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 - 테레진 수용소 아이들이 남긴 시와 그림, 1942~1944
프란타 바스 지음, 이혜리 옮김 / 다빈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본인이 인문/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들 중에서도 편식하며 먹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철학서, 철학대중서, 평전, 비평서, 미래서, 철학적 에세이, 고전 등등의 책들을 즐겨읽는 나는 이상하게도 역사서적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학문의 근본은 인문학이요, 인문학의 기본은 역사가 될 것일진대 참 이상하게도 역사서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 뭐랄까, 철학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역사서적이 가지고 있는 그 딱딱함과 건조함에 싫다고 할까. 철학책도 어렵고 딱딱하고 건조하긴 마찬가진데 왜?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뒷세대들의 이전 사실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따르는데, 어떤 사색의 장을 열어주기 보다는 이것이 옳다 그르다 식의 진위판명이 주를 이룬다. 문장의 꼬투리를 잡고 또다른 장을 열어 점점 넓은 삼천포로 빠지고 싶어하는 나로서는 역사서는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별로 매력없는 분야의 책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나의 이러한 역사서에 대한 의견에 이견(異見)이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책 <...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 는 역사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담고 있다. 1942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벗어나 세계사에 관심있는 이들조차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강대국들의 역사 이외에는 관심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어떤 계기를 갖지 않고서야 다른 소외된 국가들의 역사에까지 신경 쓰진 않을 듯. 1942년의 체코슬로바이카에선 나치의 침공이 있었다. 1939년 독일의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를 침공, 독일 제국에 편입된다. 1941년엔 테레지엔슈타트 라는 곳에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를 설치하고, 이곳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데, 이들은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질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42년에서 44년 독일이 침공한 유럽 국가의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엔 아이들도 많았다. 이후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곳에 있던 15,000명의 아이들 중 단 100명만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 책은 유대인 거주지, 게토에 있는 아이들이 그곳에서 2년간 교육받으며 그린 그림과 쓴 글을 담아놓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얼마 안되는 삶을 마감했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교육받으며 그리고 쓴 그림과 글들은 가지런히 모아져 그들이 죽은 이후에 공개되었다.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직접 이 책의 작가는 아니지만 서문을 썼다.

  "지금 나는 테레진 아이들이 쓴 시를 읽고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놀이와 자유를, 온화함과 아름다움을 열망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던 죽음은 행간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나는 또한 아이들의 그림을 본다. 여기에는 아이들이 가졌던 슬픔과 근심의 그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봄과 꽃, 나비와 새들에 대한 꿈, 그리고 행복과 평안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더 많이 나타나 있다. 이 아이들의 영혼은 방어 수단으로서 시와 그림들을 사용했다. 때로는 자신들의 불안을 드러냄으로써, 또 때로는 자신들의 꿈을 묘사함으로써."

  이 책은 유대인 아이들이 남긴 많은 그림과 글이 실려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밑에는 제목과 함께, 사용도구, 그리고 아이가 있던 유대인 수용소의 주소(?)명과 그 아이의 이후의 삶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연필 데생의 세부(문서번호 129574). 오른쪽 상단에 '요세프 폴라크, 클라세 I. ii/2 Jahre 2-V-44' 라고 서명되어 있다. 요제프폴라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파르두비체에서 1933년 1월 27일에 태어났고, 1942년 6월 9일 테레진으로 이송되었다. 1944년 5월 18일 아우슈비츠로 다시 이송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아이들의 그림과 글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억눌린 감정과 분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정말 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이 서문에서 언급했듯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우리가 행간에서 느낄 뿐이다. 아이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기 전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으며, 자신의 작품에 희망을 그려 넣었다. 수채화 물감과 잉크, 목탄, 연필과 색연필 등 갖가지 재료로 그려낸 그들의 작품은 정말 어린 아이가 그렸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솜씨가 뛰어난 작품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담담하게 손으로 그렸냈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전쟁이 끝난지 한참 지난 지금, 그들의 작품을 접하는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린 그들의 그림에서 슬픔을 느낀다. 슬픔은 겉으로 표현하기보다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더 슬프다.  

  병원에 실려가는 유대인, 게토를 감시하는 독일군, 손잡고 춤을 추는 아이들,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그림 속엔 게토에서의 생활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하지만 절망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유대인 게토 테레진의 작품이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저자의 미국에서의 우연한 방문 때문이었다. 본래 뉴욕주를 시작으로 보스턴, 맨하튼까지 미술관 순례를 계획했던 저자는 우연하게 들른 유대 박물관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그의 이후 계획은 다 틀어졌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며 아이들의 그림과 글을 접했고, 유대인 파워에 되려 반감까지 가지고 있던 그는 거꾸로 유대인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으로 변질되어 갔다. 글쎄. 이것도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전략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전략이든 아니든 간에 유대인들이 독일 나치에 의해 핍박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 혹은 거짓의 문제이므로.

  빠르게 대충 그림만 보고 훑어나갈 수 있는 책이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건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죽어간 아이들의 모습 때문이다. 이 그림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그려진 것도, 팔기 위해 그려진 것도 아니다. 그들이 삶을 지탱해나가는, 희망을 노래하는 수단이었다. 15,000명의 아이들 중 100명만이 집으로 돌아갔다. 14,900명의 아이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아이들은 그림 속에 나비를 그려넣을 순 있었으나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 나비는 더 이상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니 그들이 존재 하지 않으므로.

 결론적으로 이 책은 역사서는 아니지만 역사의 한 장면을 가슴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그것은 딱딱한 사실 확인의 장면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삶의 경험이었다. 역사는 가슴으로 느낄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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