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바다출판사)를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랑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바마 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 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내가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마틴 루터 킹 그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관계없이 그 가장 밑바닥에는 '인간'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위의 저 글귀들은 그의 포용과 평화, 인류애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휴머니즘이고, 평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실재"다. 평화=정의라는 것이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우려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평화'를 외쳐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의 수호자라 칭하는 지금의 미국을 바라보자면 누가 테러리스트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평화를 깨려하는 미국, 평화를 깸으로써 자신들의 전 세계에 대한 패권을 강화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현을 앞당기려는 그들. 그들이 진정 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인지 의심스럽다.

마틴 루터 킹의 평화에 대한 생각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간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며 조국을 식민지화한 영국인들에 대해 함께 같이 살자고 외쳤다. 그들을 내쫓으려하기보다 영국인과 인도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살기를 바랬다. 간디의 넓은 마음과 평화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스로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평화주의'를 외칠 것을 주장한다. 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어야한다. 폭력과 전쟁이 있고서는 평화란 정착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라고 규정짓고 싶다. 따라서 나는 평화주의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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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느 글에선가 "지식인이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고 불안한 존재다"라는 문장을 본적이 있다. 항상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영역에 서고자 하며 사회의 잘못된 습관이나 관행, 제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비판을 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꽤 있다. 그러나 지식인 그룹에 넣을만한 사람들 중 비판적 지식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의 지식인 그룹이 자신의 위치에서 안정만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편하게 먹고 살라고 그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편하게 먹고 사는 권리를 부여해준 것의 이면에는 그 대가로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달라는 요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비판을 게을리하는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당신이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생각하고 있고,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늘 불안한 존재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칭찬이다. 상대방이 그것을 욕으로 한 것이든, 칭찬으로 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신은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당신이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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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은 김우창씨는 '춘아 춘아 옥단 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라는 대담집을 통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함께 이 책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혔다. 그는 '파우스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다.

"무엇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마련이고 방황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된다"

그는 바로 이 구절이 자신의 삶에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강하게 느끼는 것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면, 설사 거기에서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계속 추구하여 노력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인생을 생각하는 데에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가 강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추구하면 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면 과정에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나중에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 자체가 나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준다.

나는 어떤 '이끌림'에 따라 경제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것은 어떤 '이끌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학교 근처 서점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를 찾았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을 찾아 읽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내가 철학과로 전과한 것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이끌림'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보다는 음악에 대해서 좀더 명확한 설명을 붙일 수 있지만 음악 역시 나는 어떤 이끌림을 통해 계속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하고서 그만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철학과 함께 내가 '평생을 걸쳐 하고자 하는 것'으로 지정했다. 철학과 음악은 각각 50%씩의 비율로서 나의 미래를 확보하고 있다. 한때는 철학이 90%를 차지할 수도, 음악이 90%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순간에 둘다 병행하기 힘든 때문이지 어느 하나를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나는 '이끌림'을 통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계속해서 추구해왔고 앞으로도 추구할 것이다. 괴테의 저 말은 예전엔 몰랐고 지금은 알았지만 예전과 지금, 미래의 차이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할 뿐이다. 어떤 '이끌림'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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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취미가 뭡니까?" 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음악감상'과 '독서'를 집어 넣는다. 이 '음악감상'이란 것이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음악'을 '감상'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것은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독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특히나 선생님)은 독서가 취미일 수 없다고 한다. 독서는 취미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은 기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릴적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그런가부다 했다. 왜 그럴까 라는 의문은 들면서도 무심코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요즘 "독서가 취미일 수 없다"라는 말이 내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단 그 '독서'라는 것의 '서'가 '책'이 아닌 '글'임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물론 '책'이라고 해도 되지만 좀더 넓은 범위에서 '글로 쓰여진 모든 것'이라는 정의로서 해석하고자 한다.

내가 어떤 공부를 하던지간에, 어떤 놀이를 하던지간에 나는 그 공부나 놀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글로 쓰여진 것들을 찾게 된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자면 신문을 봐야겠고, 게임을 하자면 설명문이나 매뉴얼을 봐야겠고, 농구에 관심이 있으면 농구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야한다.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글읽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독서는 모든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취미일 수가 없다. 취미는 남는 시간에 혹은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기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어 하는 행위를 말한다. 취미는 내가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독서는 모든 활동의 기본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취미가 될 수 없다. 취미에 앞서 있는 행위인 것이다.

 

p.s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독서도 취미일 수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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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글쓰시는 것 좋아하나봐요?"

이에 대해 난 이렇게 답했다.

"네. 글쓰는 거 좋아해요. 가급적 경험한 모든 것을 글로 남기려고 하죠."

이 짧은 대화는 내가 글쓰는 이유를 잘 말해준다.

최근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일본의 한 지식인의 책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한글번역제목)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는 지은이를 일컬어 "지적욕구가 강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글을 읽고 글을 쓰는데에 열중했다. 다른 어떤이들이 성욕이 강하고, 식욕이 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지욕이 강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어쩌면 그런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어릴적부터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고 학창시절에도 교과서 이외에 읽은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나만큼 학창시절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책'이 아닌 '글'이다. 아직도 내게는 책 한권을 읽는 것이 힘들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읽음'의 대상이 '책'이 아닌 '글'이 되면 나도 많은 글을 읽었노라 말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 시절, 인터넷을 알고 채팅을 즐기며, 게시판에 글 남기기를 좋아하던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후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기장'이라는 이름으로든, '사색노트'라는 이름으로든 뭘로 불려도 상관없다. 사르트르는 일기랍시고 썼지만 그의 '구토'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구토'를 고등학교 2학년때, 그리고 대학1학년때 읽기를 시도했다가 몇장 읽고는 포기했다. 그것은 일기 아닌 일기였다.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구체적 경험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글'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내가 순간 생각한 것들, 내가 몸으로 체험한 것들, 나는 이 모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다. 내 고민이 묻어있고, 내 생각이 묻어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난 이 무형의 가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괜찮은 답변들이다. 이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를 찾아가는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 나는 이를 '경험의 문자화'라고 표현한다. 주변에 날아다니는 잡히지 않는 경험-그것을 '순간'이라 표현해도 좋다-을 '문자'라는 매개를 통해 언제나 내가 원하면 잡을 수 있는 경험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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