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정치 : 이제 소수를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4
이남석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지배 집단에게도 불이익이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없음으로 인해, 지배 집단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를 무시한 정치가 전횡적으로 진행된다면,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그 강요가 강화되면 될 수록 차이 집단은 스스로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들의 존재 이유마저도 상실한다. 결국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렇듯 차이의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위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차이를 배제함으로써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지배 집단이나 차이 집단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롭지 못하다. 이것은 특정 차이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 집단에 적용된다. 따라서 모든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억압적이며 배제적인 권력에 저항하게 마련이다. -19쪽

차이의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대부분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므로, 국민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차이는 그 정부 아래서 은폐된 채 하나의 동일성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동일성에 의해 다양한 차이는 ‘국민’이라는 통칭 명상로 통합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 점에서 차이의 정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동일성의 정치’라고 한다. -20쪽

개인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서 법적․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은 ‘동일성’으로 존재하며, 법적․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근대 정치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정치의 주체인 개인은 자연적 성이나 사회적 성, 타고난 부, 지위, 인종과 무관하다. 개인은 모두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차이와 불평등을 거부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든 인간의 구체성을 사상해버린 추상 명사이다. ‘개인’이란 말 속에는 형태상의 차이와 질적인 차이는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추상 명사로서의 ‘개인’만 남는다. (중략)
근대 정치의 주체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은 지배 권력을 구축하는 존재로서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단일 규범을 제시한다. 이 규범이 곧 지배 규범이 된다. 지배 규범이 강하면 강할수록 차이의 주체는 대다수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규범 밖의 주변적 존재로 전락한다. -22쪽

대의제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형식적 평등 아래, 차이 집단은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출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직접 대표하지 못한다. 또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성을 강조한 나머지 차이 집단의 견해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차이 집단의 대표성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로써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한계성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의 형식적 평등을 정당화할 뿐 실질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38쪽

차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진리는 의견의 무제한적인 충돌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으며, 경쟁은 조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이르기는커녕 조화도 창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는 지배 이익의 봉사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이 곧 그 사회의 주류 구성원이자 주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차이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41쪽

권력 교체의 이면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있다. 다수결의 원리는 자유토론의 보장, 다수의 소수 포용,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수결의 원리는 다수와 소수의 항구 불변을 초래하여 정당성을 잃게 된다. 소수가 자유로운 토론과 설득에 의해 다수가 될 수 없다면, 그 국가는 이미 다수에 의한 전횡 국가이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의 존재만이 전횡 국가를 막을 수 있고,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다. 상대적 소수는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다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하고,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중략) (계속)-43-45쪽

(이어서) 그러나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은 다수결의 원리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다수결의 원리의 근본적인 한계는 사회적 약자와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이들(소수)에게 ‘1인 1표’는 소수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감옥에 영원히 묶어두는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다수 가능성은 그 정치 체제의 주류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소수이고 영원한 약자이다. 어떤 조건이 변화해도, 소수는 투표를 통해 다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수가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결정에 순응하는 것은 ‘진정한 동의’가 아닌 ‘마지못한 동의’일 뿐이다. -43-45쪽

다수의 견해는 사회 내에서 보편성으로서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는 반면, 소수의 견해는 도덕적 지위를 상실하고서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마저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중략) 보편성을 획득한 집단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집단에게 보편성에 따를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고유한 정치적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소수 집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가치에 회의를 품게 되어 결국 가치의 자포자기 상태를 초래한다. -49-50쪽

하버마스는 권력과 관련된 ‘진리의 생산’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억압과 왜곡이 없는 이상적 담화 상황에서 토론한 결과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이상적인 담화 상황에 근거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진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이상적 담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루소주의적 환상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그 개인이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관점이 장애물에 가로막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견해가 각 개인의 견해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몽상이다."-66-67쪽

차이 몰이해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차이 집단의 특수성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는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며 존엄성을 지닌 주체이므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고, 존엄성을 존중받는 인간은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을 받지 않으므로 사회에 차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차이 집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차이 집단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게 된다. -75쪽

