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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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하나 둘 계속 읽어나가는 중이다. 그녀가 낸 책을 모두 다 읽을 때까지. 이번에 접하게 된 그녀의 책은 <키친>. 많은 바나나 애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나나의 색깔을 제대로 담아낸, 또 바나나가 낸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고,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손꼽는 <키친>은 내겐 그다지 썩, 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일본산 과일은 내 입맛에 딱 맞지는 않는다. 물론 몇몇 다양한 일본산들을 접해본 결과 바나나는 대략 괜.찮.다. 하지만 내가 애지중지 껴안으며 송송 샘솟는 사랑을 나눠주고픈 작가는 아니다. 

  무슨 테스트만 하면 난 적당히 감성적이라고 나오지만 난 지극히 이성적인 책들을 더 좋아한다. 소설도 마찬가지. 소설이라는 장르는 이미 충분히 감성의 영역으로 들어와있지만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이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소설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알랭 드 보통 씨.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글을 쓸 때마다 우려먹어서 이제 내 글을 읽는 이들은 충분히 지겨워졌으리라. 더 이상 언급 안겠다.

  하얀바탕 위에 검은 튤립 모양을 한 그림이 놓여있는 <키친>은 표지만큼이나 글도 이쁘다. 표지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겉껍데기를 걷어낸 책 본체의 검은 바탕의 흰 꽃 무늬는 그 매력을 더욱 발산한다. 흰바탕의 검은 꽃보다 검은 바탕의 흰 꽃이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 의 세 편의 소설들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은, 바나나의 여타 다른 책들에 숨어있는 소설의 길이보다 조금 더 길다. 그리고 '키친'은 '키친'으로 그치지 않고 '만월'로 연결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로 시작하는 소설은, 부엌을 배경으로 하여 의당 그곳에서 벌어지는 당연한 일들을 소재로 삼아 사랑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바나나의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사랑처럼 상처를 머금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릴 적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살살 문질러준다. <키친>은 남자와 여자의 성장과 상처 극복에 관한 이야기이며 기록이다.

  바나나는 그녀의 작품 후기에서 - 대개 작가들은 스스로 작품 후기라는 걸 적지 않는데 바나나의 작품집에는 항상 그녀의 소설에 대한 후기가 실려있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녀가 옛날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것, 개인의 성장과 극복, 희망과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상처깁기'는 바나나 소설을 관통하는 코드다. 그녀 소설 속에는 언제나 상처받은 인간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상처받은 이들의 등허리를 쓸어내린다. 토닥여준다.

  하나의 코드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낼 수 있다는건, 한편으로 우려먹기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작가의 개성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 라는 작가에게 있어서 '상처깁기'는 그녀가 쓴 소설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코드가 되었으며 아직 읽지 않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기대한다. 매번 같은 소재가 반복되지만 매번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진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상처받은 인간들을 만나는 것은 나에겐 행복이다. 독자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다. 자기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어루만져주고 쓰다듬어주고 위로해준다. 바나나의  소설엔 그런 백신이 들어있다. 중독 되어도 좋다. 그것은 치료의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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