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물품 중 가장 아끼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최인호씨의 소설 '商道'를 보면, 주인공 임상옥은 중국 연경에서 장미령을 구하기 위해 홍득주의 인삼을 팔고 난 이윤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만상에서 쫓겨난 뒤 어릴적 가르침을 받았던 절인 추월암(秋月庵)으로 들어가 스님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송상 박종일과의 만남으로 절에서 나오며 석숭스님으로부터 ‘계영배(戒盈盃)’라는 초라하고 작은 술잔을 하나 받게되는데 이것은 임상옥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임상옥은 그의 말년에 쓴 자서전 '가포집'을 통해 '계영배'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를 낳은 것은 부모지만 나를 키운 것은 이 잔이다"
상인으로서의 성공 이후 그는 말년에 위기에 처했을 때 '계영배'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게 되고, '계영배'의 비밀을 알게 되며, '계영배'가 만들어진 긴 사연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이 바로 '상도(商道)'인 것이다. 상인의 도. 그는 상업을 통해 불도를 이룬 것이다.
일찍이 석숭스님은 상옥에게 계영배를 물려주며 이것이 상옥에게 있을 커다란 세 번의 위기 중 마지막 위기를 타파해줄 물건임을 말해준바 있다. 임상옥은 홍경래의 난으로 대역죄인이 되어 죽은 그의 친구 이희저의 딸을 첩실로 삼아 관기에서 양민으로 해방시켜주었다. 나라에서는 대역죄인의 딸을 양민으로 해방시켜준 것을 알고 말년에 임상옥을 감옥살이를 시키고, 유배를 보낸다. 당시 비변사로 파견된 조상영을 대접할 때 비로소 이 ‘계영배’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데, 잔에 술을 가득채워도 술잔엔 7부 정도의 술만이 남아었었고, 술 한 동이를 따라도 술잔은 계속해서 바닥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득채우지 않고 조금 남겼더니 술이 그대로 있었다. 이 잔은 가득채움을 경계하는 잔이었던 것이다. 이 술잔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가득채움을 경계하고 너와 함께 죽기를 바란다(戒盈祈願 與爾同死)"라는 내용의 8자의 글자가 새겨져있었는데 그 첫번째 네 글자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너와 함께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석숭스님과 연관되었던 것이다. 술잔이 자꾸만 비자 조상영은 화가나 술잔을 마당에 던져버렸고, 술잔은 깨졌고, 임상옥이 술잔을 찾았으나 술잔은 깨진 틈새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피는 다름아닌 석숭스님의 피였던 것이다. 후에 알게되지만 석숭스님은 바로 그 잔을 만든 우명옥이라는 장인이었으며, 잔이 깨짐과 동시에 석숭스님은 목숨을 다한 것이었다.
'계영배'에 새겨진 글자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 는 임상옥에게 장사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줬던 것이다. 석숭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욕망의 버림'을 넘어선 '생명의 버림'으로써 진정한 ‘도(道)’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줬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계영배'는 어떤 물건일까? 내 나이 스물 셋. 아직 새파란 나이이지만 지금의 나를 이룬 물건을 하나 뽑으라면 아마도 '체 게바라 평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때 미국의 랩메틀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으로 인해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까지도 체 게바라 열풍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당시 엄청난 체 게바라(아래 체) 열풍에 누군가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물으면 체를 아는 사람 중 열에 일곱 정도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뽑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생각했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너도 나도 체 게바라를 외치니까 나도 한번 따라해보자,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중 후자로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나의 삶의 방향을 감지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말이다. 체는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의 길을 걷고 있던 중 친구와 함께 떠난 중남미 여행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의 삶, 핍박받는 이들의 삶을 두 눈으로 보고 그 길로 의사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 결국 쿠바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국가 고위직에 머물기도 했지만 총살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인물이다.
임상옥에게 있어 '계영배'가 보물이고, 계영배에 씌여있던 "가득채움을 경계하며 너와 함께 죽기를 바란다"라는 말이 인생의 좌우명이었다면, 내게 있어 보물은 '체 게바라 평전'이요, 인생의 좌우명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라는 말이 될 것이다.
체와 더불어 나의 삶에 있어 어떤 지침을 내려준 사람으로 데카르트를 들 수 있다. 데카르트의 저서 ‘방법서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 명제 자체보다는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이끌어내기까지의 사색의 과정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봤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현재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임이 확실하고 그로부터 데카르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결정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따져보고 그러한 사색의 흐름을 타고 비로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계영배’는 '체 게바라 평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또한 ‘계영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