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까미 하루끼. 대단히 유명한 작가이고, 나도 그의 유명세에 힘입어 몇몇 작품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을 하는거야?! 라는 궁금증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읽은 작품이 <상실의 시대> 와 <해변의 카프카>. 두 작품 모두 괜찮은 느낌을 주었고, 하루끼는 뭐 대단하게 끌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참 글을 재미나게 쓴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데뷔 25주년 기념 작품을 내놓았단다. 굳이 사서 읽고픈 마음은 없었고, 아는 넘이 <어둠의 저편>을 읽고 있길래 빌려보았다.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괜찮은 느낌으로 당연히 이번 작품에도 기대를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뿐. 전작에서 볼 수 있는 긴박감이나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은 찾아볼 수 없고, 지루한 스토리 진행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 전개가 지속된다.


 "독자는 작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해서는 안되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해본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이미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라는 한 철학자의 해석학적 입장도 있듯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각각의 독자들의 시각에서 다시 태어난다. 각각의 독자들은 각자 자신이 받은 다양한 감명을 토대로 작품을 쓴 작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또다른 작품이 세상에 내던져질 때 전작에 대한 기대를 품고 망설임없이 돈을 투자한다. 하루끼의 유명세는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고, 그의 수많은 독자들은 전작에서 그가 뿜어낸 향기를 다시 찾아오게 된다. 나 역시 그 수많은 독자 중의 한명이었고, 내가 읽은 그의 작품에서 나는분명 다른 이들과 또다른 감명을 받았겠지만, 어쨌든 공통된 사실은 "내가 감명받았다" 는 것. 하지만 작가는 나를 배신했다. 엄밀히 그것을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배신이었다.

 

 댄스를 하던 가수가 장르를 바꿔 록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정통락을 추구하던 록밴드가 하이브리드 핌프락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취향은 바뀔 수 있고, 같은 것을 추구하더라도 표현방식이 늘상 같은 수는 없다. 젊어서의 하루끼는 이미 지금의 늙은 하루끼가 아니요, 그의 초기작들에서 보여지는 그런 냄새들이 지금에 와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그를 탓할 수는 없을터. 되려 변화하지 않는 작가가 더 이상할 터이다. 변화는 늘상 일어날 수 있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루끼의 <어둠의 저편>이 기존작들과 차이를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비난할 것은 못되지만 나는 '개인적인' 실망감을 가졌음을 표하고 싶을 뿐이다. 나 뿐 아니라 그의 기존의 많은 팬들이 그런 배신감을 적잖히 느끼고 있고, 그것은 그들 독자에게 각각의 배신감을 안겨준 것이지만, 그는 이번 작품으로 또다른 새로운 독자와 조우할지도 모르는 사실.

 

  하지만 난 또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전과 같은 기대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실망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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