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 - 민주노총 임금정책방향
김유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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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후마니타스' 출판사 행사기간이었던 관계로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하종강씨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산 덕분에 '공짜로 얻은 책'되겠다.^^;;; 사실 책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만만치 않은 편인데, 가격만큼이나 자료 하나만큼은 정말이지 알차다.

책은 노동자 비중이 증가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몫은 줄어들고 있다는 점, OECD국가 중 가장 불평등한 임금소득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는 정규직의 임금인상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정작 정규직의 임금인상이 '경제성장율+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안전망 구축 이전에 임금정책 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1부에서는 임금실태, 2부에서는 임금정책, 구체적으로는 정규직 노조가 임금투쟁에 임함에 있어서 어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부록으로 '노사정의 임금수준 정책 검토'와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여섯가지 신화'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앞의 본문의 내용을 다시 편집,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의 사회담론 속에서 노동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임금문제 등은 실증적 자료보다는 대부분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지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적 오바질(?)은 종종 국제적으로도 웃지못할 상황을 낳곤 하는데 이를테면 IMF마저도 종종 우리나라에선 꽤나 '진보적'인 권유를 하게 만들고 외국계 기업 CEO가 우리나라 노조를 옹호하는 언급을 하게 만들 정도다. 생각없는 기자님들의 기사를 보면 자료는 하나 없이 근거없는 전제 속에서 가혹한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고, 자본가들의 언어는 아무래도 우리가 서있는 현실과는 꽤나 동떨어져 보인다.(물론 자본가 자신에게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일것이다.) 이런 수많은 뜬금없는 주장과 전제를 책은 수많은 실증적인 자료와 그래프, 표 등을 이용해 뒤집는다.

사실 곰곰히 따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할만큼 해도 노동시장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는것도 맞고, '귀족노조'라고는 하지만 조합원들의 실생활을 보면 차라리 강남사는 불가촉천민(?)이 되고싶은 맘이 굴뚝같아진다. 비정규직 취업이 정규직으로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헤어나오지 못할 함정에 빠지는 길임을 우리 또한 이미 느끼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느끼고는 있지만 콕 찝어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던 것들-임금상승률이 생산성만 못하다는 것이나, 최저임금제가 적지 않은 경우 유명무실하다는 사실, 성별 학력별 임금격차는 확대되고 이는 연령이 많아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 근속효과보다는 경력이 임금차이에 더 큰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사실 등-을 수많은 실증적 자료들이 제시하며 비로소 우리 '눈앞에'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작업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에 푹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정말이지 소중해 보인다.

무엇보다 책이 돋보이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정부나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고 해결하라는 목소리로 결론을 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자본과 정부가 지난 몇년간 해 온 행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주장인지는 누구나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있어 정규직이 나서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물론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된다는 식의 지극히 계급적인-노동자가 가져갈 몫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봐야 정해져 있다는 사고에 근거해 있기에-19세기 '임금기금설'적 견지에서의 주장은 아니다. 사실 정규직 근로자의 임금 또한 경제성장율+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함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정규직의 임금문제가 발등의 불임은 인정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차별 확산을 막지 못하면 노동계급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올 수 있으며, 나아가 올바른 민주주의와 사회통합 및 경제성장이 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정규직의 임금투쟁은 '임금인상을 통한 생활조건의 유지, 개선'을 넘어서, '노동소득 분배구조 개선과 임금격차 해소'라는 보다 분명한 목표의식적 지향점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저자의 대안은 사회보장기금 설치나 숙련노동자와 단순노동자간의 임금구조 차별화 등 단순한 추상적 담론 뿐 아닌 구체적 대안제시로 이어져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책의 내용에 대해 좀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 대안들이 하나의 상식으로 여겨졌으면 한다는 소망에 비하자면 책의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물론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다보면 '1+1'로 '거저주는'(?)행사가 아직도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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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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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의 '우리시대의 논리'시리즈 중 두번째 책이다. 저자인 하종강씨는 한울노동문제 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면서 한해에 300회 이상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육'을 하고 계신 분이며, 그처럼 바쁘시기에 사실 책을 낸다는게 불가능해 보였으나 후마니타스 출판사 측에서 하종강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지금까지 기고해 온 글들을 모아 편집해 책으로 낸 것이다. 보통 이런식의 글모음이 두서없고 나온 이야기가 또 나오곤 해서 쉽게 지루해지고는 하는데 이 책은 이상하리만치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하종강씨의 공도 있겠지만 출판사측에 대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는.

