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 병역거부자 30인의 평화를 위한 선택
전쟁없는세상.한홍구.박노자 지음 / 철수와영희 / 2008년 6월
절판


"공산주의자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그 선한 마음에 호소해야지 폭력을 쓰면 안된다. 폭력은 하나님과 인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함석헌)-20쪽

각종 군사훈련은 직접적인 살상행위는 아닐지언정 살심을 유발하는 행위임에는 분명했습니다. 제가 진정 두려웠던 것은 급박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현되는 폭력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위기 상황에서 직간접적 폭력 행위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유발되도록 쉴새없이 주입받고 훈련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태양)-44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창살 아래 매어둔다고 해서 지금껏 지켜온 그들의 신념이 바뀌고, 삶의 방식이 변화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의 오랜 전통만 보더라도 인간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은 사회적 격려와 강제적 교화를 통해서는 결코 '교도'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고난받고 상처입은 이웃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동참함으로써,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책임감과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병역거부자들의 삶이 과거보다 더욱 성숙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도'가 아닐런지요. (오태양)-49-50쪽

아무리 설명을 하고 또 해도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그래서 정말 당신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어떤 충격적인 경험이라도 했느냐?"라고 되풀이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던 적이 몇 번 있다. 사실이 그랬다. 마치 신내림을 받듯이 결심을 한 게 아니었다. 더더구나 대단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앎이 곧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틀렸지만 적어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이론과 실천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나에겐 언제나 당위처럼 느껴졌다. 내게 만약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질문을 던진 사람들에게 내면 깊숙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경험과 지식의 퇴적층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공감대를 불러 일으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나동혁)-69쪽

저희들이 말하는 '평화주의'는 단순한 평화 애호도 아니고 이기심이나 방관이나 무기력도 아닙니다. 전쟁에 정의는 없습니다. 전쟁의 바탕이 되는 모든 유무형의 폭력에 '비폭력'으로 일관되게 맞서 싸우는 신념이 '평화주의'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상과 꿈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사태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분쟁지역 난민 구제, 평화 재건, 국가 간 빈부격차를 비롯한 불평등 해소, 평화교섭의 중재와 실현, 양심의 자유 인정, 평화교육 확산 등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이 태산입니다. 그 모든 노력을 멀리하고 하필 우리는 파병을 선택했습니다. 군사력 행사는 가장 최악의 선택입니다. (나동혁)-84쪽

저는 이제 제가 아는 것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견디고 이겨내 보려고 합니다.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그 길이 낯설고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길을 묵묵히 가려고 합니다. 아직도 저를 말리셨던 부모님의 눈물이 생각나고, 제가 없느 동안 부모님이 견디실 시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군사훈련을 받는 것은 저의 자아를 모두 파괴하는 일입니다. 평생이 지나도 못 지울 상처를 드리는 자식을 용서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비록 부모님의 고통을 밟고 가는 길이지만 이 길이 폭력과 전쟁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길이라 믿으며 병역을 거부하겠습니다. (임재성)-123쪽

"막가자는 세상은 다소 고단하고 지친 나를 가르친다. 현실의 삶 속으로 더 녹아들라고, 긴 호흡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성찰하라고 한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철도노동자 황하일의 칼럼 <변절에 대하여> 中, 한겨레21 제635호)-158쪽

"당신이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세상을 부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순응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더 대담해지고, 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중국 영화감독 지아장커)-159쪽

만연한 군사주의와 폭력 속에 획일적인 방향만이 강요되고, 서로 간의 차이는 차별로 존재하고, 소수자는 배제시켜 나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차이를 다름으로 인정하고, 서로간에 개성을 존중하고 같이 살아가는 법을, 자신과 다른 사람과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바꾸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삶의 양태를 바꾼다는 것이므로, 일상 속의 작은 실천들을 하나씩 모아나가면 어느 새 우리 삶의 문화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 역시 거창하고 큰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행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저도 제가 지금 위치해 있는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하려고 합니다. (조의정민)-182쪽

"현실적으로 '영구평화'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차라리 평화를 기원하기보다 아득한 정망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약자, 못 가진 자들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쪽을 택하겠다."(김재명,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187쪽

군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지닌다. 그런데 국방의 의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간단히 병역의무와 동일하게 여겨지고, 총을 들어야만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평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으면서 동시에 총을 들고 합법적으로 살인기술을 배우는 이율배반적인 곳이 바로 군대다. 총은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총은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총을 든 자의 폭력성을 불러일으키거나, 만들어낸다. (중략)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긴장감과 불안한 정적은 평화가 아니다.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일 뿐이다. (안홍렬)-199-200쪽

"최면을 가장 걸기 힘든 두 집단은 노인과 현역으로 군대를 제대한 한국 남성이다. 최면을 걸기 위해서는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좋아야 한다. 한국처럼 아주 후진적인 군대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안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신의 일부를 거세당하는 것이다."(한 최면 전문가)-226쪽

