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은 김우창씨는 '춘아 춘아 옥단 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라는 대담집을 통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함께 이 책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혔다. 그는 '파우스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다.

"무엇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마련이고 방황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된다"

그는 바로 이 구절이 자신의 삶에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강하게 느끼는 것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면, 설사 거기에서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계속 추구하여 노력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인생을 생각하는 데에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가 강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추구하면 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면 과정에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나중에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 자체가 나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준다.

나는 어떤 '이끌림'에 따라 경제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것은 어떤 '이끌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학교 근처 서점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를 찾았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을 찾아 읽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내가 철학과로 전과한 것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이끌림'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보다는 음악에 대해서 좀더 명확한 설명을 붙일 수 있지만 음악 역시 나는 어떤 이끌림을 통해 계속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하고서 그만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철학과 함께 내가 '평생을 걸쳐 하고자 하는 것'으로 지정했다. 철학과 음악은 각각 50%씩의 비율로서 나의 미래를 확보하고 있다. 한때는 철학이 90%를 차지할 수도, 음악이 90%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순간에 둘다 병행하기 힘든 때문이지 어느 하나를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나는 '이끌림'을 통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계속해서 추구해왔고 앞으로도 추구할 것이다. 괴테의 저 말은 예전엔 몰랐고 지금은 알았지만 예전과 지금, 미래의 차이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할 뿐이다. 어떤 '이끌림'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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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취미가 뭡니까?" 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음악감상'과 '독서'를 집어 넣는다. 이 '음악감상'이란 것이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음악'을 '감상'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것은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독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특히나 선생님)은 독서가 취미일 수 없다고 한다. 독서는 취미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은 기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릴적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그런가부다 했다. 왜 그럴까 라는 의문은 들면서도 무심코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요즘 "독서가 취미일 수 없다"라는 말이 내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단 그 '독서'라는 것의 '서'가 '책'이 아닌 '글'임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물론 '책'이라고 해도 되지만 좀더 넓은 범위에서 '글로 쓰여진 모든 것'이라는 정의로서 해석하고자 한다.

내가 어떤 공부를 하던지간에, 어떤 놀이를 하던지간에 나는 그 공부나 놀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글로 쓰여진 것들을 찾게 된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자면 신문을 봐야겠고, 게임을 하자면 설명문이나 매뉴얼을 봐야겠고, 농구에 관심이 있으면 농구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야한다.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글읽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독서는 모든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취미일 수가 없다. 취미는 남는 시간에 혹은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기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어 하는 행위를 말한다. 취미는 내가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독서는 모든 활동의 기본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취미가 될 수 없다. 취미에 앞서 있는 행위인 것이다.

 

p.s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독서도 취미일 수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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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글쓰시는 것 좋아하나봐요?"

이에 대해 난 이렇게 답했다.

"네. 글쓰는 거 좋아해요. 가급적 경험한 모든 것을 글로 남기려고 하죠."

이 짧은 대화는 내가 글쓰는 이유를 잘 말해준다.

최근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일본의 한 지식인의 책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한글번역제목)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는 지은이를 일컬어 "지적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글을 읽고 글을 쓰는데에 열중했다. 다른 어떤이들이 성욕이 강하고, 식욕이 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지욕이 강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어쩌면 그런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어릴적부터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고 학창시절에도 교과서 이외에 읽은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나만큼 학창시절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책'이 아닌 '글'이다. 아직도 내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이 힘들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읽음'의 대상이 '책'이 아닌 '글'이 되면 나도 많은 글을 읽었노라 말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 시절, 인터넷을 알고 채팅을 즐기며, 게시판에 글 남기기를 좋아하던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후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기장'이라는 이름으로든, '사색노트'라는 이름으로든 뭘로 불려도 상관없다. 사르트르는 일기랍시고 썼지만 그의 '구토'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구토'를 고등학교 2학년때, 그리고 대학1학년때 읽기를 시도했다가 몇장 읽고는 포기했다. 그것은 일기 아닌 일기였다.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구체적 경험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글'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내가 순간 생각한 것들, 내가 몸으로 체험한 것들, 나는 이 모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다. 내 고민이 묻어있고, 내 생각이 묻어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난 이 무형의 가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괜찮은 답변들이다. 이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를 찾아가는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 나는 이를 '경험의 문자화'라고 표현한다. 주변에 날아다니는 잡히지 않는 경험-그것을 '순간'이라 표현해도 좋다-을 '문자'라는 매개를 통해 언제나 내가 원하면 잡을 수 있는 경험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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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考察) : 상고하여 살피어 봄.
상고(相考) : 서로 비교하여 고찰함.