개인은 최대의 사회적 선의 실현이라고 하는 목적을 위한 대체 가능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을 보호해주며, 다른 자유의 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아미 거트먼)

국가에게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허용되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정부는 내 동료 시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동의 없이 내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아미 거트먼)-80-81쪽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의 구속을 받는 개인과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며, 이러한 공동체는 중앙 국가의 기능 중 일부를 양도받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 구현을 전제한다. 이와 같이 가정함으로써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혁명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의미 상실, 신사회 운동과 다양한 주체의 성장에 따른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탕에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깔려 있다. -86쪽

울린에 따르면 정치란 집단의 공적 권위에 유용한 자원을 둘러싸고서 조직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권력들이 합법적인 동시에 공적으로 경쟁함을 의미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인 협의에 의해서 권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될 때, 다양성으로 구성된 자유로운 사회가 공공선의 계기들을 향유할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치적인 것‘이란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의를 거쳐 하나의 공통점에 이를 수 있는 공동선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상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양한 차이 집단들이 정치적인 소외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 구성의 한 주체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90쪽

무페는 정치를 정형화된 고정체로 파악하여, 정치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통일체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페는 이러한 포괄적인 공동체와 최종 심급의 통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가정하는 어떤 정치 공동체도 그 안에 포용되지 못한 소수 집단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이익 갈등은 균형에 이르고 의견 분열은 동의에 이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균형과 동의는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적대적 행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정치는 항상 ‘갈등과 분열’로 특징지워진다.
무페는 갈등과 균열로 특징지워지는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을 제안한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사회적 성과 자연적 성, 인종, 계급, 환경 등의 민주주의 투쟁의 구체화된 범주를 수용할 수 있다. -91-92쪽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집단을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차이를 권리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로크 이후 근대 정치의 주체인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권리의 양도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천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권리는 양도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100쪽

인간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함께 결사를 구성해야만 하고, 자유 선택의 토대 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허스트)-101쪽

차이의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다.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나 동양인 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 가난한 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수 의견의 주장자라는 이유로, 기타의 이유로 권리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 집단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이익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 (중략)
이 차이 집단이 권리를 특정 정부에게 양도하는 것은 그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차이 집단과 결사 집단은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후략)-104-105쪽

차이의 정치는 집단이 정책의 피동적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집단 해방의 논리이다. 집단의 해방 논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배제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집단이 스스로 정치적 권리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배 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다. 차이의 정치는 모든 집단이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평등’이라는 등식을 본질적 의미에 더 가깝게 만든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지향적이다. -112쪽

토론은 다양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해준다. 그 결론은 다수의 견해가 모아진 것으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사회의 구성원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수결의 결과는 사회의 구성원이 수용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차이 집단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가 ‘문턱이 높은’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토론과정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들 뿐만 아니라, 토론 과정에 진입했다 해도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수용시킬 만한 결론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토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토론 과정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토론 결과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과정에서 배제된 집단이거나 차이 집단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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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읽으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 싶습니다... 한민족의 참견하는 습관,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면 쌩무시하는 무시무시한 단결력... 이런 것 정말 무섭지요. 한국도 자꾸 유목적 사고에 접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 기획의 발상부터 인간관계까지
와시오 켄야 지음,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2월
품절


편집자의 머리에 떠오른 기획이 저자의 두뇌를 통과한다. 그럼녀 누에가 실을 분비하듯 저자는 글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집필을 뜻한다. 그런데 글만으로는 명주실이 될 수 없다. 분비물을 모아 가공하고 처리해야 비로소 명주실이 완성된다. 편집공정이란 저자라는 누에를 발견하고 분비된 것을 명주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보면 된다. 저자를 누에 취급해서 실례짐나 양질의 누에 없이는 양질의 명주실을 얻을 수 없다. 가공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획과 저자는 세트다. 한몸이다. 그래서 뛰어난 저자를 발견하는 능력도 기획력에 들어간다. -63-64쪽