김대중 대통령은 10월 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병역의무의 기피는 우리 현실에서 어떤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고 형평에도 맞지 않다"면서 "일부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기피를 주장하며 다른 방식으로 봉사하겠다고 한다"면서 "그러나 군대 대신 다른 방식의 봉사를 용납하면 누가 군대에 가려고 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비록 "처벌만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하는 했으나, 인권 대통령을 표방한 그가 ‘양심적 병역기피’라는 희한한 신조어를 만들어가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한홍구)-322쪽

대체복무제도 문제는 병영문화 개선대책위 차원을 넘어서서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수용해야 한다는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는데, 군이나 국방부, 병무청은 나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국방부 등의 입장이 최종적인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보겠지만, 국방부 등이 아직 최종 입장을 내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대통령 개인의 소신으로 두고 있다. 국회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꼭 필요하다면 국방부 등을 설득하겠다. 그러나 당장은 국민적 논의가 중요한 것으로 보이니, 좀 두고 보면서 했으면 좋겠다. 어느 경우에나 국방력 약화나 군 복무자에게 박탈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정치적 결단은 좀 미루면서 군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같이 노력하도록 하자. (노무현 前 대통령)-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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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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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정밀과학, 응용과학, 의학, 문학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그 개념이 애매하건 명확하건, 또는 도덕주의자이건 맑스주의자이건 상관없이)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입니다. -14쪽

모든 실천은 몇 가지 계기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행위란 아직 없는 것(도달해야 할 목표를 말합니다. 즉 최종 분석을 거친 후에 그 분석에 의거해서 삶을 다시 일구어내기 위하여 상황 속에 최초로 주어진 것들을 재배치하는 것)을 위하여 지금 있는 것(변화시켜야 할 상황으로 주어진 현실의 장)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또한 긍정을 동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정 속에서 우리는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서 아직 없는 것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직 없는 것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있는 것을 드러내는 파악 작업은 가능한 한 정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파악 작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이미 주어진 것 속에서 찾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재료에 요구되는 강도는 그 재료가 현실적으로 틀림없이 견디는 압력의 실제 정도를 따라서 정해지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실천은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극복하며, 현실을 보존하는, 그리고 현실을 미리 앞서서 변경하는 실천적인 지식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쪽

따라서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실천적인 진리(자기의 모든 규범까지 포함한 실천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와 지배 이데올로기(자기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까지 포함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물론 이 깨달음이 실재적인 깨달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 깨달음이 우선은 지식인에게 있어서 그의 직업 활동과 기능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이처럼 개인적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깨달음은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깨달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이 깨달음은 계급 간의 싸움을 드러내는 깨달음입니다. 또한 이 깨달음은, 지배계급이 자기의 사업을 위해 필요로 하는 진리가 한편에 있고, 지배계급이 자기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계급에게 주입시키길 원하며 그 유지를 위해 애쓰는 신화, 가치, 전통이 다른 한편에 있다고 할 때, 바로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유기적인 싸움을 지배계급의 한복판에서 드러내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53-54쪽

실제로 지식인이 사회 전체를 객관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사회 전체를 지식인 자신 속에서 지식인 자신이 지닌 근본적인 모순으로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식인이 지식인 자신을 단순하게 주관적으로 문제 삼는 일에만 만족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지식인 자신을 만들어낸 정의된 어떤 한 사회 속에 정확하게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59쪽

지식인의 사유는 끊임없이 사유 그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사유는 이 되돌아봄을 통해서 언제나 사유 그 자신을 특이한 보편성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3쪽

지배계급의 영향을 받아 지식인 자신 속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및 프티부르주아적 사유 방식과 감정을 필연적으로 재생산하는 바로 그 지식인 자신의 계급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 -64쪽

지식인은 그의 조사를 모든 수준에 걸쳐서 실행하며 또 자신의 사유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수성에 있어서까지도 스스로를 변경시키고자 시도합니다. 이 말은 곧 지식인은 가능한 한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타인들에게서 인격의 진정한 합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 인간 각자가 자신의 활동에 부과된 목적의 회복(이렇게 회복될 때 그것은 이제 또 다른 목적이 될 것입니다)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 그리고 외적으로는 계급 구조가 낳은 사회적 금기를 제거하고 내적으로는 심리적 억압과 자기비판을 제거함으로써 소외 현상을 없애며 사유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7쪽