책은 정말이지 '우리시대의 논리'라는 시리즈 제목에 걸맞게 우리 사회가 흔히들 범하고 있는 노동문제의 '오류'에 대해 적절하고도 정확한 지적을 해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라면 버젓이 들어와 있는 노동3권을 마치 국익에 해가 되는 양, 국가를 전복시키기라도 하는 양 병적으로 오바를 떠는 언론과 권력, 그리고 자본에게 일침을 놓는 하종강씨의 '논리'들은 그 어이없는 자본 나름의 '논리적'공세를 쉽고 간단하게 일축해낸다. 정말이지 개인적으로도 불가사의했던 현상-하향평준화 운운하는 기업들이 정작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실질적인 '대량'의 하향평준화를 도모한다는 것, 기업은 이윤을 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노조와 노동자는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야 하는 양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 쟁의에 대한 책임을 경영 제대로 못한 경영자에게서는 전혀 찾을 생각을 안한다는 것 등등등-과 그 현상에 일조하는 사람들의 어이없는 주장들을 지적해내는 하종강씨의 글을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고, 뿐만아니라 거대 노조의 이런저런 비리나 이기주의로 인해 정말이지 '노동계급에 안녕을 고해야할'듯 해 보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다수의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책에 나오는 논리가 다소 치우친듯 해보이는 논리일지도 모르겠고, 실제 가끔씩 그런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파업 얘기만 나오면 금전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까지 귀족으로 모는 사회, 노조를 무슨 자선사업 단체로 아는지 노조의 자기 권리 주장 얘기만 나오면 국가에 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 오랜기간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노동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저임금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집값 올려보겠다고 부녀회만들어 담합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성토하는 사회에서 어떤것이 진정 '균형잡힌'의견일까? 때문에 하종강씨의 논리야말로 진정 우리시대의 논리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며, 그런의미에서 책의 출간이 늦었다는 감마저 들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는분께도 그렇지만, 관심없는 분에게는 더더욱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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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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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말마따나 아렌트는 20세기에 반(反)했기에, 21세기를 선취한 사상가일런지도 모르겠다만, 그녀의 책이 원채 난해하기로 이름난지라 그간 회피해 왔었는데, 본서의 경우 분량도 얄팍(?)한데다가 초입의 '옮긴이의 말'에서 아렌트의 책 중에서는 비교적 쉽다는 언급이 있어 구입하게 되었다. 난이도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쉽다는 것보다는 '비교적'이란 말에 강조점을 찍어야 할 듯 싶다. 아렌트의 저서들 중 본서가 '비교적' 쉬운건지 어쩐건지는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터라 무어라 말하긴 어렵지만, 확실한건 여타 사회과학 서적들과 비교해 볼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리뷰를 자신있게 올리기는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일단 정리된만큼만 올리고 본다. 책이 쓰여진 해는 1970년으로,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이어진 정세가 평화로 귀결되기 보다는 냉전을 통한 군비의 확장으로 인해 '전쟁이 외교의 연장'이던 과거는 전복되고 외려 '평화가 다른수단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 된 시기였다. 이러한 파국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 이래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당시 대학생들을 자극시켰고, 이는 '폭력적'학생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파농이나 사르트르의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주장 또한 위력을 발하고 있을 때였다. 문제는 그들이 '폭력'의 성격을 전혀 모른다는 점, 아울러 그 '폭력'을 사상적으로 규명할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기획'이 그 취지상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을 지적한 후, 그녀는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님을, 외려 폭력의 반대는 권력임을 논증해 낸다.

'폭력의 반대는 권력'이라는 테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상식과 다소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지금까지의 많은 사상가들은 폭력을 권력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말한다.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니라고. 권력이 없는 곳, 권력이 균열을 일으키는 바로 그 곳에서 폭력은 발생한다고.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은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다. 반면 폭력은 순전히 '도구'에 의존한다.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였음에도 '권력'은 베트콩에게 손쉽게 넘어갔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의 개념은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사람에 반하는 다수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사람이다."라는 아렌트의 언급에서 권력과 폭력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임을 우리는 좀더 쉽게 알 수 있다.