인터넷은 과거의 정보를 정리한 데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지식을 축적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앞으로 짜내려 하는 누에에서 어떠한 명주실이 나올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누에에 따라 달라진다. 더군다나 성격도 행동양식도 모두 다르다. 기획이란 그러한 누에를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다. 편집자가 발로 뛰는 걸 귀찮아하고, 호기심도 희박하며, 생산 현장을 겁낸다든지, 저자가 오타쿠화하면 기획은 당연히 무미건조해지고 만다. 오늘날 있으나마다g나 책이 홍수를 이루는 배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72쪽

원고를 읽을 때는 다음 사항을 늘 염두에 두자.

-의미가 있다. 학문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임팩트가 있다.
-화제성이 충분하다. 사회의 반향을 기대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읽힐 만한 근원적 주제를 다룬다.
-신선한 주제, 새로운 접근방식, 새로운 발상.
-저자가 대중성이 있다.
-오랜 세월을 들인 역작이다. 귀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문장력이 뛰어나다. -125쪽

넘치는 것은 지우고 모자라는 것은 채우도록 요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시점에 서서다. 이미 말했듯이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잊어버리는 존재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책을 사주는 독자보다 증정하는 동업자 쪽으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넘치는 부분은 동업 경쟁자에 대한 경쟁심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점(주장)과 독자가 흥미 있는 부분이 다른 사례도 많다. 편집자는 그 양쪽을 볼 줄 안다. 저자의 의견도 이해한다. 동시에 독자가 그 책을 내동댕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편집자의 실력이 요구된다. 어느 장은 빼자, 라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저자는 한번 완성된 원고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저자의 씁쓸한 얼굴을 보면 편집자도 마음이 약해지지만 타협은 금물이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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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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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살아갈 이유가 필요합니다. 힘든 순간마다 희망은 그 이유가 됩니다. 물론 그건 아주 추상적이죠. 그러나 목마른 자들에게 그건 물이고, 배고픈 자들에게 그건 빵이며, 외로운 자들에게 그건 사랑이고, 철저히 가려진 여자들에게 희망은 언젠간 자신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영화 <칸다하르>의 사히브)-181쪽

"하늘 위에서 들으면 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릴 거야. 우리가 듣는 빗소리란 건, 비가 땅에 부딪치고 지붕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치고, 그러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 우리 주위에 잠자고 있던 사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영화 <가을로>의 민주)-241쪽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영화 <가을로>의 민주)-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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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불복종 - 저항과 자유의 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5
오현철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구판절판


시민불복종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정의로운 활동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시민불복종은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법률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를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론이다.-8쪽

시민불복종은 사회적 분화 과정에서 전문화된 지식에 맹종하지 않고 보편적 인간의 휴머니즘과 상식에 의거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표출해내는 저항 의지의 한 형태다.
오늘날 사회제도에 대해 판단해야 할 정당성의 기준은 절차적 완결 상태가 아니라, 과거에 인식할 수 없었던 인간적 가치 또는 이미 인식되었지만 정의롭게 실천되지 않았던 가치를 얼마나 잘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맞추어야 한다. -9쪽

‘상실이 없는 세상은 없다’는 말은 ‘무조건 참고 살아라’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상실이란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죽음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리고 상실 속에서 자족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체념하고 그러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상실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가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세상을 좀더 인간적인 곳으로 만드는 일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도덕적 의무다. 사회 속에서 상실은 생물학적인 한계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질곡이기 때문에 충분히 치유할 수 있다. -10쪽

사회의 부정의와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에 필요한 제도가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는 완고한 기계 장치가 될 때, 국민들은 그러한 제도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다. 개선의 통로가 막혀 있는 제도는 제도를 유지하고 그 제도 위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를 거쳐 형성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러한 합의의 단계에 다다른 적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를 진정 정의로운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고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전진하지 않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11쪽

