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을 통해 본 칸트의 평화론(平和論) 비판(批判)

독일의 근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평화론을 예로 들었다. 첫번째는 '자본주의 평화론'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끼리는 시장경제의 확산과 교역을 통해 상호의존적 경제 관계가 구축되면 기업인들간의 유대가 돈독해지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을 행사, 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전쟁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 요지다. 두번째는 '민주평화론'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선전포고와 같은 중차대한 결정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상과 같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비추어봤을 때 현재 미국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자본주의 평화론'과 '민주평화론' 을 모두 빗겨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는 완전 개방된 자본주의는 아니었으나(이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한정된 공간에서의 자본주의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었고(사담 후세인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미국은 당연히 자본주의 국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두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틀렸다. 비록 이라크와 미국간의 교역도 적고, 기업인들간의 유대도 돈독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서로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끼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칸트의 생각은 엇나갔다. 오히려 미국의 자본주의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껏 쌓아두었던 무기창고를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비워야하기 때문이다. 비우고 다시 생산해야 미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다. 더군다나 이라크를 치게되면 테러예방이라는 명분과 함께 석유 또한 얻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미국 기업의 입장에서 이라크 전쟁은 적극 반길일이다. 따라서 이라크와 미국 기업의 유대가 좋지 않았다는 요소가 남아있지만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적어도 절반은 틀렸다. 자본주의 국가간의 평화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민주평화론' 또한 틀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가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지만, 지금의 이라크 전쟁은 부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민주당과 반전 평화주의를 외치는 이들의 견제와 균형을 먹히지 않았다. 부시를 포함한 부시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따라서 칸트의 '민주평화론'은 틀렸다. 만약 칸트의 '민주평화론'이 성립이 되려면 미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런데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성급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 시초이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민주주의에 패권주의가 결합된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미국의 '하는 짓'이 싫다고 해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칸트는 확실히 틀렸다.


사실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이나 '민주평화론'의 골자가 되는 핵심내용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인지라 이 시대를 살지 않는 칸트는 저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칸트가 틀렸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으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칸트는 옳았다. 다만 후대에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옳고 또 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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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2014-11-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평화론은 처음들어봐서 뭔지 모르겠으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했지 민주주의 평화론은 후대의 학자가 칸트를 인용해서 주창한겁니다. 또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속 공화정은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평화론의 골자는 `민주주의 국가 간` 입니다.

이잘코군 2014-11-25 14:23   좋아요 0 | URL
넵 한참 전 글이라 지금은 기억이 전혀 안 나네요. 이 글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도. ^^ 지적 감사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려면 내 자신이 떳떳해야하고 내 스스로 도덕성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남을 비판할 것이다.

김규항씨의 <B급 좌파>에 실린 동명의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난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좌파 자유주의자', '비판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그 말은 즉, 나는 나의 양심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양심까지고 지켜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쓴소리를 해댈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르는 기본전제는 나 자신의 양심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나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고서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쓴소리를 해댈 수가 없다. 다른 이와 나의 죄질의 차이가 클지라도 그나 나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좌파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해성사를 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다지 크게 잘못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시험문제 답을 몇개 가르쳐준 적이 있고, 대학에서 시험전 책상에 조그맣게 기록한 몇 문장을 통해 교양과목 시험에서 약간의 이득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끔이기 했지만 그리고 그가 잘못한 것이긴 했지만 나는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원인 제공이야 누가 했건 누가 잘못했건 나의 폭력행사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 이외에는 나는 나의 도덕성에, 나의 양심에 비춰 잘못한 일은 없는 듯 하다.

한가지 더.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 나의 머리속에 갇혀있던 생각들 중에서 나의 양심에 반하는 것들이 조금 있기는 하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고픈 생각을 한 적이 있고, 누군가를 매우 증오한 적이 있으며, 그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도 있고, 가끔은 아니 자주 야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껏 이정도면 나의 양심을 지켜왔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의 도덕성이라면 남에게 뭐라고 할 만한 자격은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지금껏 했던대로 나는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쓴소리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나는 그들의 양심까지도 지켜낼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자처하는 B급좌파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좌파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되고픈 희망을 가진 사람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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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직에 몸담고 있거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파렴치한 행동들이 신문지상에 잇달아 오르내리고 있다.

사례 1. 경찰간부가 정복을 입고 회식 중 커피배달온 여고생에게 말했다. "벗어" 여고생은 경찰복을 입고 있는 그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싶었지만 가해자가 경찰이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소송을 냈다.

사례 2. 경찰대 출신의 경찰이 인터넷 채팅으로 12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었다. 후에 미성년자 성관계자 처벌시 드러났으나 봐주기 수사로 인해 처벌을 면했다. 이후 논란이 되자 사표를 냈다.