권력은 그 시초로부터의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지만, 폭력은 미래의 어떠한 목적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즉, 폭력은 단순한 수단이기에 다른 '목적'이 요구된다. 하지만 권력은 그 자체가 애초의 목적이다. 권력은 권력 자체만으로도 정당화된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게 보여지는데, 이는 권력을 파괴할 목적을 지닌 폭력이라는 수단이 성공을 거두어 폭력에 의해 권력을 획득했다면, 권력을 획득한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애초 폭력으로만 맞붙는다면 국가를 이길만한 조직체는 없다.) 즉, 권력과 폭력은 애초 다른 개념이기에, 폭력을 통한 권력 획득은 이미 사라진 권력을 재창조하거나 이미 넘어온 권력을 접수하는 과정일 뿐인 것이 된다.(즉 권력은 폭력의 정당화가 예정된 그 현장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20세기가, 그리고 그 부산물(?)이라 할만한 21세기가 전쟁과 쿠데타로 점철된 폭력의 세기가 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권력이 권력답지 못하기에, 권력이 권력이 되는 과정인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에, 아울러 권력이 한곳(그것이 자본이건, 관료건)으로 집중되었기에, 역설적이게도 권력이 부재하는 수많은 틈이 생겼고, 그 틈에서 폭력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독 20세기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치적 자유를 총체적으로 억압하고 권력이 독점되는 '관료제', 올바른 합의의 장이 붕괴되고 사적이익만이 횡행하는 시민사회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권력의 독점화는 나라 안의 진정한 권력 원천들을 고갈시켜서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즉, 우리가 지금 보는 야만적인 폭력은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중의 소통을 통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공적영역이 붕괴되었기에, 그러한 공적영역을 지속적으로 붕괴시키는 사회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단순히 비폭력 담론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때문에 폭력만큼이나 폭력적이다. 한편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는 맹목적인 폭력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합의에 기반한 능력있는 권력, 다원화되고 분산된 민주화된 권력, 바로 그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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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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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은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고 말한 이가 벤야민이었던가. 이 책에 관한 그 수많던 논쟁들이 이 책의 '유행'에 대한 반증인건지 아닌지 나야 알길은 없다만, 책 내용보다는 외려 저자 중 한명이었던 임지현씨에 대한 강준만씨의 실명비판, 문부식씨와 중앙일보가 함께했던 기획기사 등등으로 그것이 국지적이건 아니건 결과적으로 당대(라고 해봐야 불과몇년전이지만)의 굉장한 '문제작'이 되었음을 부인할 이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대학'생활' 몇년동안 그 영향력의 '범위'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언급할만한 책을 두권쯤 꼽으라면 아마 손석춘씨의 '신문읽기의 혁명'과 바로 본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책은 그만큼이나 양으로건 음으로건(?) 많은 독자들에게 복잡다기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영향력은 심지어 이 책을 읽지 않았던 나에게까지 와 닿았었으니깐. 시간이 흘러 '이젠 유행이 지났다'라고 하기엔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과거처럼 이 책과 그 저자들-대표적으로 임지현씨-에 대해 어느쪽이건 다들 흥분해서 이야기하게되는 시기가 지난 이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 책은 정파적으로 잘못 이용되어왔다'는 것.

'한국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새는 진보와 보수가 아닌 '진보'의 날개와 '성찰'이라는 날개로 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책은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그간 우리 사회 소위 진보세력이 사유하지 못해온것들. 즉, 과거의, 소위 '적들(?)의' 악습이었음에도 똑같이 답습해 온것에 대해 진지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국가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물론 이 양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가볍게 여겼던 수많은 부분들-일상, 군대, 무의식등등-에서 이어져 온 수많은 파시즘의 잔재 등등을 꼬집고 있는 이 책은 저자들의 의도대로 읽혔더라면 조금더 생산적으로 읽혔을 것이고 더 나은,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이땅의 소위 '극우세력'에게 이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 책을 '온전히' 잘 읽고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그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절대 이 책과 '우리안의 파시즘'담론을 자신에 유리하게 해석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은 곳곳에서 우리를 '성찰'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비판의 끈을 놓고있지 않으니깐), 결국 '우리안의 파시즘'담론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 책이 '파시즘'의 개념규정을 확실히 해놓지 않은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경제, 정치적 조건속에서 극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파시즘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혼용하여 쓰이기도 하며, 정파적인 언술로 이용될 경우 상대파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저자들이 파시즘이란 단어의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적인 쓰임새를 알지 못했을리는 없고, 그렇기에 저자들은 우선 파시즘의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갔어야 했지만, 책에선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결국 온갖 곳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마치 '빨갱이'란 단어 쓰이듯 불분명한 기준속에 여기저기 딱지가 붙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빨갱이'의 창조자인 극우세력에게 좋은 도구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들의 '미시적 폭력'의 담론은 그 결과적 현상뿐만 아닌 거시적 책임의 부문에서 마저 그 책임을 '민중'혹은 '진보세력'에게 거의 대부분을 전가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극우세력의 환호로 이어지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론-공동작업의 한계일수도 있었겠지만-'우리안의 파시즘'같은 센세이셔널한(?)제목을 달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건 확실한건, 이제 그 누구도 '우리안의 파시즘'론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차분한 마음으로 저자들의 '불편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민족과잉담론, 국가중심주의, 승리지상주의 그리고 어찌보면 이 책을 하나로 관통하는 중심 토픽이라 볼수있을 가부장주의 등의 담론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물론 그 수준과 만족도면에서 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다만-은 독자들에게 그 화두들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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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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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4년전 출간된바 있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후편격이라 할만한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책의 구성인데, 최장집 교수가 지난 3년간 발표한 글을 묶은 본서는 하나의 글마다 그 뒤편에 편집자인 박상훈 씨가 글에 대한 배경 설명 및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첨언, 그리고 편집자 개인의 의견 등등을 첨부하고 있으며, 이는 더욱 깊이있는 독자의 이해를 가능하도록 돕고 있다.

