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조합하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있냐며 왠지 모를 좌절감에 휩싸였던 그 때를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정제된 언어가 자아내는 감성과 이성이 촘촘하게 짜여,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는 포근한 스웨터 하나를 선물받은 기분... 좋구나.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작가 덕분일 것이다. 이제 2014년이 되었고 우리는 또 저마다의 1년을 살아가겠지만, 2014년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작년부터, 저 멀리로는 2002년부터 이어져왔고 1987년, 1945년, 1910년 그리고 1000년, 100년, B.C 수백 년 수천 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간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내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나같은 개인의 일생이 수없이 쌓여온 결과물 속에 내가 잠시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잠시 아연한 기분이 된다. 내 삶으로부터 떨어져서 관조하는 마음으로 나를 되돌아본다. 내가 앉아 있는 방이 보이고, 방이 있는 집, 집이 있는 동네, 동네가 있는 도시, 도시가 있는 나라, 나라가 있는 지구, 지구가 있는 우주, 우주가 있는... 또 어딘가까지 떠올려본다.
공간과 함께 시간도 다시 느껴본다. 지은 지 30년은 된 이 건물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갔을까.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100년 전인 1914년에 있었던 일들, 1014년에 있었던 일들, 그 때의 거리와 사람들도 불러내본다. 낡은 짚신으로 종종거리며 물을 길어 나르던 종들이 실제로 이 길 위에 있었을 것이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팔자걸음 걷던 양반들도 이 길을 다녔을 것이다. 구한말 개항으로 몸살을 앓았을 부산을 그려보고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을 거리도 떠올려본다. 누군가 태어난 자리이기도 하고 누군가 죽기도 한 자리일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여기에서 과거의 수많은 누군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먼 어느 날에, 나의 삶을 궁금해하는 누군가도 있을까?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 주 <무한도전>에는 출근한 지 갓 하루가 된 신입사원이 등장했다. 김태호 피디를 닮은 이 청년은 무한도전을 보고 자란 세대일 것이고 10년 가까이 쌓여온 무한도전의 시간이 그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쌓여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 앞의 무한도전에서 자기 안의 무한도전을 보기도 할 것이고 그렇게 현재를 과거와 함께 살게 되기도 할 것이다. 또 그것이 섞여 앞날로 이어져 가겠지. 그 미래는 다시 누군가의 현재가 될 것이고, 누군가의 과거가 될 것이다. 시간이 쌓여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서 아련하고, 설레고, 목도 좀 메어왔다. 이 책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방송국 피디로 막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마저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못하게 했다. 생각을 자꾸만 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책이다.
그리고 어제의 <1박2일>은 시간이 쌓이는 아름다움의 정점에 있었다. 아들의 과거였던 아버지의 현재가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현재가 되었다. 젊은 시절 연애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그 시절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아들이 다시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래 사진은 제작진이 부모의 사진에 아들을 합성해 선물한 '시간'이다. 공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쌓인 장소들을 보존하는 일은 낡은 건물을 밀어버리고 살기 좋은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꿋꿋이 아파트를 지어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간의 소중함에 눈을 돌려 진심으로 보듬어내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눈가 촉촉해진 사람들이 있다는 건 커다란 감동이었다...
아름답고, 고마운 이 책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아쉬움의 크기가 작지 않아서 더 아쉬운, 아쉬움. 내내 부드러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마치 과속방지턱처럼 덜컹거렸던 부분은 "강원도의 힘" 꼭지에서였다. 200305강릉, 이라고 적힌 사진 한 장에 관한 작가의 감상에서, 예기치못한 이율배반을 보았을 때.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지금은 태백으로 편입된 강원도 황지라는 곳에 잠깐 다녀온 경험으로 강원도 전체에 관한 애잔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강원도의 자연이 훼손되는 것도 못마땅하고, 경포호수가 난잡한 상가건물에 둘러싸인 광경도 보기가 싫다. 나는 여기서부터 그의 아름다운 문장 드라이브가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조악한 건물들이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현장을 볼 때, 누군가가 미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철학이 없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행정책임자이지 환경같은 것을 돌아볼 겨를없이 오로지 생계만을 위해 달려야하는 영세자영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경멸할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힘든 강원도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 내는 것이 이 책의 흐름에 자연스러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부자연스럽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약간 거북했다가, 결국엔 마지막을 장식한 이 우아한 구절에서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아져버렸다.
그래서 이 뻔뻔한 아이스크림 수레는 한때 호수를 포위하고 있던 저 가건물 횟집들의 오만을 한데 압축해놓은 것과 같다. 내가 끝내 보지 못한 다섯 개의 달 또는 일곱의 달이 저 수레의 통 속에서 아이스크림과 함께 달콤하게 얼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 언 달을 담을 고깔과자들이 강원도의 자연에 담겨 있을 모든 힘과 맞먹을 힘을 날카롭게 뽐내며 저렇듯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것이리라. -p.143
책을 읽기 전 후르륵 한 번 넘기다가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마치 합성해 넣은 듯한 이 촌스러운 아이스크림 수레가 몹시도 고단하고 슬퍼보였다.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기 위해 나왔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그의 아들딸과, 그의 노부모가 떠올랐고, 곧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딸에게 아이스크림을 팔게 될 그 장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책임감과 욕심이 그대로 묻어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초라한 수레를 불쑥 밀어놓은 장수의 뻔뻔함마저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내게는 고단하고 슬프게 보였던 저 아이스크림 수레를, 강원도의 자연을 압도적으로 망치는 흉물로 보는 작가의 눈이 낯설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겨울의 개"를 쓴 작가와 동일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사진 너머의 삶과 역사를 가지런히 담아 내어주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백사마을'의 깊이를 어루만지던 그 사람이 아니었고, 청계천을 시멘트로 덮었던 박정희와 청계천을 열었으나 다시 시멘트로 막아버린 이명박을 비판하던 그 사람도 아니었다. 그 수레를 바라보는 사람은, 풍경의 정취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해 마음이 상한 나머지 고달픈 생계를 '덮어버린' 사람이었다.
그 전까지 참 가슴을 뭉클하게 해줬던 그의 아름다운 문자들이 이제는 비아냥을 가득 담아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슬펐다. 날카로운 것은 수레 위의 고깔과자가 아니라 사진을 해석하는 작가의 글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다시 조곤하고 온기 넘치는 문장들이 내게 다가와주었지만 과속방지턱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이 올바르고도 아름다운 책이 담고 있는 수많은 글 중에서 유독 하나를 문제삼아 이렇게 길게 토로하는 아쉬움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애초부터 사진작가가 그런 뜻으로 찍은 사진일 수도 있고, 사진을 글쓴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별 생각없이 지나치며 내가 과민하게 군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읽어봐도 아쉽다. 찬물에만 계속 담갔던 손보다,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찬물에 담글 때 손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아름다움 뒤에 오는 아픔이라서 더 씁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