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살다 - 12년 9개월
이은의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10월
절판


은정 씨는 19살에 삼성전기에 입사해 8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대졸사원들이 신입은로 들어오면서 시작하는 G3 직급도 달지 못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고과로 인해 진급에서 누락된 것이었지만, 실제로 고졸여사원들의 진급 정체는 고착화되다시피 한 회사의 관습이었다. 광고 속의 학력철폐나 여성차별철폐는 애석하게도 삼성의 현실이 아니라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명백한 차별이었지만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탓인지, 믿을 만한 사원기구가 없는 탓인지, 정작 당사자들은 공식적으로 말이 없었다. -98-99쪽

"임우재 상무님 5분 후 도착하신다니 빨리 준비해요."

갑작스런 임종에 상복도 채 갖춰 입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는 내게 부서장과 부서원들이 로열패밀리가 떴다며 준비를 하라고 했다. 뭘 준비하라는 걸까. 어이가 없었다. 와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니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지, 버선발로 나와 손이라도 맞잡으라는 걵지. 헝가리 삼성전자 공장을 나서며 들었던 ‘상무님을 잘 모셔라’라는 말보다 100배는 더 황당하고 화가 났다. -202쪽

C상무 후임으로 온 본부인사팀의 L부장을 만나 회사 측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내 상태에 대한 진상조사와 함께 나에게나 다른 여사원들에게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조치를 요구했다. 그리고 성희롱 고지 후 바닥을 친 고과와 누락된 진급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답을 달라고 했다. 몇 주간 조사기간을 달라고 했던 회사는, 3주가 지난 후 나를 꽃뱀 취급했다.

"꽃무늬가 그려진 청바지를 입은 적이 있지요?"
"지각을 한 적이 있지요?"
"주말에 부산영화제를 다녀와서 피곤한 얼굴로 출근을 한 적이 있지요?"-206쪽

조사결과가 적힌 보고서라는 파일을 들고, 인사팀의 L부장이 추궁하듯 묻기 시작했다. 그는 성희롱 같은 일은 존재한 적도 없으며, 8개월이나 걸린 IR 부서로의 배치는 그냥 일반적인 전배조치였다고 말했다. 위의 내용들의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고 되는 양 읊어대며 원하는 액수를 말하라고 했다. -207쪽

사람들은 우리가 삼성과 싸우느라 삶이 피폐해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삼성이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어야 할 것을 주고,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으면, 언젠간 그것들이 부메랑이 돼서 돌아오기 마련이다. ‘무능’한 나도 아는 것을, 왜 스스로 S급 인력이라 자평하는 삼성 경영진들은 모르는 걸까. 회사에 애정과 열정을 쏟아붓던 이 사람들을 왜 이렇게 전장으로 내몰기만 하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73쪽

삼성그룹에서 이건희 회장은 거의 종교적인 존재였다. 회장의 결정은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평가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받을 때 그의 어록집을 외우던 것처럼, 이 회장이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이 회사 꼭대기서부터 지침으로 내려왔다. (중략) 뻔한 말이 무슨 ‘말씀’처럼 하달됐다. -332-333쪽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삼성이고, 꽤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삼성인데,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 많은 상층부로 인해, 회사의 발전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회사문화에도 악영향이 많았다. 직원들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것이 소통의 폐쇄로 이어졌다. 그런 폐쇄성에 힘입어 튼실하게 유지되는 두 개의 성이 있었다. 하나는 인권에 대한 무지와 외면이었고, 또 하나는 성역으로 군림하는 재벌총수에 대한 비판의지 상실이었다.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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