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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두운 도서관 책장 사이를 오가던 중에 나의 관심을 끄는 이름이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한 대형서점의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당시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첫 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소개글을 읽은 후로 그의 이름은 나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움베르토 에코는 1932년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현대의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이다. 서양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부터 시작해 퍼스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쌓은 사람이며,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할 줄 아는 언어의 천재이다. 전세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수십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우리에게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장편소설 <푸코의 진자>(1988) 동화 <폭탄과 장군>(1988) <세 우주비행사>(1988) 이론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 <열린 작품> <기호학 이론> <논문 작성법 강의>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대중의 슈퍼맨> <해석의 한계>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원재길 옮김, 열린책들 1995년 펴냄) 또한 그의 다양한 저술활동을 증명해주는 책으로 에코가 문학잡지 <일 베리>지의 '작은 일기'에 기고하던 칼럼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장르상 문학비평서라고 하기에도,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적절한 느낌이다. 그냥 '에코의 일기들을 묶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당시의 문화비평이나 칼럼들은 지극히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에코는 이 칼럼에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온 특이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패러디, 환상, 광기의 요소를 뒤섞은 독특한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잡지 칼럼치고는 파격적인 글쓰기의 형식과 에코의 방대한 지식에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실려 있는 글의 제목만으로 글의 내용을 먼저 짐작해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모든 글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 제목이 '∼하는 방법'의 형식이며, 에코는 굉장히 사소한 주변의 문제를 뭔가 있는 것처럼 표현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이 책에 실려있는 하나의 칼럼 제목으로, 글을 읽기 전 제목을 접하는 독자들은 "이 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까?" "정말로 우리가 연어와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혹 바다속 탐험 이야기는 아닐까?"하는 호기심을 가져볼 수 있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에코가 스톡홀롬과 런던을 여행하던 중에 생긴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코가 스톡홀롬 여행 중에 덩치가 엄청 큰 연어를 하나 샀는데, 이 놈을 가지고 런던으로 가 보관하기 위해 호텔객실 냉장고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고 냉장고 안에 가득 들은 술병들을 꺼내 다른 곳에 놓고, 그 안에 연어를 집어넣었단다. 그런데 호텔 직원이 에코가 술을 다 먹은 줄 알고 연어를 꺼내고 다시 술병을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에코는 또 술병을 다 꺼내고 다시 연어를 집어넣었고, 몇 차례 이런 일이 더 있고 난 후 체크아웃을 하려고 접수대에 갔더니 술값이 엄청나게 청구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처음의 의문을 품고 글을 읽은 독자들은 글을 다 읽은 뒤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것이다. 이 글 이외에도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방법' '비행기에서 식사하는 방법' '낯익은 얼굴에 대처하는 방법' '택시운전자를 이용하는 방법' 등에서 에코만의 기발하고 독특한 경험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글이 에코가 여행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많은 글에서 패러디의 형식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에코 서문'에서 에코는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 패러디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오로지 기분전환을 위한 글도 들어 있는데, 비평을 한다거나 교훈을 전달한다거나 하는 의도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게 옳은 일인지 해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특별한 목적없이 하나의 유머책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에코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
※[연어와 여행하는 법]은 1999년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