은 판단을 당하는 조직에게도 재앙이지만, 판단을 하는 주체에게도 상당한 한계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사람사는 동네는 어디든 비슷하다는 속설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사람은, 다른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람이 모인 조직이 뻔히 알면서도 절망의 구덩이로 직행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드물지 않다. 이를 두고 단순히 그 조직이 나쁜놈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혹은 멍청한 놈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는 것은 속편하기는 하지만 발전적이지도 못할 뿐더러, 오늘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다. 조직에게 다양한 각도의 렌즈를 들이대는 일, 그래서 조직을 조금 더 잘 이해하는 일은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멀지 않아 보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조직, 나아가 이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를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뿐만아니라, 이론설명 부분을 제외하자면, 쿠바미사일 사태에 대한 저자들의 설명과 분석은 은근히 박진감 넘친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화화 되었더라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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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 반양장, 전면개정판
한국산업사회학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그 정의 자체가 이름에 그대로 드러나는 바 문학이나 철학만큼 모호한 학문은 아닐 것만 같다. 하지만 사회학의 '사회'라는 말 자체의 다의성, 그리고 그 목적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실제, 20세기 초까지도 사회학은 '사회주의 학'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하고, 지금도 철학, 심리학 등 인접학문과의 경계가 모호하기는 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고등학교 3년 내내 사회학과를 지망하던 나에게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잊혀지질 않는다. '복지사 자격증 갖는 것도 나쁘진 않지.'

본서를 처음 구입하게 된 것은 학부 마지막 학기, 사회학에 대한 동경이 사회학에 대한 이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느즈막히 '사회학의 이해'과목을 수강할 때였다. 당시 본서는 강의의 교과서로 쓰여졌지만 강의 내용은 본서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졌기에, 이후로 본서가 읽혀지기 까지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두서없는 나의 독서생활로 인해 이제서야 비로소 사회학 '교과서'를 읽게 된 셈인데, 교과서라는 측면에서 본서를 평가한다면 정말 '나쁘지 않았다.'

사회학은 그 다양한 연구 분야 만큼이나 방법론이나 접근법도 중요한 학문이다. 본서는 그러한 방법론과 이론 소개 및 사회 다양한 부분의 논점제시를 통해 교과서로서 필요한 덕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본서는 철저히 '우리 사회'를 염두에 두고 서술된 터, 그 어느 다른 사회과학 교과서에서 보기 힘든 실천적 적절성(?)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덕분에-저자들이 목적한 바는 아니지만-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한 분석서로의 기능 또한 조금은 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논제들을 나열식으로 서술하다보니 지루한 면이 없지 않고, 교과서인지라 특별히 저자 개인의 주장이 드러난다거나, 참신한 부분이 있다거나 그런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다.(하지만 본서가 교과서라는 점에서 참신함 같은 것이 외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 또한 고려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개인적인 아쉬움을 토로하자면, 본서를 미리 읽고 다른 사회학 서적에 접근했다면 나의 독서생활도 조금은 더 풍요롭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다면 다른 사회학 책에서 언급되는 기초개념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 뿐더러, 장마다 나오는 참고서적은 각 주제에 대해 정말이지 도움이 될만한 고전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고, 복잡한 사회를 조금 더 적확히 해석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먼저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루함만 참아낼 수 있다면, 결코 어렵지 않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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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com 2008-11-27 22: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 역시 사회학에 대한 동경을 수습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음....그런데 3년 내내 사회학을 지망하셨다면, 수능점수가 얼씨구나 잘 나와서 법대로 가신겐지요?!!

率路 2008-11-28 15:47   좋아요 0 | URL
뭐 그런부분도 없잖...사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