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색함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하면, "사색(혹은 생각)이 사색이지 사색에 무슨 유형이 있느냐, 그냥 생각하면 그것이 다지 거기에 뭐가 있다는 것이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색. 좀더 친근하고 쉬운 말로 '생각'이라는 단어가 있다. 생각함에 유형이 있을까? 나는 유형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나의 사색함, 나의 생각함에는 유형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다먹고 빈병만 남은 게토레이 플라스틱 병을 두고 사색을 할 수 있을까? 사색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슬슬 꼬이기 시작하나? 나의 이 질문에 평소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쟤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아니 게토레이 병을 놓고 생각을 하면 하고 말면 마는거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건 뭐고,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뭐야.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먼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나의 사색함에 게토레이 병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다 마신 게토레이 병을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보고 정밀묘사를 하듯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 그것만을 놓고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게토레이 병 주위에 있는 국어사전이나 시계, 컴퓨터, 수첩 등을 포함해 사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게토레이 병 이외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직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은 게토레이 병 뿐이다. 그럼 게토레이 병에 얽힌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은 다만 나의 사색이 확장되도록,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그 영역을 넓혀주는 '원인'이나 '동기부여'로써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나는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담들, 추억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내는 것을 뜻하며, 길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기억에서 벗어나 그 사고의 꼬리를 물고 다른 사고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즉 후자는 엄밀히 말하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미 다른 영역으로 옮겨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당에 놓여있는 개의 밥그릇을 보고서 "거 밥그릇 참 지저분하다"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땡칠이(개의 이름)를 떠올릴 수 있다. 전자는 개의 밥그릇에 대해 사고한 것이고, 후자는 그 밥그릇을 사용했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다. 분명 시각을 통해 들어온 것은 '밥그릇'이지만 머리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밥그릇'이요, 한편으로는 '개'이다.

 나의 사고, 너의 사고, 우리들의 사고의 대부분은 아마도 후자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인간이 단세포가 아닌 이상(물론 단세포는 '사고'가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 하나를 놓고 그것만 사고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몸으로 온갖 경험들과 맞부딪치게되고 그 경험들을 기억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 후에도 그 경험 혹은 기억들은 없어지지 않고 머리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우리의 옛 사랑을 떠올리고, 개 밥그릇을 보고 죽은 개를 떠올리며, 빛바랜 사진을 보고 지난 일을 떠올린다. 이 모든 '떠올림'은 후자의 사색이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새삭함의 두가지 유형'이라고 전제를 깔고 시작했으나, 전자의 사색, 그것만 놓고 보는 사색은 사실상 사색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보는 것일 뿐이다. 보는 것이 사색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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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철학과에 간다고 하면 뜯어 말릴 것이다. 왜 그럴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이라는 상황에 걸맞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문제의 근본원인을 찾기 위해 소급해 들어간다는 면에서 위험(?)하다. 위정자들에게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 따로 없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될 사안들에 대해 철학도는 이를 걸고 넘어진다. 자신의 사적 이익관계를 떠나 '철학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문제가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원인을 파고든다. 한국에서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국가권력의 절정기에 국가의 정책에 딴지를 건다는 것은 "나 죽겠소" 하고 나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모들은 가급적 국가를 거스르지 않고 자녀가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저 조직에 순응하고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길일까? 진실은 덮어둔 채 나만의 안위를 생각하고 나의 안락한 삶을 꿈꾸는 것이 진정 올바른 길일까? 그렇지 않다. 잘못된 것을 알도록 깨우쳐주고 그것을 고치도록 인도하는 것이 부모세대가 해야할 일이다. 그저 품안에 두고서 아끼며 데리고 사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가르치는 행위이다. 진리,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며, 그냥 그렇게 죽어가는 삶은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가!

또한 진리, 진실을 아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된다. 안다면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한다.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그저 나의 지적 만족감, 지적 유희일 뿐이지 그것은 진리, 진실을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것을 세상에 뿌려야 비로소 그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앎은 곧 행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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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哲學者와 哲學家는 어떻게 다를까?
둘 다 같은 의미일까?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일까?

 대개 철학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우리는 그를 '철학자'라고 부른다. 동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철학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어떤 경우 '철학자'라는 말 대신 '철학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 어떤 경우에 '철학가'라는 말을 사용할까? 분명 '철학가'보다는 '철학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음은 확실하나 두 단어 사이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민중엣센스 국어사전을 들춰보면, '철학자'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 '철학가'는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조예가 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조예가 깊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만 좀더 세세한 차이를 느껴보기 위해 다시 사전을 들춰보자. 사전에 따르면, '조예'는 '학문, 기예 따위가 깊은 지경에 이른 정도' 라고 되어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와 '철학가'의 차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철학자'는 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연구자를 말하는 반면, '철학가'는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하지는 않지만 철학에 조예가 깊은, 즉 철학에 깊은 지경에 이른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둘의 차이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럼 나는 철학자인가, 철학가인가? 둘 중 어느쪽에 가까운지를 묻는다면 '철학자'이겠지만, 나는 철학자도 철학가도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는 하지만 '전문적'이라 할 수 없는 정도이고, 그렇다고 철학에 깊은 지경에 도달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철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철학도'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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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1학기인지, 2학기인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헤겔수업 시간이었다. 10여명의 학생들과 선생님 모두 동그랗게 빙 둘러앉아 한명씩 자신이 철학을 택한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없이 점수맞춰 왔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존재의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들어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학을 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철학과를 왔던가?