사례 3. 한 초등학교 교사가 반 여학생 10여명을 12차례에 걸쳐 성추행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나 학생들은 성추행당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학교 투서함에 넣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조치하지 않았다.

사례 4. 대구의 한 치과의사가 미모의 여성들을 유인해 미인대회에 내보내준다며 전신마취후 성추행 및 성폭행했다.

사례 5. 공무원이 회식 술자리 후 집에 가던 동료 여성공무원을 성폭행했다.

이상의 사례들은 적어도 최근 5일이내에 신문지상에 올랐던 사건사례이다. 범행의 가해자는 모두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경찰이거나,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치과의사, 국가의 녹을 받고 있는 공무원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대부분 미성년자들이다. 신문을 통해 위의 사례들을 접하면서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밖에는 안나고 화가 치밀어 숨이 막혀온다.

죽어라 공부해서 경찰대 나와 경찰간부되고, 치대 나와 치과의사 되면 뭐하나. 저들의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지니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과 '사람'이라는 종(種)으로 분류가 되는 것조차 수치스럽다. 겉만 사람이고, 겉만 엘리트였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짐승들 아닌가. 짐승도 저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이들이다.

사회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도덕성'이 요구되는 경찰과 공무원과 의사가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저버렸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볼 것 없는 타락한 후진사회다. 고(故)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노동운동가 전순옥씨는 20일 동대문경찰서 대강당에서 '인권과 한국 민주화'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녀는 "경찰의 모습에서 그 나라의 인권과 민주화를 판단할 수 있으니 이젠 약자를 돕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달라"고 주문했다. 경찰의 모습이 그 나라의 인권을 반영한다는 말을 위의 범죄사례에 비춰본다면 이미 우리나라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후진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유엔 인권위원회에 서명을 하고 인권, 인권을 외치지만 오직 말만 그러할 뿐 정작 인권을 가장 소중히 해야할 저들이 인권은 커녕 양심조차도 팔아버렸으니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시는 이와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첫째, 먼저 인간이 되지 않은 자는 고등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어떤 테스트를 통해서나 심사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각각의 자녀를 기르는 가정에서부터 이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 아이가 나이를 먹어가는데도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가차없이 더이상의 고등교육을 중단해야한다. 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석사, 박사 해봐야 이런 애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지 않은 엘리트는 가장 무서운 범죄자다. 따라서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알아서 통제해야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나쁜 인간이 사회로 나와 그가 있어서는 안되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면, 그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가차없이 형벌을 가해야한다. 의사라면 의사면허를 박탈시키고, 경찰이라면 경찰 자격을 박탈해야한다. 또 그가 교사라면 평생 교사를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공무원이라면 공무원 자격을 취소해야한다. 이후 그를 사회봉사원이나 기타 교육기관에 머물게하며 인성교육부터 다시 시키고 '평생봉사'를 명해야한다. 겉으로 좀 나아졌다 싶다고 해서 다시 내보내고 해서는 안된다. 사회의 범주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되, 그는 최저임금을 받는 조건하에 사회봉사에만 열중하게 해야한다. 왜냐면 인간이 안된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인성에 비했을 때 받아서는 안될 고등교육을 받아 사회에 머물렀고 그렇기에 같은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회의 하위층에 있는 사람보다도 죄질이 더 나쁘다. 감옥에서 몇년 살다 나오고 하는 식의 형벌보다는 사회의 테두리내에서 살되, 평생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그에게나 사회에게나 더 낫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첫번째 단계에서 차단을 해야한다.

국가 전체가 갈수록 도덕불감증에 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죄의 질은 더더욱 나빠지고, 그 수단은 교활하고 악랄하다. 성폭행 피해자의 연령은 갈수록 내려가고 있고, 범죄자는 사회의 부랑자나 소외자가 아닌 최고의 엘리트라 지칭되는 이들이다.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나쁜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화된 그들 중 소수의 인원의 잘못된 행동은 그들이 받은 교육의 한계점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은 과거보다 더 큰 윤리성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인성교육은 이미 쓰레기통에 간 형국을 맞고 있다. 기술과 자격, 능력은 나중의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람이냐 짐승이냐의 문제다. 교육의 철학을 되돌려야한다. 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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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뺐다. 간만에 책정리를 했다. 제대한 뒤로 좁은 방안에 수많은 책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리를 할까 고민하며 나름대로 1차 정리를 했는데 오늘로써 2차 정리를 마무리했다.

1차 정리 때에는 단지 많은 책을 효과적으로 쌓아 공간을 넓히려고 애썼고, 이번에는 이미 본 책과 그렇지 않은 책, 그리고 본 책도 아니고 가까운 시일내에 다 읽은 책도 아니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봐야할 책, 이미 봤고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로 구분을 지었다.