"불복종의 의미는 이성과 의지에 대한 확증의 행위이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무엇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향하는’ 태도이다. 즉 볼 수 있고 본 것을 말할 수 있고 보지 않은 것은 이야기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향한 행위이다."(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17쪽

시민불복종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는 법과 제도와 관습이 잘못된 것일 수 있으며 그러한 잘못을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자유와 정의, 진리는 결코 권력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현존하는 사회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 희생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그 길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탄압하는 자까지도 용서할 수 있다는 신념과 실천을 통해서 온 인류가 참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불복종의 이념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고 양심에 의거한 이성적 신념을 견지하며,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여 희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22쪽

주권자의 정당한 정치 행위가 행사되고 실천되는 올바른 방식은 주권자의 의지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 제도화의 핵심은 주권자인 국민이 바라는 바가 실현되도록 법률로써 보장하는 입법화다. 그러나 입법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의회가 주권자의 입법 의지를 거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 해결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제도적 선거에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의원들을 낙선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국민을 배반하는 의원들의 방해로 불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금지될 경우,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적인 불복종 행위뿐이다. -32-33쪽

시민불복종은 비록 법을 거스르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을 표현해야 한다. 시민불복종이 법 경계선 바깥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불복종의 정신은 법에 대한 충실한 의무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즉 시민불복종은 전반적인 법체계를 인정하지만 특정한 법률이나 법률의 특정 조항에 불복종하는 것이다. 시민불복종이 표현하는 법에 대한 충실성은 불복종 행위의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과 함께, 불복종 행위의 법적인 결과들을 불복종자들이 기꺼이 감수하려는 의지에 의해 표현된다. (중략) 시민불복종은 이미 구제 불가능한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오용이나 남용의 발단을 없앰으로써 예외적인 불법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일상에서의 법 수호 의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민불복종은 ‘제도화된 저항권’이라 부를 수 있다. -39쪽

공리주의적 관점에 의한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는 일반적인 원리로는 판별될 수 없고, 구체적인 사안의 전개 과정과 결과에 의해서만 판별되는 단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함 외에도 사회의 장단기적 이익에 의해 정당성을 판별하는 것은 그 이익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당성 기준이 달라지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시민불복종의 기본 정신은 이익이 아니라 정의와 가치, 신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정당화는 적절하지 못하다. -85쪽

롤스는 시민불복종이 정당화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법률이나 명령이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경우, 둘째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현저하게 위반하는 경우, 셋째 법률이나 명령이 정치적 다수자에게 정상적으로 꾸준히 호소해왔지만 그것이 성공하지 못해, 합법적인 보상 수단이 어떤 효과도 가져오지 않을 경우 들에 한하여 정당한 시민불복종의 조건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요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 즉 법률이나 정책 또는 명령이 정의의 원칙에 어긋났을 경우에 시민불복종은 정당하다. 이 경우에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자유로운 협동의 조건이 침해되었다는 것을 정당하게 알리고자 한다. -88쪽

전쟁 중의 양심적인 거부의 경우,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가 명령이 전쟁 행위에 적용되는 원칙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다고 믿을 경우, 그는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도덕과 비도덕의 갈림길에서 도덕을 선택해야 한다는 자연적 의무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90쪽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론의 핵심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원천은 시민들의 의사소통에 의해 합의된 결론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담화에 의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는 일상적인 의사소통 행위에 사회적 도덕성을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행위와 도덕, 법, 권력의 관계를 규율하는 동시에 그 정당성을 판별하는 준거점이 된다. 따라서 담화의 영역은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판별하는 근원적 기준이며, 담화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정당성은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에서 다양하게 변용 적용된다. 그러므로 법률조차도 담화윤리를 준수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 결과에 복종하게 된다. -91쪽

