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외관에 대한 관심도 변화>를 내놨으니 이번에는 내면에 대해 성찰해보겠다. 나의 외적측면과 내적측면 중 26년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어느쪽이 더 컸느냐고 하면 당연히 나는 내적측면의 비중이 높았다. 그것도 매우.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정규교과과정을 배웠고, 성실한 모범생의 자세로 임했으니 제대로 배울 것 다 배운 셈이다. 지금에 와서 그 지식이 장기기억장치에 남아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지 잊었을 뿐이지 그 내용들을 배우며 내가 느끼고 생각한 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없어지나 지식을 통한 사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유들은 계속 축적에 축적을 거급해 지금의 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가꾸는 것으로는 가장 좋은 것이 책이다. 사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책과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픈 욕구는 컸지만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몰랐다. 즉 양서를 고르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의 책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삼국지>, <태백산맥>, <동의보감> 등의 소설류와 방학전에 국어선생님이 나눠준 도서목록에서 몇 가지를 사다가 본 것이 전부였다. 책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진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로 철학서적들을 몇 가지 사서 봤지만 글자만 읽을 뿐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다.
이후 대학에 와서 경제학을 때려치고 철학으로 전과한 이후 나의 책에 대한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다독가인 것도 아니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내몰았고, 사회를 보기 위해 책을 읽었다. 철학서적은 어떤 실질적인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생각의 체계성을 만들어주는데 제격이었다. 철학자 중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칸트와 헤겔은 읽어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철학하는 방식이 좋았다. 대략 나는 체계적인 관념론에 매력을 느꼈나보다. 하지만 관념론은 매력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번에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볼테르, 루소, 홉스, 로크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이들의 서적을 읽고 있다. 철학에서의 나의 관심은 이렇게 관념론에서 계몽주의로 옮겨갔다.
내가 주로 읽는 다른 류의 책은 지식인들의 서적이다. 강준만, 진중권, 황석영, 고종석, 김호기, 임지현, 김두식, 법정 스님, 탁석산, 이윤기, 박노자, 김병익 등이 그런 류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지금 당면해있는 현실에 대한 것들이라 사회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을 재해석해 받아들여 나의 가치관을 만든다. 대부분 진보적 지식인 혹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이지만, 간혹 여기에는 복거일이나 조동일 등의 보수, 우익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저서도 있다. 그리고 신문과 주간지를 통해 현실에 대한 흐름을 놓지 않으려 한다.
대개의 나의 독서는 이런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부차적으로 고전소설이나 고전에 대한 리라이팅 방식으로 쓰여진 최근의 서적들, 그리고 무라까미 하루끼, 움베르트 에코, 조지오웰, 샐린저, 베르나르 베르베르, 김훈 등의 소설도 읽는다. 또한 내면의 이성적인 부분만으로 관심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필집도 읽고 있다. 그러나 유독 내가 읽지 못하는 것은 시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내면은 크게 이성적인 부분과 감성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성적인 부분은 대개 이렇게 철학서적과 지식인 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이루어지고, 감성적인 부분은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음으로써, 또 연주를 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 사람이 이성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경직되어 보인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지금도 내가 보기에는 내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감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 나의 외면에 대한 관심의 확장은 아마도 감성을 키우는 것이 외면에 신경쓰는 것과 어느정도 상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생각하길 나는 그다지 속이 꽉차 있는 인간은 아니다. 물론 노력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갈길이 멀다. 이 세상에는 '내공'이 큰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내면을 가꾸는 것은 내공을 키우는 것이다. 그 사람의 외면은 내면을 반영한다. 내면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외면에서 느끼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런면에서 외면을 가꾼다는 것은 내면을 가꾸는 것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