진정한 지식인은 그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점에서 자기가 도덕주의자도 아니요, 이상주의자도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어 그는 베트남의 유효하면서도 유일한 평화는 눈물과 피의 값을 치러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그 평화는 미군의 철수와 폭격의 중지에 의해서, 따라서 미국의 패배에 의해서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지닌 모순의 본성 때문에 진정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 속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갈등은 모두가 다 - 그것이 계급 간의 갈등이든 또는 국가 간의 갈등이든 또는 인종 간의 갈등이든 상관없이 -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특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진정한 지식인은 그 자신이 곧 피억압자임을 의식하고 있는 피억압자라는 점에서 결국 그 또한 피억압자의 편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75-76쪽

지식인은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 이것이야말로 그가 가진 모순 중의 하나입니다 - 그는 다른 사람들 또한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고유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체계에 의해서 이 목표가 끊임없이 도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는 지배계급에까지 확장되어서 나중에는 지배계급의 구성원들마저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목표를 위하여, 즉 근본적으로 이익을 위하여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고유의 모순이 결국에는 객관적인 모순의 특이한 표현임을 깨닫게 된 지식인은 이러한 모순에 맞서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77쪽

지식인과 함께하는 사람의 수가 얼마인가는 지식인이 하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지식인 자신의 모순 속에서 사는 일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급진주의를 통해(즉 진리의 기술을 환상과 거짓에 적용함으로써) 지식인 자신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지식인은 이처럼 그 자신이 지닌 모순 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105-106쪽

롤랑 바르트는 글쟁이와 작가를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합니다. 작가는 공통의 언어의 수호자이지만, 그는 글쟁이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며, 또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비-기표로서의 언어 또는 정보 왜곡으로서의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의미 작용과 비-기표를 수단으로 취하면서, 단어의 물질성에 의거하는 작업을 통해 그 어떤 언어 대상을 생산하는 장인인 것입니다. -122쪽

글을 쓰는 것이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적 대상은 언어를 넘어선 소통과 같은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비록 단어들에 의해서 생산되었지만 다시 단어들에서 의해서 닫혀진, 의미 작용을 하지 않는 침묵을 통해서 문학적 대상은 언어를 넘어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적 이야기입니다."라는 말은 곧 "당신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위하여 말을 합니다."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제 문학적 대상이 독자와 소통해야 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바로 이 침묵하는 비-지식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탐구를 위한 방법은 유일합니다. 그것은 곧 문학작품 속에서 의미 작용을 하는 내용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내용을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인 침묵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123-124쪽

작가가 왜 공통의 언어의 전문가인지, 즉 최대한의 정보 왜곡을 내포하는 언어의 전문가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물음을 통해서입니다. 단어는 우선 세계-내-존재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단어는 희생된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어를 넘어서 단어의 의미 작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때 단어의 의미 작용은, 일단 그 의미 작용이 한번 이해된 후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즉 다른 단어와 함께 표현될 수 있는 다가적(多價的)인 언어도식이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단어는 물질적인 실재성이기도 합니다. 단어가 단어 자신에게 부과하는 객관적인 구조, 의미 작용을 희생시켜가며 언제나 단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은 이와 같이 단어 그 자체가 물질적인 실재성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중략)(계속)-141-142쪽

(이어서)

작가가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다면, 작가의 이 선택은 단어가 지니는 이와 같은 물질적인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바로 이 물질적인 무거움 때문에 한 선택입니다. 작가의 예술은, 가능한 한 정확한 의미 작용을 단어로부터 빼내어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단어의 물질성 위로 끌어들이는 것, 그리하여 의미가 주어진 사물이 단어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로 그 단어의 물질성 속에서 육화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143쪽

언어는 한편으로 보면 우리를 동일인으로서, 즉 의도적으로 소통하는 주체로서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언어가 우리를 동일인으로서 연결시키는 한에 있어서, 언어는 또한 타인으로서의 나를 타인으로서의 다른 사람에게 연결시킵니다. 작가의 목적은 결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적은 오히려 이 역설적인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의 언어-내-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에 대한 표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145쪽

작가의 참여는 공통의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 왜곡의 부분을 활용함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것(체험된 세계-내-존재)을 소통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또 작가의 참여는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전체성과 전체화 사이에서, 세계와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내-존재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이처럼 작가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성과 보편적인 것의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중략)(계속)-156쪽

작가는 자신의 내적인 과업 속에서, 지평선상에서 삶을 확인하는 보편화를 암시해가면서 그 자신이 직접 체험의 차원 위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처럼 우연히 지식인이 된 게 아닙니다. 그는 본래부터 지식인인 것입니다. 작품 그 자체가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벗어나서 이미 다른 지식인이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실천-이론적 차원 위로 옮겨 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작품은 우리를 짓누르는 세계 내에서 존재를 - 비-지식의 차원에서 -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품은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삶을 체험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자 다른 모든 자유에 호소하는 그 어떤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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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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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늘 한 우물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사실 중요한 지식을 보더라도. 그건 언제나 피상적이라고 믿고 있네. 심원한 것은 진리가 있는 산 정상이 아닌 진리를 찾는 과정에 놓여 있지. 이런 종류의 실수는 천체 관측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네. 망막 중심보다 약한 빛에 더 민감한 망막 가장자리를 별로 향하게 하여 곁눈으로 별을 보는 것이 별을 분명히 보고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네. 빛은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에 비례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니까. 똑바로 쳐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빛의 양은 매우 많지만 곁눈질을 해서 보면 더 민감해질 수 있지. 지나친 통찰력은 우리를 혼란시키고 사고력을 약화시키지. 금성도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중해서, 지나치게 똑바로 지켜보면 사라지는 법이네." (『모르그 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19쪽