"시민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저항으로서 단지 사적인 신념이나 자기이해만을 토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미리 고지되며 경찰도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개별적 법규를 의도적으로 위반하기도 하지만 전체 법질서에 대한 복종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것은 규범 위반의 법적 결과를 책임질 마음 자세를 요구한다. 시민불복종을 표현하고 있는 규칙 위반은 오로지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저항을 비폭력적 수단에만 제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하버마스, 『새로운 불투명성』)-92-93쪽

합법성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략) 합법성이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법이란 완전히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적 규칙일 뿐이다.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불복종처럼 보이는 것도 법과 장치가 끊임없이 적응과 수정의 흐름 속에 있는 탓에 이미 시기를 놓친 교정과 개혁을 선도하는 안내인일 수 있다."(하버마스) 이 경우의 시민불복종 행위는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를 가진 사회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민불복종에 대한 ‘권리’는 정당성과 합법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하짐나 "검사나 판사들이 시민불복종이 이러한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규칙 위반자들을 범죄자로 추적하여 통상적인 처벌을 내린다면 그들은 권위주의적 합법주의에 빠지고 만다."(하버마스)-93-94쪽

라츠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정치 참여에 관한 일반 권리에서 발생하는 시민불복종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 행위가 권리라면 그것은 법률에 의해 적절하게 보호되어야 마땅하지만, 법률의 존재 이유가 규칙의 준수를 강제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법률을 위반하는 정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정치 참여 권리를 근거로 ‘비록 그 행위가 법률에 어긋난 것일지라도 시민에게 특정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한다’는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권리는 법률에 의해 보호되어야 마땅하지만, 법률 위반 행위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법률에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 시민이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면 그 실천 행위는 시민불복종이 아니라 합법적인 정치 행위여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불복종이 권리라면 법률에 의해 보호되어야 마땅하고 법률은 그 행위를 처벌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시민불복종이 처벌되고 불복종자들이 처벌을 회피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시민불복종 행위가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98-99쪽

코헨의 주장은 비록 법을 준수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모든 경우의 도덕적 고려보다 우선하여 절대적으로 법률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도덕적인 시민들은 때로 법률이 도덕적인 고려를 짓밟고 있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하며, 그 판단에 따라 특정한 법률에 복종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들이 심사숙고한 결과 복종한다면 그 복종은 관습적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심사숙고 후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다. (계속)-122-123쪽

(이어서) 따라서 시민들이 복종, 불복종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은 오류이다. 이러한 주장은 도덕적 생활의 특성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여 인간의 삶에서 법률과 정부당국의 권위에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한다. 인간이 복종, 불복종 중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없다면, 그들은 국가나 입법 기구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그 결과 사회에서 시민들의 심사숙고와 양심과 이성과 도덕에 따르는 자기인내가 전적으로 배제될 것이며, 도덕성에 관한 공공영역을 고갈시킬 것이다. 만약 ‘모든’ 법률 앞에 ‘어떠한’ 경우이든지 ‘예외 없이’ 복종해야 한다면, 사려 깊은 시민의 역할은 생각 없는 노예의 습성으로 대체될 것이다. 시민들은 노예가 아니며,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시민이 된다.
-122-123쪽

"왜 인간은 그다지도 쉽게 복종하는가? 그리고 불복종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스스로 국가나 교회 또는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불복종하기 위해서는 홀로 있을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 용기가 부족하다." (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
그들(미국의 대학생들)이 시민불복종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민불복종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민불복종을 떠올리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 시민불복종은 사회에서 더욱 비중이 커져가는 자신들의 특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버려가면서까지 시민불복종에 참여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미 20대 80의 사회에서 20에 속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141-142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의무를 논하는 공정한 관점은, 그 개인이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법률의 정당성을 적절하게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을 포함해야만 한다. 불복종만이 해당 법률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 있는 경우에, 그에게 의무론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그러므로 해당 법률의 위헌성이 의심스럽고, 의회에서 해당 법률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보다 사법적 판단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정당하게 시민불복종에 의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진지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들이 법적 질서의 건전한 토대를 형성한다. -154쪽

