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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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일종의 신파극이 될법했던 메인스토리가 괴상하게 변해버린 것은 오로지 미디어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지극히 얌전하고 성실한 아가씨가 술집에서 처음만난 탈주범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그가 도피하는 것을 도와 곤경에 처한다는 스토리 자체는 그 누구라도 기시감을 느낄법한 뻔하디 뻔한 고전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황색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부풀려져 급기야 평범한 한 여인을 '실제'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바, 결국 본 소설은 아마도 '언론'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굳이 우리에게 읽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70년대에 쓰여진 본 소설은 독일에서 거의 조중동을 합한 수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빌트지를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애초에 소설은 본 소설상의 신문인 '차이틍'과 '빌트'지의 관련성을 '굳이'부인함으로서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이미 정해놓은 수순대로 취재원의 언급을 왜곡하고 잡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키는 거대 언론의 횡포라던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심지어 너무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카타리나의 생활 자체가 언론 자체에 의해 이미 덧씌워놓은 이미지와 맞지 않자 그마저도 '악마의 주도면밀함'으로 해석해버리는 과정은, 그저 소설로 치부하고 읽기에는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다.(첨언하자면, 저자의 언급-일종의 '팜플렛'이라는-이 무색하게도 본서는 소설적으로도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본서는 단순히 개인과 언론간의 관계뿐 아니라 메카시즘적인 마녀사냥이 어떠한 구조로 돌아가는지, 그 과정속에서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인은 어떻게 유착되는지를 굉장히 미시적인 사건 속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하며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무엇에 의해 돌아가는가, 현대사회가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또 그만큼 얼마나 주도면밀한가, 아울러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방어할 수 있는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본 소설은, 저자 스스로도 표현했듯 팜플렛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상징적이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건 오늘 우리의 현실일게다. 상황이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늘날의 언론이 카트리나 블룸의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절보다 더욱 주도면밀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언론은-카타리나 블룸에게 행했던 것처럼-노골적으로 기사를 부풀리고 취재원의 말을 조금 비틀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촌스러운'방법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언론은 오로지 진실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진실에 의해 거짓을 말한다. 그게 뭔소리냐고? 다들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목도했을꺼다. 전문대에 백수, 골방에 앉아 혼자 책만파던 네티즌이라는 '사실전달'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전달 자체가 왜곡이었다.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의 파괴적인 힘은, 말과 글이라는 도구로 이루어진 근대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수단 즉, 법률과 규정에 의해 통제되는 것조차 어불성설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68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지독했던 경험 속에 쓰여진터라, 본서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 또한 오늘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에 대해서, 소수자에 대해서는 사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성을 보여주면서도 권력과 자본에는 알아서 굴종하는 언론과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시각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하지만, 미디어는 현대사회에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미디어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딱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속에 국회는 지난주 미디어법을 지들말로는 '강행처리'했단다. 이런. 눈앞에 빤히 보이는 김이박씨의 잃어버릴 명예를, 그리고 부당하게 살아날 또다른 김이박씨의 때이른 복권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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