『흠흠신서』의 '흠흠(欽欽)'이란, 삼가고 또 삼간다는 뜻이다.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공정하게 양쪽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그리고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서 진실에 보다 가까이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산 선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법의 원리다. -262쪽

"논리적인 사람은, 바다를 보거나 폭포 소리를 듣지 않고도 한 방울의 물에서 대서양이나 나이아가라 폭포의 가능성을 추리해낼 수 있다. 그래서 인생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사슬이 되고, 우리는 그 사슬의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셜록 홈즈)-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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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구판절판


독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민들이 그를 참고 견디는 만큼, 독재자는 그들에게 동일한 정도의 해악을 저지른다. 따라서 인민들이 모든 해악을 감수하지 않고, 무조건 참고 견디는 태도를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독재자는 인민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이다. 실제로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기이하지 않는가? 수백만의 사람들은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강요당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인민들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자의 명성에 홀리거나 그의 마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홀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신비로운 특성을 도외시하면 그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하지 않는가? -14-15쪽

인민이 이와 같은 억압에 이끌리는 태도는 비겁함이고 명명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 역시 겁쟁이들이고 졸장부들인가? 만약 두세 명의 사람들이 독재자의 모든 폭력 행위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있을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용기의 결핍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유일한 한 사람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저항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굴욕이고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17쪽

인민 가운데 누군가 자유를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고귀한 목적인 자유의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려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그러한 모험을 권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인민 전체의 동물적 신분이 보편적으로 고유한 신분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 각자에게 커다란 용맹심을 발휘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정도로 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인민들은 제각기 고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권력에 봉사하느냐, 저항하느냐 하는 물음은 결코 개개인이 제각기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24쪽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그저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만 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왔다. 실제로 언젠가는 반드시 자유를 쟁취해야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땅의 인민들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라도 깨달아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는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다만 우연히 수동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일단 자유를 느끼면서 누리는 행복감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자유에 대한 열망조차 지니지 않은 나라의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행복감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쉽사리 포기할 것이다. 자유란 오로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계속)-24-25쪽

그렇다, 폭군은 사람들이 모시고 떠받들기를 그만둔다면, 즉시 스러져버릴 것이다. 폭군으로 하여금 더욱 많이 먹게 하면 해줄수록, 더욱 약탈하여 삼키게 하면 그렇게 해줄수록 그는 더욱더 강력하게 된다. 폭군은 그를 모시는 인민들에 의해서 점점 더 강해지고,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다. -25쪽

겁쟁이나 바보는 불행을 간파하거나 행복을 획득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들이 끝내 성취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개인적 욕망에 불과하다. 이들은 천성적으로 걸핏하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무엇만을 차지하려고 한다.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이러한 개인의 욕망이 내면에서 자유를 열망하는 어떤 힘을 배척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신중한 자와 변덕스러운 자, 용기 있는 자와 비겁한 자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하며, 선을 바란다. 그러나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26쪽

동물이라 하더라도 너희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그따위 짓은 참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차제에 우연히라도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한다. 오로지 자유롭게 되려는 욕구를 마음속에 지녀야만 즉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자유에 대한 욕구와 의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재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라. 너희들은 자유롭게 되 것이다! 그를 창으로 찌를 필요도 없고, 뒤엎을 필요도 없다. 다만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 그러면 너희는 조만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토대가 사라지면, 독재자는 마치 제 무게에 못 이겨 저절로 붕괴되어, 산산조각 나는 거대한 입상처럼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을. -29쪽

"참주는 세 가지 사항을 추구한다. 첫째로 그는 인민들을 소심한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심한 자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참주는 피지배자들 스스로 불신하도록 그들을 이간질시켜야 한다. 몇몇 중요한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게 되면, 참주 체제는 위태롭게 변한다. 따라서 참주들은 지배에 해를 끼치는 자들보다도 더욱 혹독하게 고결한 지조를 지닌 자들과 싸워야 한다. (...) 셋째로 참주는 누구에게도 권력의 수단을 이양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 수단 없이는 주어진 폭정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라 보에티, Von der freiwilligen Knechschft)-30-31쪽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허용했음을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주어진 사회에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36쪽