특정한 법률의 정당성이 의심스러울 때에 불복종자는 최고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불복종할 수 있다. "시민은 법률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지, 법률에 대한 특정한 사람의 해석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복종자가 법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합당한 양심적인 판단에 따라 행위한다면, 그는 부적절하거나 불공정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로날드 드워킨)-154-155쪽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자, 특히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위임은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까지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며, 정의를 실현하려는 법정신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부도덕한 법률을 강제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시민들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법질서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현실의 부도덕한 정치 행위와 부정의한 법조항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철회할 수 있다. ‘민주 법치국가는 시민에게 무조건적으로 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조건부의 복종을 요구하며, 무엇보다도 동의는 심사권을 박탈당함을 의미하지 않고, 주권자의 자유로운 동의는 한번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이해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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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16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딸을 위해서 사야겠군요~ 감사 ^^

마늘빵 2008-07-16 08:50   좋아요 0 | URL
^^ 요고 강추입니다.
 
홉스 & 로크 : 국가를 계약하라 지식인마을 22
문지영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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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의 저작들에서 공포는 모든 개인적 권리의 뿌리이자 도덕성의 근거이고, 나아가 인간으로 하여금 평화를 추구하게 만드는 동기로 나타난다. 특히 『리바이어던』에서 공포는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를 계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절대적인 리바이어던의 힘을 요구하고 그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감정이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공포의 대상을 제거하거나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41쪽

가장 강력한 자들이 그러한 해악이나 비행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러한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즉각적으로 분열과 반란을 조장하는 목소리로 들릴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인간이 자연상태를 떠나 사회에 들어가면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법률의 구속하에 있어야 하지만 그 한 사람만은 자연상태에서 누리던 모든 자유를 여전히 보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권력에 의해서 증대시키고 또 무절제하게 사용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합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인간이 스컹크나 여우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해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조심을 하면서도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데는 만족하거나, 아니 심지어 안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치론』제7장 93절)-44-45쪽

우선 홉스의 사상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공리를 의미있게 비교할 수 있다거나 소수의 공리가 더 큰 집단 이익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시사가 없다. 더욱이 개인주의적 전제에 충실했던 그는, 단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에 공리주의는 바로 그와 같은 도덕적 의무의 가능성을 핵심으로 했고, 따라서 공리주의자들이 홉스에게서 빌려오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의 사회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의 권리 혹은 권한에 관한 설명에 한정되었다. 무엇이 사회적 목표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그들 자신의 설명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홉스에 대한 공리주의적 지지의 한계였다. -47쪽

(홉스에 대한 평가) 비록 절대군주를 옹호하긴 했지만, 군주의 절대권력이 조물주인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약에 참여한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군주주권론자나 왕권신수설 주창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다른 한편 국가의 발생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계약으로 설명하고 인민주권론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긴 했지만, 그 모든 논의가 결국 강력한 리바이어던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대의정부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력들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었다. -54쪽

우선 "권리의 상호 양도"로 정의되는 계약 과정에서,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의 판단과 이성에 따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자연적 권리를 잃게 되며, 계약 이후 각 개인은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유일하고 정당한 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잃는다. (중략) 각 개인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한다는 전제하에, 사실상 모든 권리를 포기 혹은 양도하는 셈이 된다.
(중략)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개인이 엄청난 상실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 홉스가 설정한 자연상태에서는 생산 활동도 소유도 없고,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 정의, 불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미리 가지고 있지 않은 권리에 대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다시말해,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각 개인이 노동권, 소유권, 지적 재산권, 학문 및 예술의 자유 등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사회계약의 과정에서 그러한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69쪽

