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필립 빌랭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 이어 거침없이 읽어 내려간 소설이다. 두 권 모두 분량이 짧기도 하고, 이야기를 비비꼬거나 수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정신없이 진행되는 소설도 아닌지라 쉽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유부남과 바람(?)을 핀 뒤 가슴 속에서 그를 떠올리며 써내려간 <단순한 열정> 이나 또 이 소설을 우연히 읽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고 사랑한 필립 빌랭이나 대단한 위인들이다. 아니 에르노는 사랑한 연하의 유부남에게 A라는 호칭을 돌려준 데 비해, 필립 빌랭은 노골적으로 아니 에르노의 약자 A.E를 소설 속에 등장시키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소설로 보기 어렵듯, 필립 빌랭의 <포옹> 또한 소설로 보기 어렵다. 모두 명확한 구체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포옹>은 <단순한 열정>의 뒤를 따르고 있다. 필립 빌랭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대개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비해, 필립 빌랭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렸다. 아니 어쩌면 아니 에르노의 그것이 처음부터 필립 빌랭의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20살. 대학 입학 한 뒤 새내기 시절,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둘은 이후 5년간 사랑을 했다.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겠지만. 사랑을 하며 아직 작가 지망생이었던 필립 빌랭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소설 속 문체들로부터 본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할지라도 그가 어린시절부터 흠모해온 이전의 피아니스트가 있고, 유명한 가수라고 할지라도 그가 어릴적부터 따라불러온 이전의 가수가 있듯이, 그는 막 문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녀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완전한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문단에 데뷔식을 치뤘다. 필립 빌랭이 자존심을 버려가며, 자기만의 것을 버려가며, 아니 에르노를 따랐다고 보기보단, 아니 에르노의 문체를 본 받아 그만의 문체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아니 에르노가 이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그녀와 헤어진 필립 빌랭이 몇년 뒤 그녀가 예전에 내놓은 <단순한 열정>과 너무나 흡사한 작품을 내놓았을 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지 않았을까 싶다. 혹은 대담한 그녀가 의연하게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줄 알았다 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필립 빌랭은 <포옹> 에 뒤이어 낸 다른 작품에서도 아니 에르노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단지 상업적인 이유로, 혹은 헤어진 그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그녀를 따라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는 신인의 데뷔작치고는 확실하게 매스컴의 이목을 끌었고, 소설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확실하게 떴다. 이전에 이미 충격적 소설 <단순한 열정>으로 한바탕치룬 아니 에르노와의 사건이었으니 어찌 안뜰 수가 있으랴.

  필립 빌랭은 그녀를 사랑했을까? 정말로? 아니면 아니 에르노와 같이 '단순한 열정'이었을까. 필립 빌랭은 소설의 말미에  그녀와의 이별 이후 몇 달간의 글쓰기가 그녀와의 '결정적 종말'을 위한 작업이 될 것이라 말했다. "글쓰기는 그녀와 나 자신을 향한 위협이다. 이별 장면을 쓰면서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다시 되살려, 필경 한 사람은 죽여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 원형 경기장 속에 두 인물을 내던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만남과 이별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이별을 선고받은 필립 빌랭이 현실에서 죽고, 아니 에르노가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었다면, 이 소설은 반대로 필립 빌랭은 죽여야만 하고, 아니 에르노는 죽어야만 하는 역할의 뒤바뀜을 경험하게 만든다.

  한 바탕 열정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마음에서, 뒤이어 그의 마음에서. 그리고 남은 것은 회상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