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본지 며칠이 지난 영화다. 이제야 영화감상평을 올리는건 철저히 나의 게으름때문이다. 하긴 다른 생각을 하느라 좀 늦어지긴 했다.

 밥을 먹으며 켜게 된 티비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우연히 마주친 영화다. 맨처음부터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에서부터 본거 같긴 하다. 내용의 흐름상. 그냥 밥 다 먹을 때까지만 보려고 했는데 역시 내 취향의 영화에 제대로 걸린 나는 끝내 끝까지 다 보고야 말았다.

 지루한 하루하루에 싫증을 느낀 실직 회계사 모건 설리번이 다국적 하이테크 기업 디지콥의 산업스파이가 된다. 그는 이제 위조된 이름을 부여받아 모건으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러던 중 어느날 리타라는 여인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데, 디지콥에서는 스파이들에게 세뇌용 약을 투입해 자아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건은 모건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조직에 충실한 산업스파이가 되어버린다. 디지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어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린다. 리타는 썬웨이의 스파이가 되면 모건을 구해주겠노라 약속하고 모건은 이에 응한다. 결국 이중 스파이가 되어버렸다.

 영화 <매트릭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마치 <매트릭스>와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영화에서나 이 영화에서나 주인공이 자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두 영화의 중심에는 자아정체성이라는 주제가 가로놓여있다.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네오와 또한 어느 것이 나인지,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모건. 그래서 이 영화는 <매트릭스>에서 느껴지는 신비감이 고스란히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

 어떤 긴박감은 없다. 하지만 중간템포의 빠르기로 진행되는 영화 속에서 모건의 고민은 결국 관객의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관객 또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매트릭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관객은 이미 답을 예상하고 있었고, 네오의 혼란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싸이퍼>에서는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이 바로 모건이다. 그러나 <싸이퍼>는 <매트릭스>와 같이 그 고민이 영화가 끝난 현실에까지 와서 우리로 하여금 머리아픈 고민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싸이퍼>는 순전히 스릴러 영화나 책속의 가공세계 이야기일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여실히 깨닫는다.

 본래 싸이퍼는 cipher 영(零, zero)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랍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여기서 '영'이란 모건의 '자아정체성'을 두고 하는 말일터이다. 그러나 '자아정체성'은 비단 영화 속 모건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실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고, 그나마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물음을 던진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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