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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레고리 헨더슨 지음, 박행웅.이종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다보면 리영희 선생님께서 저자인 헨더슨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이 책을 '당대 한국 정치에 관심있던 미국 지식인들의 필독도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다소 머뜩찮게 생각하는 어느 보수 언론인도 이 책을 20대에 꼭 읽어야할 책으로 꼽았던 기억도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구조'에 대한 이해가, 딱히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더라도 종종 이런저런 경로로 언급되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서가 그렇게 많이 읽혀지는 것 같지는 않다.(참고로 2000년에야 초판 번역본이 나온 본서는 한동안 절판이다가 작년인 2008년 새판이 나왔다)
1968년 쓰여지고 1987년~1988년 사이 보완이 이루어진 본서가 무려 30년이라는 시간터울을 두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데에는 군사정권의 편협함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는 너무 옛날에 쓰여진 책이라는 점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핑계 삼기에 본서의 분석은 매우 도발적이고 문제적이며,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책은, 새로운 장이 덧붙혀진것이 아니라 60년대 판을 80년대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기에 시차마저 혼동되고, 오늘날 보기에는 틀려버린 듯한 저자의 예상도 없진 않지만 그런 단점은 정말 하잘것 없어 보일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의 사회와 정치문화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한국의 정치패턴은 한국만의 특수한 두가지 성격, 바로 동질성과 중앙집권성에 기원한다. 이러한 두 축은 한국 사회의 모든 주변을 중심으로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같은 사회구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고 계급, 인종, 종교 그 어떤 것으로도 구분할 수 없는 동질적인 사회는 역설적으로 개개인이 파편화, 원자화되어 어떠한 매개체 없이 상승기류로 휩쓸려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소용돌이'는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내부의 수많은 제도 변화와 외세의 침입, 민주화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큰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똑같은 제도나 규정도 애초 서양이나 기타 제3세계 국가에서 처음 도입했을 때의 의도와 취지와 달리 한국에 이식된다. 계급을 구분하기 수월했고, 인종이나 민족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서양의 경우, 대부분의 제도는 상이한 것들간의 응집과 구분되는 것들간의 타협을 위해 존재한다. 각각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이익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평화적으로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타협책으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면, 이는 한국정치와 다소 상이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 동질적인 구성원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 사회는, 정당을 만들고 노조를 결성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때문에 그러한 동질성에 의한 원자화가 유구한 전통을 지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에 결합되는 순간, 정당이나 노조 등 중간매개집단의 존재의의는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오로지 권력을 향한 도구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의 중심은 중앙권력이고, 주변부는 중앙으로의 상승기류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지방은 서울이라는 권력에 휩쓸리고 입법부는 입법보다는 권력에 대한 견제에 집중한다. 정당은 정강이나 이념, 계급의 이해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집권당과 그렇지 못한 정당간의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로 날밤을 지샌다. 중앙은 중앙대로 이러한 상승기류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상층부 관료기구를 무분별하게 확대하고 각 부서의 업무를 전문화하기보단 빈번한 인사교체로 자체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민주주의는 균형과 책임, 기본권과 계층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탱되기 보단 중앙을 향한 더 많은 기회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이래 아직까지도 수많은 정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불문하고(심지어 거스르면서까지) 오로지 반대당의 권력을 앗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중앙으로 향하려는 개개인의 야망이나 동질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색깔없는 권력을 위해 국가도 이념도 관습도 일찌감치 버리는 개개인의 행태들 또한 좋게보면 '개방성'으로 볼 수도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나 미국의 지배 때 반만년 역사를 지닌 국민들의 행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속절없이 그들의 교육기관과 행정기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또 실제로 들어가서 그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알고 살았다지만, 같은논리로 전근대적인 양반제도 같은 신분제 또한 아무론 충돌없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와 관행의 취지나 목적은 사라지고 파편화된 개인의 권력을 향한 무한경쟁만이 반복된다. 정치는 언제나 중앙 권력을 향한 경쟁에 의해 교착상태고, 사회는 간단한 합의를 위해 언제나 불필요한 비용을 너무 많이 치른다.
