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탁석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탁석산을 좋아한다. 그가 처음 대중앞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서였다. 이 두 책들이 한꺼번에 인문학 베스트셀러로 달리면서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마침 이때 그는 우리학교 철학과에서 '분석철학'이라는 강의를 맡고 있었다. 굉장히 튀는 사람이었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말하는대로 글빨과 말빨이 탁월한 사람이었고, 이력도 특이하다.

 고등학교 내내 책만 읽어 공부는 꼴지를 달리고, 재수 일년 동안 공부해 서울대 자연계열을 일년동안 다니고 때려치고, 군에 갔다가 제대 후에 한국외대 영문학과를 장학생으로 입학해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해서 철학 박사를 받았다. 그냥 이력만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신의 자유로움을 어느정도 느낄 수 있다.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는 책은 그의 가장 최근작으로, 책 제목 앞에 <탁석산의>라는 문구를 붙인 것과 그의 얼굴을 책 전면에 드러낸 것은 이제 유명해질대로 유명해진 그의 이름을 빌려 책 판매에 도움을 얻자는 상업적 전략으로 보인다. 그때문인지 이 책은 인문서 치고는 대단히 많이 팔렸다. 그리 쉽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를 다루는 것은 어렵다. '민족' 혹은 '민족주의' 라는 말은 과잉 사용되고 있다. 대학가에서도 '민족'고대, '민족' XX과 라는 식의 학교이름이나 학과이름 앞에 '민족'이라는 말은 쉽게 달라붙고, 이는 수식되는 학교와 학과의 격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까지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교 이름이나 학과 앞에 '민족'이라는 말을 붙일 하등의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 탁석산이 토론 형식을 빌려 어려운 주제를 대중에 다가가기 쉽게 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론형식의 책은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저자는 부득이 각 장마다 '강의'라는 꼭지를 만들어 각 장에 해당하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덧붙이고 있다. 토론 형식은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고, 뒤에 붙여진 저자의 생각인 '강의'는 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책은 크게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한국의 민족주의는 과잉인가' '한국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일본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한국 민족주의의 장래를 전망한다' 라는 다섯개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에게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문화공동체인가, 핏줄인가, 언어인가, 역사적 유산인가? 저자는 이 모든 것에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민족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한 핏줄인 단일민족도 아니며, 한국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민족이라 하지도 않으며, 역사적 공동의 유산을 지니고 있는 자들도 아니라고 한다. 민족은 근대 이후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에 따르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적당히 이용해먹을 필요는 있다고 한다.

 따라서 민족정신이란 공허한 것이며, 한국어가 사라지면 민족도 사라진다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한다. 민족은 애초에 없는 것이기에 사라지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수걸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민족주의는 근거도 희박하고, 이제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장례를 치를 때가 되었지만 민족주의 지지자들이 지닌 진정성은 존중되어야 하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겸손한 장례식'론을 끌어들인다.

 또한 민족주의는 사다리라고 하며,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왔으며 이제 사다리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는 우리가 힘들게 한칸 한칸 쌓아올린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그 목표점에 거의 다 도달해있으며, 마지막 한 칸을 남겨두고 있다.

 "민족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애매한 개념이라 그 기반이 취약하므로 국가 건설이라는 희망이 없어지면 그 효용이 이데올로기로 변하거나 모두가 기댈 수 있는 명분 내지 핑곗거리로 전락할 수가 있다" 이는 민족이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을 말해주고 있다.

 또, 그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과잉된 예로 일본을 들면서, 역사적으로 일본보다 중국으로 인한 우리의 피해가 더 컸음에도 우리가 중국에게는 관대하고, 일본에게만 과잉반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본을 국가 대 국가가 아닌 민족 대 민족 이라는 구도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때 민족은 선악과 옳고 그름의 성격을 띤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침략을 받았을 뿐 한번도 남을 침략한 적이 없는 선한 민족이고, 일본은 본래 남을 침략하기 좋아하는 악한 민족이 된다. 도덕적 선의 문제로 전환됨으로써 우리는 명분과 윤리에서 일본을 앞선다고 생각하며 자위한다. 이것이 민족주의를 강화해왔다. 즉 우리 민족은 선하다는 의식이 강화된 것이다. 이에 반해 악역을 맡은 일본의 이미지도 강화된다. 일본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시기심이 우리의 민족주의를 견고하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일본을 하나의 보통  국가로 바라보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민족주의의 사다리에서 이제 국민이 아닌 시민으로 전환하자고 하며, 국가의 소유물인 국민이 아닌 세계시민이 될 때에만 우리는 민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국민은 국가의 부속물이다. 의무만 있고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해야 하는 존재가 국민이다. 국민은 국가의 감시대상이며 통합과 계몽의 대상이다." 라며, 반면 "시민은 자신의 재산과 자유를 위해 국가를 선택한다. 국가의 부속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가를 결성하는 것이다. 시민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영자를 바꾸든가 국가체제를 변혁하든가 아니면 국가가 아닌 국가연합을 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구한말 이래 민족주의는 이 땅에서 너무 많은 일을 했고, 우리는 이제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 책을 정리한다.

 그의 근거와 주장은 그를 통해 민족주의를 접하게 된 나로서는 더이상 뭐라 반박할 만한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내공이 너무 적은 탓에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 국사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된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잘못이지 않나 싶다. 국사를 몰라도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건 아니다. 오히려 국사과목의 우리중심적 사고방식을 객관적 사실관계로 바꾸어놓고 이를 학생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그가 지적한대로 국어는 한국어로 바꾸어야하듯, 국사 또한 한국사로 바꾸어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사를 몰라도 된다는 말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주관을 객관으로 바꾸자는 것일 뿐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한다. 더불어 세계사도 동등한 관계에서 다루면 될 일이다. 국사를 알아야하는 것이 국가주의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국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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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 2005-01-3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이 두권의 책이 나왔을 때부터 정체성, 주체성을 따져도 꼭 뭉쳐서 덩어리로 따지는구나 이런 거부감이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 분인데... 리뷰 읽고나니 이 책은 좀 읽어보고 싶군요. 권혁범 씨가 쓴 '국민으로부터의 탈퇴'와 비슷한 맥락이 보여서...

마늘빵 2005-01-30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탁선생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만큼 싫어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어쨌든 안티세력이 생긴다는건 또 그만큼 그 사람이 생산해내는 주장의 의미가 새롭다는 것이겠지요. 전 권혁범 씨의 그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권혁범 교수도 예전부터 관심갖어왔던 분인데.

히피드림~ 2005-02-0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사놓고 바빠서(?) 아직 읽지도 못했네요. 서두에 학교얘기 하시길래 교수님인줄 알았네요.^^ 글도 잘 쓰시구요. 이 리뷰읽으니까 어서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구 서재 한번 둘러봤는데 정말 잘 꾸며 놓으셨네요.

마늘빵 2005-02-0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무리 토론형식이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무거운 주제죠. 그래서 저도 한동안 사놓고 놔두고 있다가 읽었어요. 저도 님 서재 가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