자고로 인간은 여태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무엇 때문에 한탄하지는 않는 법이다. 만약 과거에 겪었던 찬란한 기쁨의 삶을 기억한다면, 인간은 주어진 불행을 제대로 의식할 수 있다. 만일 과거로 사라진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현재의 좋지 못한 상태는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인지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인간은 본성, 기질, 천성에 의해 자유로우며, 자유롭게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교육에 의해 배워온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받고 익숙하게 된 모든 일들은 마치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일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어느 한 사람의 임의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인간의 기질이나 본성은 처음부터 상대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변하기 어렵고, 천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선입견이 아닐 수 없다. (계속)-56쪽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안장이 등에 얹힐 때, 말들은 난폭하게 이를 팽개치지만, 길들여진 다음에는 안장을 단 채 경쾌한 걸음으로 걷는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불행한 삶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의무를 위한 삶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로써 독재자의 소유권은 더욱 공고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 집권은 어떠한 부정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부정한 짓거리를 확대시킬 따름이다. -56쪽

역사를 탐구하는 자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순수한 용기와 곧은 정신으로써 나쁜 지배자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려고 한다면, 거사는 항상 성공한다는 사실 말이다. -59쪽

인간이 자유를 잃으면, 용기 또한 상실한다. 노예로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투쟁 욕구도 없고, 강인함도 없다. 독재자는 일반 사람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얼마든지 그들을 괴롭힐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완전히 경직되어 있으며, 자유의 불길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 원래 자유를 품은 사람은 어떠한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고귀한 명예를 위해서 장렬하게 자신의 몸을 바치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유로운 인간들은 고결하게 투쟁하며 싸워 나간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만인과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각자 싸운다. 그리하여 그들은 패배의 불행 혹은 승리의 행복을 서로 나눈다. 이에 반해서 노예들에게는 투쟁의 용기도 없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살아 있는 희생적 충동력도 없다. 노예들은 소심하고, 나약하며, 위대하게 행동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 독재자들은 이를 분명히 꿰뚫어보고 있으리라. 만약 인민이 노예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다면, 독재자는 그들을 더욱더 느슨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조처를 취할 것이다. -64-65쪽

오늘날에도 권력을 지닌 자들은 마구잡이로 불법을 자행하면서, 이른바 공공의 안녕, 인민을 위한 허울 좋은 "모델"로써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짓거리는 옛날의 그것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71쪽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악을 가한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그저 참고 살아간다. 이 사실에 대해 독재자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종교의 배후에 숨기 때문에, 신성의 끝자락은 교묘하게 감추어진다. 이를 통해서 비열한 압제자들은 마치 어떤 신적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 -73쪽

독재자는 인간적 기쁨, 우정 그리고 사랑을 누릴 수 없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현명한 철학자를 두려워하고, 양심 있는 자를 증오해야 한다.
(<히에른>에서 크세노폰이 독재자의 입장에서 심적 상황을 묘사한 부분을 라 보에티가 요약)-77쪽

한마디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자고로 인간의 신체에서 나쁜 피는 항상 곪아가는 상처 부위로 집결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왕이 전제 정치를 행하면, 그의 주위에는 온갖 쓰레기 내지 거품과 같은 인간들이 모인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소인배, 혹은 속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불타는 공명심과 놀라운 탐욕으로 독재자를 도우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착취한 이득의 일부를 얻을 수 있으며, 거대한 독재자 아래에서 작은 폭군들로 군림할 수 있다. -85-86쪽

오히려 그들은(신하 : 전제 군주의 추종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당하면서도 저항할 줄 모르는 자들만을 골라 불법을 저지르곤 한다. 이들은 인민을 억압하고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이득을 창출해 낸다. 이러한 짓거리를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독재자를 향하여 칭송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더러운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깜짝 놀라곤 한다. -87쪽

배우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자! 위를 향하여 응시하자! 우리의 명예를,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을 깨닫고, 우리의 오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신은 저 아래의 전제 군주와 그 패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형벌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즉 선량한 자와 신의 은총을 받는 자라면 누구든지 폭정을 가장 저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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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하재근 지음 / 포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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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서민이 자기 자식을 위해 족집게 사교육을 선택하려 합니다. 족집게 사교육의 가격은 300만 원입니다. 한데 그 서민은 30만 원밖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 서민은 어쩔 수 없이 30만 원짜리 동네 보습학원을 선택해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서민의 자식은 일류대를 선택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류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은 특목고를 선택하고 싶었음에도 일반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그 서민의 이익은 증진되었습니까? 이 거래를 자유로운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계속)-93쪽