이미 본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고른 책들이다. 가령 <재미있는 수학이야기>-책 제목이 정확치는 않다-라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101가지 이야기>와 같은 책들이 이에 속한다.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서는 이 책들도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이미 나의 관심사가 철학과 전과후 과도하게 집중적으로 변한 탓에 저 책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손에 잡히지 않을 듯 하다. 이렇게 분류된 책들은 나의 책상에 달린 책꽂이 꼭대기에 올라가 이제는 나의 시선에서도 벗어났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 책들을 어디 기증을 하거나, 요즘 유행타기 시작한 '프리유어북 운동'에 내놔 방생을 하거나, 둘다 아니라면 다음번 이사갈 때 버려질 듯 싶다.

다음으로 이미 본 책들, 하지만 앞으로도 다시 읽을 확률이 높은 책들은 모두 한꺼번에 모아 일층은 세로로 정상적으로 세워 꽂고, 공간부족으로 인해 나머지 책들은 옆으로 뉘어 세로로 꽂힌 책들 위에 가지런히 쌓아놨다. 여기에 해당하는 책들은 <체 게바라 평전>, <선의 나침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장미의 이름>, <코드훔치기>, <오만과 편견> 등 소설, 비평, 평전, 에세이, 자서전 등 다양하다.

세번째로 아직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은, 하지만 앞으로 천천히 참고서적으로서 계속해서 볼만한 책들, 가령 코플스톤의 <그리스 로마 철학사>, <합리론>, <경험론>라든가, 요한네스 휠스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플라톤의 <국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등 주로 철학사에 해당되는 책들이다. 이렇게 분류된 책들은 나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책상 위에 나란히 꽂혀있다.

마지막으로, 위 세 가지 유형에 속하지 않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나의 책상에 붙은 책꽂이 이층과 삼층, 그리고 옷장 옆에 있는 4층짜리 조그마한 책꽂이 이층부터 사층까지를 점하고 있다. 책욕심이 많은지라, 게다가 책과 음반은 반드시 사서 읽고 들어야한다는 생각에 그때그때 읽고픈 책들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까지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 음반이야 편안히 앉아 혹은 누워서 들리는대로 들으면 그만이지만, 책은 능동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탓에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읽지 않고 꽂아두고, 또다시 다른 책을 구입하는 행각을 반복해왔다. 지금은 자금난으로 그런 습관적인 행동조차도 조심스럽지만 군입대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탓에-그나마 한 아르바이트도 두달이 안되지만-그 돈을 모두 책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책들로는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제국>, <성의 역사>, <정의론>, <미국의 민주주의>, <불가사리>, <1968년>, <레닌> 등이 있다. 대부분 읽기 까다로와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보면 졸리는 딱딱한 책 중에서도 더욱 딱딱한 책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선뜻 꺼내읽지 않고 그저 눈요기감으로 바라보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젠 하나하나 꺼내 읽어야지. 하지만 하루하루 서점에 진열되는 신간서적에서 눈을 뗄 수는 없는 터라 아주 가끔은 그들 중 하나를 집어삼켜야겠다. 아무리 자금난이라하지만 그 신간서적들이 내 손에 닿지도 않고 진열대에서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일은 도저히 두고볼 수가 없다. 마치 이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대단한 책벌레인양 비쳐진다. 이럴 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많이 읽지는 않는다." 어쩌면 난 책읽기를 즐기기보다 책수집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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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리주의자 밀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배고픈 인간이,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라는 말의 원형이다.

공리주의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벤담을 필두로 한 양적 공리주의와 위에 언급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인데, 벤담은 쾌락은 오직 한 가지며, 질적차이는 없고 양적 차이만 있다는 주장을 하고, 밀은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된 밀의 문장은 질적인 쾌락을 추구하자는 주장의 다른 말이다.

흔히 '쾌락주의자' 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날라리다. 과거의 고급날라리의 대명사 '오렌지족', '낑깡족' 등이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음식, 그리고 밤바다 원나잇스탠드를 즐기는 그들이 '쾌락주의자'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벤담식 쾌락주의고, 그와 다른 밀의 쾌락주의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밀의 소크라테스와 돼지에 비유된 발언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무게가 들어가 있다. 물질을 향유하기보다 정신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식의 쾌락주의자들로는 아마도 산사의 스님들을 비롯한 정신수양에 힘쓰는 종교인들, 배굶는 생활을 하지만 진리를 위해 바른 소리를 내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들을 비롯한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벤담보다는 밀에 매우 가까운 놈인 것 같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설프게나마 그려본 나의 미래 가정을 이끌어갈만한 약간의 여유가 있는 재산만 주어진다면 나는 진리를 위해, 문화예술을 위해 살 의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유있는 재산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마도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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