성찰(省察) : 반성하여 살핌.
반성(反省) : 1.자기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그 선악,가부를 고찰함.
               2.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찰함.
               3.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함.

위의 기초적인 단어들을 국어사전을 통해 다시 살펴본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당신의 글은 "고찰은 있되, 성찰이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통해 그 낱말들이 뜻하는 바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전적 정의로서 '고찰'이라 함은 '비교하여 살펴봄'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고, '성찰'이라 함은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펴봄'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무엇이 다른가?

비교하여 살핀다는 것과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핀다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살핀다는 것은 비교하여 살핀다는 것보다 좀더 깊이있는 '살핌'이다. '비교하여 살핌'은 단순히 드러난 사태나 사건들을 토대로 하여 이들을 '비교'한다는 것이고,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살핌'은 드러난 사태나 사건이 아닌 그 본질에서부터 '살핌'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의 글은 과연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는가? 내 글에는 다양한 형식의 글들이 있으니 그 글들의 범위를 좀더 좁힐 필요가 있다. 그 자체 일기형식의 글이나 단순 사건나열식의 글들은 빼기로 하자. 여기서 주를 삼고자 하는 것은 '나의 공격적 글쓰기'이다. 나의 공격적 글쓰기에는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나? 지금까지 쓴 글을 떠올려보건대, 나의 글에 성찰이 깃들지 않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고자 한 것이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 것이므로 이러한 비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지적에 대해 대꾸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해보려고 이 글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이나 '신독',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등의 글을 보면 성찰이 빠져있다고 할 수는 없다. '신독'이나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등과 같이 미묘한 단어의 국어사전의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풀어내려 한 경우에도, 단순히 국어사전의 의미만을 전부로 삼지도 않았으며, 단어가 지닌 사전에 나와있지 않은 미묘한 차이점을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글에서 '고찰'만 있고 '성찰'은 없다 는 비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혹여 내가 찾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그 점을 다시 구체적으로 지적해 무지한 나를 깨우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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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나는 어떤 글에선가 나의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법'이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다. 자유연상법 이라 하면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문시간에 배운 바로 그 '자유연상법'이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에 도입한 것이다. 한 가지 단어나 주제를 모태로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막지 않고 그대로 적는다. 계속  글을 쓰다보면 한 단어나 주제를 통해 새로운 다른 단어나 주제가 머리속에 떠오르고 이것을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일괄된 맥락을 갖추며 계속해서 글을 쓴다. 한가지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나의 사유공간이 이동하면서 글이 완성된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글쓰기 방식의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이다. '자유연상법'을 글이 서술되는 내용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공격적 글쓰기'는 외형적인 측면이다.

나는 '공격적 글쓰기'를 즐긴다. 때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아 실제 내가 그 글에서 극단을 지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단인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얼마전 썼던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남성조직의 여성차별이 군대문화임을 주장하며 그것만이 여성차별의 원인임을 주장했다. 사실 모든 우리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태에 대해서 거기에 한 가지 원인만이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은 무리다.그것은 누구나 안다. 나도 알고 있지만 나는 그 글에서 그렇게 단정지었다. 왜인가? 나의 글쓰기 방식이 극단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그 표현방식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외형상 극단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내용'또한 극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 내가 쓴 글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은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었지, 그 내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경험하고 난 후 나는 나의 공격적 글쓰기, 극단적 글쓰기 방식을 좀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는 꼬투리를 잡으려 할 것이고, 나의 극단적 글쓰기에서는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기가 쉬워진다. 따라서 그들이 내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고, 내 생각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형식논리학'적인 측면에서 완벽성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나의 글이 쓸데없는 비난 내지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그들의 머리속에 침투시키기 위해 외형을 좀더 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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