그런데. 시장주의는 이런 거래조차도 자유로운 거래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므로 그 서민의 자식이 삼류대를 선택한 것은 그 서민과 그 자식의 자업자득이 됩니다. 그 서민은 소비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난과 특권이 소비자 주권의 이름으로 자업자득이 되어 사회를 양극화하고 불평등이 정당화됩니다. 여기서 대학서열체제는 다수 국민에게 삼류가 아닌 정상적인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작동하는 장치가 됩니다. 주주(학교)는 소비자 선택을 위해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이익(서열)을 취하면 그뿐입니다. 부자 소비자(특목고생)를 위한 귀족상품(일류대), 가난한 소비자를 위한 삼류상품(삼류대)을 진열해 돈을 지불하는(능력이 있는) 소비자에게 팔면 그뿐이지요. -93쪽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할 때, 자신의 사적 이익을 버리고 공적 이익을 추구할 때에야 인간 정신은 존엄성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존엄하다고 치고, 악독해질 가능성보단 존엄해질 가능성을 끊임없이 조금씩이라도 높여가는 것이 인간사회의 발달입니다.

오직 이런 사회에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해집니다. 모든 시민이 자기 욕심만 차리려고 들면 사회는 투견장이 되겠지요. 시민이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 개인의 관심사가 아닌 공동의 관심사에 힘을 쏟을수록 그 사회가 민주적으로 성숙해집니다.

또 저마다 자기 욕심만 차리려는 '콩가루 사회'는 경쟁력도 형편없겠지요. 전체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 내 욕심만 차리려 '삥땅'치지 않는 마음. 나 혼자 편하겠다고 건성건성 일하지 않는 마음.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가 훨씬 경쟁력 있고 강한 사회가 됩니다.-137쪽

결국 일류학교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특목고 증서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주장도 딴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 특목고가 늘어나면 결국엔 경쟁률 하락, 미달, 학력 저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닙니까? 여기저기 마구 만들어놓음녀 일률학교는 더 이상 일류학교가 아니라 보통 학교일 뿐입니다. 이 뻔한 사실을 무시하면서 온갖 전문가들과 언론, 정치인들이 여기저기에 일류학교를 마구 만들겠다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들은 운영의 자율성을 받아 입시교육에만 열중할 것이므로 이 나라에서 교육은 더더욱 파탄이 나고, 학교 운영의 자율성은 반드시 교원 비정규직화와 연결되므로 우리 아이들은 교사가 아닌 강사들에게 배우게 되며, 등록금만 치솟아 일류학교를 원하는 모든 중하층 학부모의 욕망이 짓밟힐 것입니다. (계속) -177쪽

애초에 중등부문을 '다양화, 자유화, 선택권 확대'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뒤집어야 합니다. 고교 평준화를 지키면 뒤집히나요? 사교육비 약간 줄어드는 것 말고는 본질적으로 뒤집히는 것 없습니다. 고등교육입시제도를 엎어야 합니다. 대학 평준화나 그에 가까운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진 온갖 미사여구를 동반한 교육개혁이 모두 '사기'치는 '쇼쇼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와중에 각 교육청들은 특목고를 더 많이 만들겠다며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178쪽

우리가 기업을 주주들에게 탈취당한 것처럼 어느 날 학교를 기업가 정신에 탈취당합니다. 탈취당한 기업이 국민을 '비용'과 '소비자'로만 생각하는 것처럼 학교는 노동자(교사)를 '비용'으로, 학생을 '소비자'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교라는 기업가가 추구할 이익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돈을 벌 수 있겠지요. 학교 입장에선 재벌학교가 되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학교가 추구하는 이익의 본질이 아닙니다. 학교가 추구하는 이익이란 바로, 명성, 지위, 권력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이익이 많이 쌓이면 재벌학교는 사후적으로 됩니다. -181쪽

학교의 명성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학교의 서열을 말합니다. (중략) 입시경쟁은 학교서열에서부터 발생합니다. 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을 가지란 것은, 마음껏 입시경쟁을 하여 서열을 따먹으란 소립니다. 당연히 입시 경쟁이 가중됩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내걸었던 입시경쟁 완화란 명분도 새빨간 거짓말 쇼쇼쇼였습니다.

학교가 이렇게 서열이란 이익을 따먹으면, 자기야 일류학교, 귀족학교가 돼서 좋겠지만, 우리 국민은 입시경쟁의 심화를 감수해야 합니다. 게다가 돈 없는 집 자식은 입시경쟁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당합니다. 결국 신분 대물림 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일류학교가 생김으로써 다수 일반학교들은 삼류학교로 전락합니다. 중소기업처럼 되는 것이지요. -181-182쪽

1. 중등교육까지만 공교육으로 하면 교육의 기회 균등이라는 공교육 본래의 취지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등교육도 공교육으로 규정해야 한다.
2. 원칙적으로 교육기관을 경제적 효율성 원리로 운영해선 안 된다. 지나친 경제적 효율성은 경제부문에서조차 폐해를 불러온다. 교육은 경제적 효율성 원리가 아닌 공공성 원리로 운영해야 한다. 경제부문과 공공부문, 교육부문을 분리해 전혀 다른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적나라한 자본주의, 스스로를 파괴하는 약육강식 시스템의 폐해를 시정할 수 있다. 그래야만 부강한 나라가 된다. (계속) -217쪽