<홉스가 말한 국가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는 원인>
1.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든 불완전한 제도. 특히 절대권력의 결여.
2. 예컨대 "모든 사적 개인이 선악 행위의 판단자다", "사람이 그의 양심에 반하여 한 행위는 무엇이든지 죄다", "신앙과 신성함은 연구하고 이성적으로 추리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영감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주권자도 시민법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사적 개인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주권자의 권리를 배제하는 절대적 권리가 있다.", "주권은 분할될 수 있다." 등과 같은 선동적인 주의주장들이 끼치는 해독.
3. 이웃 나라의 통치를 모방하려는 태도.
4.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및 정치 관련 서적을 읽도록 허용하는 것.
(계속)-86-87쪽

(이어서)
5. 시민적 권위와 영적인 권위를 구분하여 신민들에게 복종해야 할 두 개의 왕국을 제시하는 것.
6. 둘 이상의 통치 형태를 섞은 혼합정치체제.
7. 국가 재정, 특히 전쟁을 수행할 때 필요한 재원 조달의 어려움.
8. 한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부의 독점.
9. 과다하게 인기를 끄는 유력한 신민.
10. 지나치게 커진 대도시와 군대의 과도한 육성 그리고 과다한 조합.
11. 정치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
12. 영토 확장의 야욕과 불필요한 정복, 안일함과 낭비. -86-87쪽

‘공동체 구성원의 복지’라는 신탁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실패한 정부에 대해 국민이 저항권을 갖는다고 본 로크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했다. 저항권에 대한 로크의 정당화는 정부의 권력행사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증하는 것이다. 이제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며 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부는,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 타도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다.-109쪽

홉스에게 자연법은 자연상태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 계약을 맺도록 개인을 이끄는 정도의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로크에게 자연법은 사회계약에 이르도록 이끌뿐만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자연상태에서도 각 개인이 타인에게 속하는 재산권과 자연법을 위반한 자에 대한 처벌권을 존중하도록 자신의 의지를 제약하게 한다. 그리고 각 개인은 그의 이성에 따라 사는 한 자연법을 알 수 있고 또 준수한다. -122쪽

홉스의 자연상태를 특징짓는 공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것인데 비해 로크의 자연상태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위험은 권리들의 충돌 가능성과, 무엇보다 그것을 조정할 권위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26쪽

구성원 개인의 동의와 위임을 기원으로 공동체 내의 입법권(자)과 집행권(자)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자이기보다 계약의 직접적인 구속을 받으면서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종의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계약 이후에도 로크의 개인은 평등한 지위와 자유를 잃지 않는다. 나 자신의 동의가 없는 한 어느 누구도 나를 정당하게 지배할 수 없고, 또 나는 거기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보면,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지배-복종이란 결국 내가 나를 지배하고 또 내가 나에게 복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34쪽

로크의 사회계약론에서 시사되는 정부와 인민 간의 관계는 홉스에게서 살펴본 리바이어던과 신민 간의 관계를 정확히 뒤집어서 보여준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신민들 상호간에 맺어지는 것으로서, 리바이어던은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계약으로 인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신민들에 대해 일체 의무도지지 않으며 천하무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신탁으로 설명되는 로크의 통치계약은 신탁의 수혜자로서 인민이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탁자인 정부에 대해 아무런 의무는 없이 권리만 주장하고, 심지어 정부의 폐지를 결정할 정도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한다. 인민은 다만 원초적인 사회계약이 요구하는 의무, 곧 공동체를 유지하고 보존할 의무를 서로에 대해 질뿐이다. -141-142쪽

<로크 : 입법권의 범위 제한 내용>
1. 입법권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절대적, 자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권력이 아니며 또 그러한 권력이 될 수도 없다. 입법권은 사회의 공공선에 의해 최대한 제한된다. 그것은 보존 이외에 그 밖의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는 권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고, 의도적으로 궁핍하게 만드는 권리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2. 입법권 또는 최고의 권위는 즉흥적이고 자의적인 명령을 통해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것은 공포된 영속적인 법, 그리고 널리 알려진, 권한을 위임받은 재판관에 의해서 정의를 시행하고 신민들의 권리를 결정해야 한다.
3. 최고의 권력은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그의 재산의 일부를 그의 동의 없이 취할 수 없다. 입법부는 인민들 스스로가 표명하든 아니면 그들의 대표자들이 표명하든, 인민의 동의 없이 그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4. 입법부는 법률을 제정할 권력을 그 밖의 다른 사람 또는 기관에 이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민이 그 권력을 설정한 곳 이외의 다른 곳에 설정해서는 안 된다. -145쪽

