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다시 쓴다 - 객관성, 여성운동, 인권
정희진 엮음, 한국 여성의전화 연합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6
대학생들에게 ‘나의 성애사’를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하면, 남학생들은 대개 매춘 경험을 쓰고 여학생들은 성폭력 경험에 대해 쓴다. 말하기 방식도 상반된다. 남성들은 ‘본인의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 성문화를 진단하겠다.’며 자신을 기꺼이 보편적 인간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여성들은 ‘일반화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라고 쓴다. 섹슈얼리티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 경험, 언어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정희진)

9
프란츠 파농이 너무나 적절하게 말했듯이, 식민지 사람들은 지배자의 언어와 자기 언어, 두 개의 언어를 배워야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언어만 알면 된다. 여성은 남성의 언어를 이해해야 생존할 수 있지만, 남성은 여성의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여성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말(해야)한다.(정희진)

10
피해 당사자든, 지원한 여성운동가든, 여성학 연구자든 간에 누가 무엇에 대해 쓴다는 것, 명명하는 행위는 모두 사물의 다른 부분을 침묵시킨다. 그것은 여성주의 언어를 포함하여 모든 언어가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때문에 모든 쓰는 자들은 언어가 사물을 살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성찰해야 한다. 피해 당사자가 쓴다고 해서, 직접 관련된 여성운동가가 쓴다고 해서 그 자체로 객관성이나 대표성, 정치적 올바름을 보증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여성들은 여성 운동의 언어화에 대해 너무나 많은 자기 검열의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떨 때에는 ‘우리’가 기록하지 않을 바에야 아무도 쓰지 못하게 하자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와 ‘겸손’의 카르텔을 형성하곤 한다. 남성이 자신의 경험을 과잉 보편화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정희진)

34
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남자 앞길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 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더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정희진)

116
폭력 피해자들의 방어는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사게 되고 ‘방어 행위가 아닌 공격 행위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폭력 피해자들이 아프다고 소리쳐야만 사회는 관심을 갖지만, 막상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소리질러야’ 하는데 이웃이 알도록 소리 질렀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다.(전희경)

폭력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저항이 범죄화된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동정을 호소하는 ‘불쌍하고 의존적인’ 존재일 때, 자신에게 가해진 불법 부당함에 대해 저항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갈 때, 가부장제 사회는 비로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은혜’를 내려준다.(전희경)

123
모든 언어는 정치적, 무의식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맥락이며,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언어는 그 언어를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사회적 맥락의 정치적 효과다. 이들 비디오의 내용은 ‘성행위’이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은 폭력이다.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명명은, 명명의 주체와 명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행위이다.(강김아리)

124
성폭력 피해자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예컨대, 20대 여성이 새벽 1시께 동네 공터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 시간에 집에 있지 않았는지, 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지, 왜 크게 소리를 지르는 등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한다. 반면 20대 남성이 새벽 1시께 동네 공터에서 온몸이 수차례 칼로 찔리는 등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왜 그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는지’ 관심을 가질 것이다. 성폭행 사건에서 가해자가 왜 성폭행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성욕은 억제되지 않으며 여성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그 피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용인하기 때문이다.(강김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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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고소할 때, 가해 용의자에게 사실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김효선)

156
폭력은 ‘왜’라는 동기, 이유,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가 문제이다. 가해남성이 ‘왜’를 문제삼는 것은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이지만, 피해자가 ‘왜’를 묻는 것은 그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설명하여 이유 없는 폭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치환하는 효과를 낳는다. 폭력 가해자에게 흔히 붙여지는 ‘또라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나, 가해/피해자의 심리를 설명하는 무수한 연구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기여해왔다.(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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