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
김시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는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행복한 이기주의자>와는 달리 - 며칠전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읽고 혹평을 가한 일이 있었다 -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한다.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들이 말하듯 지침을 주고 나를 따르라, 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을 이끌어낸 다음 왜 이기주의자를 옹호하는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것이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는 다른 책과 이 책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여러 철학자들이 옛 고전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읽어내려 한다. 이 책도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의 중국의 철학자들, 누구나 다 아는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후계자 맹자, 순자, 그리고 장자와 노자, 묵자와 한비자, 양주와 상앙 등등의 <중국철학사>에나 등장할 법한 굵직굵직한 주요 철학자들은 다 등장했다고 봐야한다. 저자 김시천은 이 많은 철학자들을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묵가학파와 양주이다. 이들은 당시 공맹의 유가철학에 딴지를 걸었지만 그네들의 파워가 너무나 큰지라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던 인물들이다.

  우리는 지금껏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군자와 성인이 되라고 윗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크게 보고 크게 마음을 쓰고 큰 그릇 큰 사람이 되라고 들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딴지를 건다. 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면 안된다. 도덕책에 나와있는대로 누구나 다 옳고 선하고 순수하고 남을 돕우며 사는 대인, 군자, 성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적이다. 정말 그렇다. 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대통령, 국회의원, 우주비행사, 대기업 CEO, 변호사,  판사, 의사가 되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다 될 수는 없다. 왜. 그럼 왜 안된다는거야. 

  거참 맹렬한 놈일세 아니 하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 그래 꿈은 다 꿀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누구나 되지는 못한다. 큰 인물은 큰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하고, 작은 인물은 작은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한다.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치 '대인=좋은 사람, 소인=나쁜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대인과 소인의 개념을 인식하며 살아왔고, 모두가 다 대인이 되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안되는 데 되게  하려니 어렵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안되면 되게하라'이다. 안되는데 어떻게 되게 해. 이런 억지가 어딨어. 안되면 안되는거야. 안되는데 되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며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겐 어쩌면 이 책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안되면 하지마. 넌 너다운 길을 찾으면 돼. 소인의 삶을 찾아가라.

   이 책은 이기주의에 대한 옹호다. 우리는 도덕시간에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고, 이타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배웠지만 - 도덕교사인 나부터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니 다들 그리 알 밖에. 이 책을 읽었으니 다음부터 조심해서 가르쳐야겠다. 그전에 도덕교과서부터 전면  개편해주면 안되나. 영 가르칠 때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가르치는거 같아 미안하네. 그거 싹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하려니 난 따로 닦아놓은 뭔가가 없고 이런걸 내공부족이라고 하지 - 결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기주의가 왜 나빠. 나를 위해 살겠다는데. 나를 위해 살겠다는 이기주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연결된다.

  나를 위하는 학문. <여씨춘추> 중기에는 이래 나와있다.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爲我)'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크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 경중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

  나를 위해 공부를 했다. 공자는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논어), "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것은 배운 바를 신중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고, '남을 위한다(爲人)'는 것은 배운 바를 말로만 한다는 뜻이다. "(논어집해),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논어집주)

   옛 사람들은 나를 위해 공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하라고 배운다. 공부해서 남주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타인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배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학교에서는 이래 배우지만 집에서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나. 집안 마다 다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돈돈돈 들어있는걸 보면 그것이 가정교육의 여파가 아닌가 싶다. 분명 학교에서 돈 많이 벌라고 가르치진 않았으니까.

  이기주의의 본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는 바로 각 '개인'이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대 이기주의의 원리이다. 그러한 이기주의 원리가 제도화된 것을 우리는 '권리'라고 한다. "(P112) 이기주의는 곧 근대 민주주의의 권리인 셈이다.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물론 이때의 이기주의는 엄격히 구분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한 행동이기는 하되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행동. 그렇게 보면 도덕시간에 배운 이기주의의 의미와도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봐야하나.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이렇게 소박하고 작은 것이다. 당신의 생명이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이기주의를 요즈음 말로 '권리'라고 부른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속되게 말하면 먹고 살려는 몸부림이고, 고상하게 말하면 행복해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다. 그래서 괜찮다. 얼마든지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기껏해야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P220)

  그래 이 정도 선에서는 얼마든지 나는 이기적이어도 상관이 없다. 내 '이기'라고 해보야 고작 이런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깐 말이다. 이기를 위해 타인을 해치고 피해를 주는 정도의 선까지가게 되면 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저자의 이기주의에 대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그 정도 선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답지 못함'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의 저자의 말을 읽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으로 치부하는 것, 혹은 어느 한 개인의 이기심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원인은 그 사람의 이기적 본성보다는 삶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악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단되고, 해결책 또한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라는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모든 개인이 갖는 몸의 이기적 본성도 악의 궁극적 원인은 아니다. "(P241)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대인의 삶이란 것은 그 자리가 큰 것이지 사람이 큰 것이 아니라 한다. 맞는 말이다. 제 그릇이 아닌 자가, 솔직히 말해 소인의 그릇 밖에 안되는 자가, 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자리가 커질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이를 막아야 한다. 고로 소인은 소인답게 살자는 것이다. 안되는 그릇에 몸에 좋은 귀한 약을 담고 담다가 넘쳐흐르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릇을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 그릇은 늘어날 그릇이 아니고, 늘어나더라도 시일이 필요하다. 왜냐. 안되는 그릇을 억지로 늘이려 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라는 모토는 선천적으로 제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있다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생긴 의문점은 그것이었다. 그러면 제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선천적으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정해져있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면, 언제쯤 그 그릇의 크기를 알아볼 수 있을까. 15살? 20살? 30살? 의문이다. 언제쯤부터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를 적용시켜야 할지. 이런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케 해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인이 대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대인의 이기주의요, 소인이 소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소인의 이기주의다. 그리고 이때의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며 나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주의이다. 공자왈 맹자왈 대인이 어쩌느니, 군자가 어쩌느니 그런 말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고전의 재조명이란 것은 바로 이런 뒤집기가 아닐런지. 바른 말 백번 하는 것보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해주는 이런 글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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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6-11-2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참 꼼꼼하게 쓰셨네요. 추천도 누릅니다.^^ 저에게도 기쁜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