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글쓰기에 있어 사용하는 필명은 실명못지 않은 나를 대표하는 단어로써 자리매김한다. 내가 처음 인터넷 글쓰기를  시작한 1998년부터 지금까지 6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인터넷 세계에서의 나의 필명 또한 많이 바뀌었다. 그 변천사를 돌이켜보며 심경의 변화를 옮겨본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처음으로 '컴퓨터 통신'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중고등학교땐 컴퓨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게임뿐이었다. 졸업 후 대학에서 사용할 컴퓨터를 구입했는데 그 안에는 유니텔 무료이용권이 있었다.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 다른 통신사들도 있었지만 무료이용권이라는 말에 한번 써본다는 것이 그 길로 계속해서 유니텔만 사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유니텔측의 미끼에 걸려든 것인가?

 유니텔을 사용하면서 처음에 번개(인터넷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는 것)도 하고, 동호회에 가입해 함께 이야기하기도 하고, 글도 쓰며 많은 활동을 했다. 어디 이런 세계가 다 있나 할 정도로 그동안 나는 너무도 좁디좁은 학교-집 코스만이 내 전부인줄 알았던 것이다.

< 머루, 크롬 >

 유니텔 안에서 나의 '대화명'(사실 처음에 대화명이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게시판을 보면 []안에 각자 뭔가가 적혀있는 것이다.)에 대해 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당시 대화명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나는 필통에 써있던 '머루와 다래'에서 따와 '머루'를 사용하기도, 신해철의 영국유학 후 새로운 닉네임인 '크롬'을 사용하기도, 당시 열심히 였던 드럼에서 따와 '드러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라는 인간의 전체를 포섭할 수 있는 적정한 단어가 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외연은 너무도 작았다.

< 폐문 >

 이후 유니텔 아이디를 변경하면서 나는 '폐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그동안 사용하던 다른 닉네임에 비해 나라는 인간 전체를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단어같았다. 폐문! 닫힌문이다. 나의 비사교적이고 닫혀있는 성격이나 어두운 분위기를 적절하게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폐문은 곧 나였다.

< 이데아 >

 그러다가 나의 관심사가 기존에 음악:철학의 비율이 7:3 정도였던데에서, 3:7 정도로 바뀌면서 나는 철학적 측면에서 나를 표현해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물론 폐문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말고 다른 무엇인가를 찾았다. 결국 찾아낸 것이 '이데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현상학적 시각과 확고한 체계적 기준(예를 들자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헤겔의 절대이성)를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적 시각이다.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중 후자에 매력이 끌렸다. 앞서 예를 든 플라톤이나 헤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나의 닉네임은 '이데아'가 되었다.

 세상의 유토피아, 자유, 정의, 평등 이러한 추상적 이념들이 실현되는 곳. 그곳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이다. 지극히 이상적이라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기위해, 그에 닮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할 수는 있다.

 그렇게 나를 대표하는 단어는 얼마전까지 '이데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을 현상학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조건 이데아만 외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후 여러가지 닉네임을 섞어 썼다.

< 이데아, 폐문, 자유 >

 '이데아', '폐문' 그리고 '자유'이다.
 '자유'는 내가 꿈꾸는 최고 이념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적용될 수 있고, 결코 비판받을 수 없는 이념이다. 세계의 역사는 자유의 역사의 다름아니다. 많은 이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며 죽어갔고 아직 세상은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기에 멀었다. 이에 나는 그들의 삶에 동참하기로 했다. '자유'는 평생 내가 추구해야할 이념이다.

< 내이름, 이데아 >

 위의 필명들을 사용하던 중 내가 너무 이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가장 솔직한 필명인 내 이름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러다 다시 내 마음속에서 철학적 이상이 약해지는 것을 발견한 나는 다시 '이데아'로 회귀하였고, 그 후로 오랫동안 '이데아'는 나와 동일시 되었다.

< 검정벌레 >

 하지만 역시 또 너무 추상적이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에 어려운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필명이라는 것은 나를 대표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나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의 외양과 내면을 표현해줌과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어렵지 않은 '검정벌레'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평소 검정색 옷차림을 즐기고, 고독과 평온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나를 설명하기게 적절한 것 같았다. 또한 친근한 단어이기도 하다.
 
 '검정벌레'를 사용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한동안 이 필명을 바꾸지는 않을 듯 하다. 글쎄 또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썬 가장 마음에 드는 필명이다.

 

p.s 지금은 '아프락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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