3. 대한민국의 발전전략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지금은 지식, 학문, 교육에 투자를 집중해야 할 단계다. 어차피 땅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을 석유로 만들어야 한다. 즉 고부가가치형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산업 전반이 고부가가치형으로 혁신된다. 이 책 전반부에서 살펴봤듯이 우리의 산업 발전사는 시장원리에 대한 지난한 투쟁사라고도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시장원리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장은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산업성장을 막으려고 했었다. 시장이 저절로 우리의 산업경쟁력을 만들어주지 않았듯이, 지식경쟁력도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국립대를 발전의 용광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가는 교육을 자유화, 시장화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결과 첫째 몸통에서 살펴본 경제사회 파탄의 구조가 교육 부문에 그대로 재현된다. 교육시장화의 핵심 고리인 입시시장을 폐쇄하고 시장거래(선택,선발)권을 몰수해야 한다. 고등교육기관을 시장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해(개방철폐) 공교육화하는 것이 국가 재도약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217-218쪽

대학서열이 존재한다는 건 가치기준이 단 하나라는 말이빈다. 바로 성적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은 가치기준 하나에 맞춰 획일적인 공부를 합니다. 그 한 줄 서열에 맞는 한 줄 석차를 가리기 위해서지요. 저마다 공부하는 내용이 다르면 한 줄 석차를 가릴 수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추구하는 대학 특성화도 대학서열체제에선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의 가치와 특성화(다양한 가치)는 공존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서열체제 아래에서 감행된 그 모든 다양성, 창의성 교육개혁들은 교육을 공황상태로 밀어넣었을 뿐입니다. 한 줄 서열과 다양성, 창의성이 충돌하기 때문에 결국 다양성도 창의성도 죽고, 다양성이니 창의성이니 하는 것이 가진 복잡성과 유연함을 파고든 건 부자들의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개혁이 진행될수록 교육격차가 심해진 것이지요.-271-272쪽

지금처럼 폐쇄적인 대학체제로는 우리나라는 영원히 인간성에 개방될 수 없습니다. 시장에 개방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에 개방된 교육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준화된 개방 고등 교육체제입니다.

만약 평준화된 국립대가 각 지역에서 지역발전의 심장 역할을 한다면? 양극화, 국민 노예화를 강제하는 입시경쟁이 상당부분 완화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민족 상황이 신분격차가 아닌 문화적 다양성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수직적 위계화가 사라지면 수평적 다양성과 창조성이 만개하는 것이지요.-288쪽

대학 평준화는 소비자가 대학을 선택할 자유를 양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소비자들로부터 고등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몰수한 것이 고교 평준화입니다. 이것의 본질은 강자가 일류고를 선택할 자유를 몰수한 것입니다. (중략)

자유화 개혁은 자율화란 이름으로 각 대학에게 선발 자율권을 줬습니다. 그러자 대학서열체제가 심화되고 나라가 망국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즉 각 대학의 선발 자율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대학서열체제가 심화되고 나라가 망하는 흐름입니다. 선발 자율권을 없앤다는 것은 대학별 커트라인을 없앤다는 겁니다. 대학별 커트라인이 사라지면 이 책에서 열거한 그 수많은 폐해들도 함께 사라집니다.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선택할) 자유를 양도하고, 공급자인 대학은 공급자대로 (선발할) 자유를 양도해 각자의 이기심을 포기하는 겁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나의 배타적인 이익 추구를 포기한다는 연대정신으로만 가능합니다. 거꾸로 연대의 제도를 먼저 만들면 없던 연대정신도 생겨납니다. 제도가 사회적 자본과 경쟁력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연대의 제도가 평준화입니다. -347-348쪽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내신에 의한 학생들 불안을 해소하겠다며 특목고의 상대적 불이익 해소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내신을 안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신강화는 특목고 등 일류고를 향한 창인데, 특목고 불이익 해소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방패를 마련해주겠다는 소립니다. 아니, 방패 수준을 넘어 창 자체를 무력화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지방민, 일반 국민들 자식은 수능, 논술에 내신까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혀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데 반해, 특목고의 중상층 자녀들은 내신에서 해당돼 수능, 논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놀랄 만큼 냉혹하고 잔인한 나라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369쪽