사실 앞으로 내가 말할 '내가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을 택하기 이전에 생각했던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즉 앞으로 말할 '철학을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철학과를 택하고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서는 '철학을 하는 목적'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도록 한다.

철학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철학을 공부하는지도 모른다. 한 단어로 내가 철학하는 목적을 말하자면 '혁명'이다. 나는 혁명을 위해서 철학을 혁명의 수단, 도구로 삼고 있다. 여기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도구', '수단'의 의미는 그것이 뜻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도구, 수단과는 다르다. 사전적 의미로 '도구'라는 것은 '일에 쓰이는 여러가지 연장'을 뜻하며, '수단'은 '일을 처리해 나가는 묘안을 꾸며 내는 솜씨와 꾀' 혹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고 있는 수단. 도구의 의미는 이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시간의 경과를 통해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퇴직을 하고, 죽음에 이른다. 이들 모든 과정이 개인의 차에 따라 그 개인에게 포함될수도 생략될수도 있다. 또한 그것의 시간적 격차가 다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경과를 통해 무엇인가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한 '도구'나 '수단'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내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하다가 그 결과물로서 혁명을 얻겠다는 뜻이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에서는 혁명이 주가 되고, 철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철학이 주가 되고, 혁명은 철학함의 부산물이 된다.

자 이제 내가 '철학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를 해석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니가 말하는 '혁명'의 의미가 뭐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게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내가 말하는 '혁명'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혁명! 그것은 위대한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역사상 많은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을 이끈 많은 혁명가들이 있었다. 프랑스혁명, 볼셰비키혁명 등등... 그런데 내가 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지어야겠다. 방금 앞에서 나는 세계의 혁명의 예를 들면서 "쿠데타도 혁명인가? 그렇다면 박정희의 군부쿠데타도 혁명으로 간주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사전적 의미를 빌려야겠다. 어떤 국어사전을 손에 들던 '혁명'과 '쿠데타'의 의미는 비슷비슷할 것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혁명'이란 '급격한 변혁. 어떤 상태가 급격하게 발전변동하는 일' 이나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자가 되는 일' 혹은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체, 정체를 변혁하는 일' 또는 '종래의 권위, 방식을 단번에 뒤집어 엎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럼 '쿠데타'는 무엇인가? '쿠데타'는 '비합법의 무력적 기습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일.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이동으로서, 체제의 변혁을 목적하는 혁명과는 구별됨'이라 정의되어있다. 무엇이 다른가? 앞서 정의에서 볼 수 있듯, '혁명'은 체제의 변혁을 꾀하는 반면, '쿠데타'는 혁명과 같이 체제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도 단지 정권의 교체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혁명'의 대략적인 의미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내가 꿈꾸는 '혁명'이 체제의 변혁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누명을 쓸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간단한(?) 부연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나는 내가 꿈꾸는 혁명이 체제의 변혁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되던간에 혁명의 최종적인 모습으로서 만인이, 세계인류가 평화롭게, 평등하게, 자유롭게, 정의롭게 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 뿐이다. 여기서 평화가 무엇이냐, 평등이 무엇이냐, 자유가 무엇이냐, 정의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설명하자면 내가 이 글을 언제 끝맺게 될지 알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만큼 이것들은 설명하기 어렵고, 또한 예민한 것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시간을 가지고 논하기로(논한다? 논한다는 것은 둘 이상의 화자가 존재하는 것일진대 여기서 나는 '논한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내가 이 단어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자아와 지금 말하고 있는 나, 이렇게 두 화자를 상정해놓고 있음이다) 하고,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설명하겠다.  

자유, 평화, 평등 등등의 마냥 좋아만 보이는 개념들.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정말 간단히 말하자. 나에게 있어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 글의 독자들이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단어만 머리속에 집어넣으면 된다. 좌파, 반세계화...
"이것들이 의미하는게 뭐냐?" 고 또 물으시면 나는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꾸 이런식으로 단어 하나하나 캐묻고 소급해가자면 끝도 없어지므로 저 두 단어로 알아서 머리속에 조합해보라. 신문지상에서 여러가지 국제 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반세계화시위들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면 한층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 그럼 나는 다음에 쓰여질(그러나 언제일지는 알 수 없음. 다음 글일수도 그 다음 글일수도 안쓸수도 있음) 글에서 나에게 있어 자유, 평화, 평등, 정의 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논하면 이 글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 것이라 여겨진다.

그럼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내고, 어떻게 철학을 통해서 혁명을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지금까지는 철학을 혁명의 도구, 수단으로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혁명이란 무엇인지, 내가 말하는 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니, 정작 '철학'과 '혁명'을 이어주는 연결부분이 빠진 셈이다.