<로크의 논리전개과정>
1.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의 자연상태에서 로크의 개인들은 이미 신이 부여한 자연권의 주체로서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2. 자연상태의 개인들은 자신의 복지와 안전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계약을 맺고 국가를 수립했다.
3. 계약 후 정치사회에서는 입법권이 단일한 국가 최고 권력으로 설정되지만, 입법권은 인민의 복지라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다.
4. 그러므로 입법권을 담당한 자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인민은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151쪽

<로크 : 계약된 정부가 해체되는 경우>
1.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입법부를 변경할 때, 예컨대 사회의 의지인 법률을 자의적인 의지로 대체하거나 정해진 시기에 입법부가 집회를 갖는 것 혹은 그것이 설립된 목적에 의거하여 활동하는 것을 방해할 경우, 자의적인 권력에 의해서 인민의 동의 없이 또는 인민의 공통된 이익에 반해 선거인단이나 선거 방법을 변경할 경우, 군주나 입법부가 인민을 외국 세력에 넘겨서 예속시킬 경우 등.
2. 최고의 집행권을 가진 자가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하고 방기함으로써 이미 제정된 법률이 더 이상 집행될 수 없을 때.
3. 입법부와 군주, 둘 중 어느 한편이 그들의 신탁에 반해서 행동할 때. 예컨대 신민 혹은 공동체 구성원의 재산을 침해하고 자신들이나 공동체의 특정 부분을 인민의 생명, 자유, 재산의 주인 또는 자의적인 처분자로 만들고자 기도할 경우 등. -153쪽

"탄압, 음모 또는 외국에의 양도로 자신들의 예전 입법부가 없어졌을 때 인민들에게 새로운 입법부를 설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에 대비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늦어서 해악을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을 때 구제를 기대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먼저 그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자유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사슬로 묶인 후에 그들에게 자유인처럼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구제라기보다는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폭정에 완전히 속박될 때까지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수단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폭정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권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통치론』제19장 220절)-153-154쪽

"입법부가 사회에 그토록 필요한, 그리고 인민의 안전과 보존이 걸려 있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무력에 의해서 방해받을 경우, 인민은 그것을 무력에 의해서 제거할 권리가 있다. 상황과 조건을 불문하고 권한 없는 힘의 사용에 대한 진정한 치유책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권한 없이 힘을 사용하는 자는 항상 침략자로서 전쟁상태를 자초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이 취급되어 마땅하다."(『통치론』제13장 155절)-154쪽

"상대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 가격을 막는 방패만을 사용하는 자나 공격자의 오만함과 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손에 칼을 들지 않은 채 공손한 자세로 대처하는 자는 즉각적으로 저항의 밑천이 떨어짐은 물론 그러한 방어가 그 자신에게 오히려 악화된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저항을 해도 좋은 사람은 반드시 가격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통치론』제19장 235절)-154-155쪽

"정부의 목적은 인류의 복지다. 그렇다면 인민이 항상 폭군의 무제한적인 의지에 신음하는 것과 통치자가 권력을 방만하게 행사할 때 그리고 권력을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종종 저항하는 것 중 과연 어느 편이 인류에게 최선인가?"(『통치론』제19장 229절)-157-158쪽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인민이 재판관이라고 답변하겠다. 수탁자 또는 대리인이 그에게 맡겨진 신탁에 따라 잘처신하고 있는지는 대리를 위임한 사람, 곧 위임했기 때문에 그가 신탁에 반해 행동하면 그를 해임할 권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판단하겠는가?"(『통치론』제19장 240절)-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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