차등내신
성적이 비슷하게 분포된 학교는 내신 부풀리기 소지가 있다고 판단, 상위등급을 내리고 하위등급을 올린다는 것. 성적이 비슷하게 분포된 학교는 일류학교(특목고, 자사고)이거나 지방 삼류학교일 것. 일류학교와 삼류학교 하위권이 이익을 보고 일류학교와 삼류학교 상위권이 피해를 보게 됨. 그런데 삼류학교 하위권은 어차피 고려대에 지원할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일류학교 하위권만 이익을 봄. 피해를 보는 일류학교 상위권을 위해 고려대는 우선선발제를 따로 준비하려 했음. 결국 특목고 하위권 학생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지방 삼류고 상위권 학생을 버리는 정책이었음. 일류대들은 이렇게 복잡한 궁리를 하고 있음. 묘한백출! 눈 뜨고 코 베임 당하는 세상임. -378쪽

공화국은 그런 사태(자유를 주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느 사태)를 막기 위해 강력한 보편규제를 설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법에 의한 지배'입니다. 자유화 개혁의 법치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공화국의 법치는 적극적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크고 강력한 공화국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강자는 언제든지 규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데, 공공구너력이 약해짐녀 그 강자의 탈주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치 후한 황제가 약해지자 제후의 발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보편규제를 넘어서는 순간 공화국의 질서는 무너집니다. 후한 말의 자유는 강자가 자유롭게 보편규제를 뛰어넘을 자유였을 뿐입니다. 이런 식의 자유는 크면 클수록 시민의 자유가 위축됩니다. (계속)-404쪽

봉건시대야말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자유를 누렸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힘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강자는 귀족의 삶을, 약자는 노예의 삶을. 그들 사이에 보편규제는 없었습니다. 그런 규제를 강제할 권력주체도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분권화된 사회였지요. 각 분권화된 단위마다 강력한 리더십 주체(영주)가 있는 상태, 국가 전체로는 분권화 구조이지만 각 단위별로는 독재체제인 상태. 딱 자유화 개혁히 지금 추진하고 있는 자유시장의 구조입니다.

공화국은 이런 질서를 거부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자유를 주면 결국 지배자까지 포함해 모두를 노예로 만들테니까요. 왜냐하면 본래적 의미의 공화국이란 예속당하지 않을 자유뿐만 아니라, 남을 예속시키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견 자유롭게 보이는 지배자들마저 진정한 공화국의 시각에선 모두 노예들일 뿐입니다.-405쪽

나 하나만의 자유뿐만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염두에 두는 것은, 나의 정신이 나라는 육체적 유한성, 개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두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게 됩니다. 부자들이 제 자식만 귀족 만들겠다고 학교 선택권 요구하고, 입시 자율화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 유한성, 개체성, 탐욕이란 감옥에 아직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노예입니다.-405-406쪽

원리적으로 공화국은 국민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으로부터 신분을 선택할 자유를 몰수합니다. 이 근원적인 자유를 몰수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이 아니지요. 그 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남에게 예속될만큼 빈곤할 자유. 둘째, 신분이 세습될 만큼 불평등한 교육을 받을 자유. 이 두 가지입니다. 공화국이 나로부터 이 두 가지 자유를 몰수하는 것이 내가 시민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부자가 남을 예속시킬 자유, 지배신분을 세습할 자유까지 몰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의 정책에서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고용보장, 혹은 사회복지. 소득 격차 조정, 혹은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 자산가(소유권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발언권과 결정권 보장.
둘째, 평준화 무상 공교육(학교선택권 몰수)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춘 나라만 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로부터 절대적 자유를 몰수하고 보편규제를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공화국이 날 자유인으로 대접하는 방식입니다. 무제약적인 자유를 주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닙니다. -408쪽

공화국은 권리에 정의를 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권리는 각자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롭게 놔두며 힘센 사람일수록 큰 권리를 누리겠지요. 정의를 더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한 권리를 누리도록 국가가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양도할 수 없는 천부적 인권'의 경우, 어느 누구도 그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이지요. 또 산업부문에서 현대자동차가 부품을 자유롭게 만들거나 사서 쓸 권리와 중소기업이 생존하고 발전할 권리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개입하는 것이 정의이고, 계몽의 빛입니다. 자유화는 이것을 시장에 맞깁니다. 이렇게 되면 자유만 있고 이성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성이 없는 자유는 공화국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화 개혁은 이런 국가 이성을 독재나 부패, 부자유를 초래하는 규제로 인식했습니다. 그 결과 계몽의 빛이 꺼진 자유만 남게 됩니다.-412쪽

"돈이 많다고 해서 고품질의 고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소비문화에 관한 한 네덜란드는 교과적인 사회주의 사회처럼 느껴질 정도다. ...... 과소비와 사치, 게으름, 거친행동, 이웃의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종의 적대감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고 민주보다는 공화의 가치를 앞세운다. 모든 사람이 화합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공화이다. ...... 네덜란드인이 누리는 자유와 관용은 공화와 사회정의의 틀 안에 있는 것이지 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돈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잔소리냐" 하는 말이 네덜란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최병권, <진보에는 나이가 없다>-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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