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새책은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고 말한 이가 벤야민이었던가. 이 책에 관한 그 수많던 논쟁들이 이 책의 '유행'에 대한 반증인건지 아닌지 나야 알길은 없다만, 책 내용보다는 외려 저자 중 한명이었던 임지현씨에 대한 강준만씨의 실명비판, 문부식씨와 중앙일보가 함께했던 기획기사 등등으로 그것이 국지적이건 아니건 결과적으로 당대(라고 해봐야 불과몇년전이지만)의 굉장한 '문제작'이 되었음을 부인할 이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대학'생활' 몇년동안 그 영향력의 '범위'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언급할만한 책을 두권쯤 꼽으라면 아마 손석춘씨의 '신문읽기의 혁명'과 바로 본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책은 그만큼이나 양으로건 음으로건(?) 많은 독자들에게 복잡다기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영향력은 심지어 이 책을 읽지 않았던 나에게까지 와 닿았었으니깐. 시간이 흘러 '이젠 유행이 지났다'라고 하기엔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과거처럼 이 책과 그 저자들-대표적으로 임지현씨-에 대해 어느쪽이건 다들 흥분해서 이야기하게되는 시기가 지난 이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 책은 정파적으로 잘못 이용되어왔다'는 것.

'한국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새는 진보와 보수가 아닌 '진보'의 날개와 '성찰'이라는 날개로 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책은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그간 우리 사회 소위 진보세력이 사유하지 못해온것들. 즉, 과거의, 소위 '적들(?)의' 악습이었음에도 똑같이 답습해 온것에 대해 진지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국가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물론 이 양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가볍게 여겼던 수많은 부분들-일상, 군대, 무의식등등-에서 이어져 온 수많은 파시즘의 잔재 등등을 꼬집고 있는 이 책은 저자들의 의도대로 읽혔더라면 조금더 생산적으로 읽혔을 것이고 더 나은,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이땅의 소위 '극우세력'에게 이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 책을 '온전히' 잘 읽고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그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절대 이 책과 '우리안의 파시즘'담론을 자신에 유리하게 해석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은 곳곳에서 우리를 '성찰'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비판의 끈을 놓고있지 않으니깐), 결국 '우리안의 파시즘'담론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 책이 '파시즘'의 개념규정을 확실히 해놓지 않은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경제, 정치적 조건속에서 극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파시즘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혼용하여 쓰이기도 하며, 정파적인 언술로 이용될 경우 상대파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저자들이 파시즘이란 단어의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적인 쓰임새를 알지 못했을리는 없고, 그렇기에 저자들은 우선 파시즘의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갔어야 했지만, 책에선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결국 온갖 곳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마치 '빨갱이'란 단어 쓰이듯 불분명한 기준속에 여기저기 딱지가 붙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빨갱이'의 창조자인 극우세력에게 좋은 도구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들의 '미시적 폭력'의 담론은 그 결과적 현상뿐만 아닌 거시적 책임의 부문에서 마저 그 책임을 '민중'혹은 '진보세력'에게 거의 대부분을 전가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극우세력의 환호로 이어지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론-공동작업의 한계일수도 있었겠지만-'우리안의 파시즘'같은 센세이셔널한(?)제목을 달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건 확실한건, 이제 그 누구도 '우리안의 파시즘'론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차분한 마음으로 저자들의 '불편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민족과잉담론, 국가중심주의, 승리지상주의 그리고 어찌보면 이 책을 하나로 관통하는 중심 토픽이라 볼수있을 가부장주의 등의 담론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물론 그 수준과 만족도면에서 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다만-은 독자들에게 그 화두들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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