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초등학교에 처음 영어 교과를 도입할 때도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사교육비 경감이었다. 하지만 사교육비가 기하급수로 늘어났고 영어 실력은 여전히 그 자리다. 영어 시간 외에는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어떤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지, 효과적인 영어 학습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저 영어를 많이 접하면 실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영어학자들은 영어를 일찍 공부할수록 영어가 중요하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해져 사교육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또 외국어이기 때문에 배울수록 실력이 나아지고 자신감이 생기기보다는 더 어렵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고 한다. -26쪽
교과서를 살펴보면 아이들이 배워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인 성취 기준과 평가 수준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 내용은 현재 아이들의 발달 시점보다 약간 높게 설정하는 것이 적절한 법이다. 이는 '학습이 발달을 선도한다'는 비고츠키의 말이나 배움의 공동체를 유행시킨 시토마나부는 '높은 레벨의 배움'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과서는 아이들을 너무 높은 수준에 올려놓는 바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성취 기준과 평가 기준이 너무 높으면 아이들에게 도전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아예 포기하고 만다. 많은 아이들을 열등생으로 만드는 교육 내용,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66-67쪽
초등 영어가 들어오면서 사교육업계는 큰 시자을 하나 개척하였고, 영어로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부모들의 경쟁까지 더해지면서 급기야 2007년에 영어 사교육비만 15조에 이르렀다. 소득에 따른 사교육비 지출은 천차만별로 학습지 방문교사부터 영어 원어민 수업, 조기유학까지 그야말로 부모 능력에 따라 고르는 상황이 되었다. 상류층의 경우 심지어 유치원에서 중학교까지 영어 사교육비가 1억 원이나 된다는 신문보도도 있었다.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학부모들은 비정규직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어 격차'는 곧 소득계층과 비례하기 때문이다.-176쪽
현장에 있는 교사는 수업하고 일하는 틈틈이 주말에 몇 번 워크숍을 한 뒤 곧바로 몇 단원을 맡아 쓰게 된다. 교원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교사는 뭔가 더 배우려고 대학원에 갔다가 배우기도 전에 일을 맡아 교과서를 만들거나 실무를 돕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는 전국에 흩어진 교사들이 각자 만들다 보니 같은 책 안에서도 진술 방식이나 구성 방식이 다르고, 단원마다 다른 느낌이 나기도 한다. 한 번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수정하고 검토해야 하는데 만나기가 쉽지 않아 나중에는 몇몇 사람이 고칠 때도 있다. 그러면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전혀 자신이 쓴 게 아니라는 항변도 나오게 된다. -262쪽
교과서의 질과 수준은 좀 나아졌을까? 집필진에 참여한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과서 체계가 새로워진 면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교사들은 교육과정 자체가 어렵고 검정기준을 통과해야 하니 여전히 내용이 어렵고 양이 많은 데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맘까지 더해져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걱정한다. 자칫 교과부가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대한 책임을 출판사로만 넘기고 질적 개선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닌가 의구심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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