이것을 통제하여 그나마 행정의 수월성이라도 달성한 시도로 저자가 든 모범적인 사례는 역설적으로 일제등 외세와 독재정치다. 토착 공산주의가 한때 그러한 역할을 하며 한국 정당사상 유례없이 긴 25년의 기간동안 어느정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나마도 외래에서 온 공산주의에 의해 완전히 '박살난다'. 아울러 독재와 외세는 자체의 행정효율성을 높이고 소용돌이적 구조만 완화시켰을 뿐, 인권이나 민주주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사법권 독립을 위시한 삼권분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난맥상에 빠진 한국정치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얼까. 바로 중간매개그룹의 강화다. 거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지방분권이고 나아가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한반도에 새로 발생한 가장 특이한 조직이랄법한 대기업집단, 즉 재벌에까지도 기대를 건다.
물론 저자의 대안제시가 살짝 힘이 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다. 지방분권은 언제나 개혁파의 화두가 되어왔고, 일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되돌아 평가하건데 어찌되었거나 중앙에서 제기되어 시작한 분권화가 진정한 분권화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지방은 여전히 서울로 가기위한 교두보일 뿐이며 지방으로가는 국도 주변의 흉물스런 공사판은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지방자치는-적어도 지금까지는-그러한 중앙으로의 욕망을 자체적으로 재조직하고 흡수하기보단 더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기재로 보인다. 중간매개집단으로서 재벌에 재삼재사 기대를 거는 저자의 입장 또한 맥이 빠진다. 리버럴 계열이라 할법한 저자의 정치적 포지션과, 냉전시대라는 책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은 저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너무 나이브하게 끌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벌은 21세기 한국 사회 소용돌이 구조의 정점이 되었으며, 재벌은 정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입장은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부에 의해 다소 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니까, 현실은 외려 재벌과 정부가 하나의 '평의회'로써 권력의 정점에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분석이 흘러간 옛노래라고 하기에는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물론 몇몇 근거는 소용돌이 구조에 맞추기 위해 너무 의제적으로 끌어쓴 듯한 느낌도 들고, 사료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책이 쓰여진 이후 시대상황은 급변하여,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두번이나 있었고, 더이상 한국정치에 군부가 개입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책이 쓰여질 당시만해도 최첨단(?!) 조직이었던 군대는 오늘날 가장 전근대적인 조직 중 하나로 남아있다) 노조는 그 잠깐 사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 계급과 자신의 어렴풋한 이념과 스타일을 가진 정당도 그 맹아를 보이고 있다. 다양한 시민단체도-정부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것 같다만-사회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소용돌이 구조로 인한 한국정치의 전통적인 특성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 폐단은 전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중간매개집단 강화'라는 화두 자체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부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결국 중간매개집단의 강화가 중앙의 계획과 지시에 의해 주도될 경우 이는 다시 새로운 소용돌이 구조를 복제하던지 아니면 소용돌이의 상승작용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은 자유당-공화당-민정당 등의 여당과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자체가 독점화, 일원화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집단 또한 한국사회의 소용돌이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으며, 사회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소용돌이 구조의 중심에는 관료가 아닌 재벌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기에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결국 중간매개집단이란 결국 아래로부의 필요로 형성되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찾을 때에야 진정한 중간매개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생적인 생협이라던지 시민단체, 지방에서의 다양한 운동등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고 있지만 이런 것이 어찌보면 소용돌이 정치구조를 해체하는 작은 싹이 될 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계급에 대한 자각과 연대의식으로 뭉친 노조 또한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만큼 소용돌이 구조의 폐단을 중화시켜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하나 쉽지 않아 보인다. 소용돌이 패턴은 소위 '옛날사람들'의 복귀와 함께 외려 부활, 조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저자도 밝혔다시피 우리의 정치 패턴은 그 오랜 역사와는 무관하게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노력과 상상력으로 충분히 극복가능하며 이러한 한국 특유의 패턴은 어느정도 조절될 경우 외려 독특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현현할수도 있다. 짧지 않은 책이고, 오래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물론 마냥 웃어넘기기엔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문제라 그런지 떨떠름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저자의 유머가 묻어난 조선시대 이후의 정치패턴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은 정말정말 '재미있다') 한국정치, 혹은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라도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