앞서 나는 철학을 통해 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인간의 인생사에 빗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라는 어구로 표현해도 될 듯하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아니 '철학을 하다보면'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겠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생물학이 생물을 대상으로 하고, 유전공학이 유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이 철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 대상이 없다. 다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은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철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일수도, 우주의 문제일수도, 사회의 문제일수도, 언어의 문제일수도, 생물의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은 그 대상을 정함에 있어 범주를 두지 않는다. 자, 다시 이야기의 논점으로 돌아가서, 철학을 하다보면 내 주변, 사회, 국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문제시되는 것들에 대해 그 문제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그 원인을 한없이 소급해 들어가는 것에 매우 익숙해진다. 어쩌면 그것이, 철학을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하늘에 붕 뜬 구름만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먼 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찾는 모습이다. 이렇게 그 근본으로 소급해가다보면 무엇이 잘못되어 지금의 결과에 이르렀는가를 느끼게('알 수 있다'라는 표현은 안쓰겠다. 그것은 자칫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단론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될터인데 실상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안다'는 표현보다는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될 때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근본부터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즉 철학을 하면서 지금의 잘못된 것들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고쳐가면서 혁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생각같아선 단한번의 변혁으로 혁명을 달성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혁명은 그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 있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난 뒤...
앞서 '철학을 공부한다'와 '철학을 한다'의 차이점을 언급하긴 했지만, 정작 차이점만 언급했지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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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학번이세요? 무슨과세요?"
"네 98학번이고, 철학과입니다."
"철학과요? 철학과에서 뭐 배워요? 왜 철학과 가셨어요?"

미팅나갔을때 혹은 생전처음 보는 사람과 대면할때 가장 흔하게 시작하는 평범한 대화이다. '철학과'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철학과에서 뭐 배워요?" 이고 이에 못지 않게 들었던 말은 "왜 철학과 가셨어요?" 이다.

내가 1학년에 '국제경제통상학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는 위의 저런 질문에 답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내게 그런 질문을 해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잘나가는 학과려니 하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내가 철학을 택한 이후 나는 위의 저런 질문에 시달려야했다. 따라서 그에 못지 않게 생각도 많이하게 되었고, 위의 질문에 답할 대답도 준비해뒀다.

처음 내가 경제국제통상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할 때 나는 '철학'이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싶었다. 전과하겠다는 문서를 철학과 사무실에 내러갔을때 조교 선배들은 의아하게 쳐다봤으며 자리에 앉아있던 000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철학에 관심있었으면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철학강좌를 듣지 그랬어요?" 또 다른 사람들은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택해도 될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철학과'라는, 내 이름앞에 붙을 간판이었다. "숭실대 철학과 ooo입니다"라고 떳떳히 말할 수 있는 '철학과'라는 이름. 그때 난 그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은 어떤 이끌림이었다. 또 고등학교 때 익히 철학책을 사다보며 뜻을 알수없는 문자들을 읽어나가야했던 나는 철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다른 것을 전공하며 군것질거리로 조금씩 뜯어먹을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경제국제통상, 경제학이나 무역학을 전공할 것이었다면 난 처음부터 철학에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찍쩝거리는 것으로는 철학을 공부할 수 없다. 오직 철학에 전념해야 철학에 빠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가지 더 들자면 당시 나는 경제학, 무역학, 경영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수업을 빼먹고 놀러다니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놀기만 한것은 아니었지만 수업에 들어가서도 맨뒷자리에서 친구와 음악이야기나 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쯤되면 내가 철학을 택한 피상적인 이유는 될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말하지 않았다. 위에 내가 말한 것은 '철학을 택한 이유'라기보다는 '철학과에 오게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철학을 택한 이유. 본래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단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몰두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레고라는 블록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중학교 시절엔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엔 록음악에 빠져있었다. 운동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과 만나 어디인가를 놀러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이런 성격은 내가 철학에 빠지게 된 어느 정도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둘째, 학창시절(대학이전) 나의 우상은 신해철이었다. 그가 철학과여서라기보다는 그의 음악이, 그의 가사가 맘에 들었다. 가사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노라면 그냥 단순한 문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만의 깊은 고민과 사색을 거쳐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도 그에 필적할만한 작사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의 메세지는 내 머리속 깊이 파고들었고, '이런 문장들을 내뱉을 수 있는 그의 정신, 그의 머리는 어디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그의 프로필. 서강대 철학과 중퇴! 신해철을 좋아한 초창기에는 그가 철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몰랐다. 후에 이를 알고는 아! 바로 철학이다. 그렇게 나는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내가 철학을 택하게된, 철학에 이끌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억압된 통제속의 학창시절에 진저리를 느끼고,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욕구에 쇠사슬을 풀어줄 무엇인가를 갈망했고, 그때 읽던 철학책을 통해 다소나마 나를 풀어줄 실마리를 얻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것은 단지 느낌이었고, 구체적인 결론이나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후에 내가 철학을 택함에 있어 이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의 영향은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철학을 택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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