저자인 최장집 교수가 서두에 밝히고 있듯 본서에는 구체적인 '대안'이 나와있지는 않다. 비교적 세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7장의 한미 FTA관련 글이나 8장과 9장의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 글 또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대안의 제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책은 저자 말마따나 '대안 그 자체보다는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터전을 보다 넓게 고르고 다져나가는 일'에 기여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본다면 저자의 '전략'(?)이 어느정도 유효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을 통해 일관되게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다. 바로 다수의 헌신과 노력에 의해 성취해낸 민주주의가 절차적인 차원에서 공고화되고 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에 실패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왜 우리의 민주정부는 민중의 열망-실망의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하며, 왜 오늘의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민중들마저도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철회할 정도의 정치허무주의에 빠져있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기반이 침식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자는 그 이유로 동원, 즉 운동으로 인해 달성된 민주주의가 탈동원화된 일상으로 이어짐에 있어서 그 제도적인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든다.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화 세력 혹은 진보세력이 일상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못한채 안이하게 기존 체제와 대면했으며, 이 속에서 집권한 민주정부는 기존 사회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보다는 별 생각없이 손쉽게 수용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즉, 오늘의 민주정부는 유권자들의 실질적인 갈등을 대변하여 정치적으로 해소할만한 정당'체제'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게을리한채 단순히 지엽적인 정당'구조'에 대한 개혁만을 이야기하며 변죽만 울렸고, 사실상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해하고 민중이 정치부문에 참여할 영역을 극도로 좁혀버리는 신자유주의를 별다른 고민없이 극단적으로 수용했으며,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정치는 나쁜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기존 기득권 의 '반부패담론' 혹은 '성장담론'등에 편승하여 매번 우회해 넘어갔다는 것이다. 민중의 '실생활의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기존의 헤게모니와 타협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는 국민들을 항구적인 욕구불만(?)상태로 몰아갔고 이는 정치를 일반 민중의 삶에서 더욱 괴리시켜 애초 극단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어있던 정치를 더욱 이데올로기화 하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는 저자의 주장, 더 나은 민중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쉽게쉽게 '통합담론'에 기대거나, 애초 기득권에 지나치게 유리했던 '기존의 틀'내에서의 생각없는 절충을 반복했던, 때문에 오늘날 '노동없는 민주주의'라는 기형적인 민주주의를 목도하고 말았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문제에 대해 기존의 쉬운 담론(이를테면 '대연정론'류의 '통합담론'같은 것)에 기대어 오늘의 정치문제를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문제로서 직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 아울러 '제도개혁'을 한답시고 이미지에만 쫓겨 변죽만 울릴 것이 아니라, '어떤'제도개혁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제도 개혁이 되어야 하는지 그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매우 '당연한', 하지만 그 어디서도 정리되고 언급되지 않았던 문제의식을 저자는 날카롭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저자의 빛나는(?) 분석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을 위한 언어를 얻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월했다.

물론 한미FTA관련된 '시안'은 책을 위해 급히 써내려간만큼 내용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고,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된 글은 다소 논쟁적인 글이었던 만큼(백낙청 선생이 비판한 부분이 아마도 이 부분일 것이라 미루어 추측된다) 보다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문제를 오늘의 문제로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그 논의의 시작지점을 정한다는 측면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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