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11월
품절


홉스는 여러 국가들이 제각기 자국의 일에 전념하고 다른 나라에 손을 뻗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로티우스가 제멋대로 생각해낸 국제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33쪽

샌섬의 인용을 의식하면서 말하자면, 그로티우스가 국제법을 발상학세 된 계기는 아시아 해역에서 벌어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분쟁이었지 현지 주민이 겪은 참화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보편성을 드러내는 국제법은 보편성이 통용되는 문명화된 세계, 결국은 ‘서구세계’라는 하나의 문명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문명에 대해 특수성을 드러내는 미개한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열강이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며,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35쪽

국민국가시대 세계의 교통은 국경과 영해에 의해 한정됨과 동시에, 해로든 육로든 동일한 하나의 길이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부가 들어오는 영광의 길은 동시에 부가 수탈되는 빈곤의 길이며, 권력이 전달되는 지배의 길은 동시에 억압이 초래되는 복종의 길이다. -35쪽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처음에는 세계시민주의적 주장과 강하게 결부되었던 문명/문화 개념도 어쩔 수 없이 국가이데올로기로 변용된다. -52쪽

1774년 돌바크의 ‘사회의 체계’에서
우선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문명이라는 용어가 도덕적인 주장, 모럴과의 관련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문명이란 용어는 항상 계몽주의 또는 진보주의의 맥락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문명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맥락 속에서 설령 도덕이나 인간성의 진보가 운위되더라도 그 논술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와 국민이다. -61-62쪽

피히테에게는 국민의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국가가 점차 해소될 것을 바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이상주의가 있었다. -76쪽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대등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만 했다. 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이란 다른 근대적 국민국가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그 동일한 원리가 바로 ‘문명’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문명’이란 그 나라가 근대국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었다.
-95-96쪽

① 문명/문화는 18세기 후반에 탄생한 신용어이며, 근대 유럽의 새로운 자의식과 가치관을 표명하고 있다.
② 문명/문화는 근대 국민국가와 함께 태어나 성장한 이데올로기이며, 국민과 국민국가의 존재 이유를 표명하고 있다.
③ 문명/문화는 한 쌍의 대항개념이며, 여러 국가 간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문명은 선진국의, 문화는 후진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용되었다.
④ 계몽사상의 사생아로서 처음에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문명과 문화는, 그 자체 속에 마침내 식민주의나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 전화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었다.
⑤ 문명/문화는 주권국가의 국가이성(혹은 국익)이라는 냉엄한 에고이즘과 사람들의 국민화 혹은 국민통합이라는 강제를 은폐하는 꽃장식이다. 국민 혹은 내셔널리즘을 제1의 국가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문명/문화는 그것을 지탱하는 제2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계속)-115-116쪽

⑥ 국민국가는 그 성질상 강력한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며, 국민이라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와 문명/문화라는 비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두 가지를 가려 쓰면서 체제유지를 도모해왔다. 문명/문화가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간파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115-116쪽

‘국민’이란 구성원의 의지적 동의와 연대에 의해 성립되는, 말하자면 정신적인 원리(르낭)-140쪽

공통의 조상=종족, 종교, 언어, 동일한 문화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민족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속성 대부분을 결여하고 있더라도 공속의식이 견고하기만 하면 민족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공속의식은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르낭이 시사하는 두 번째 점은 이와 관련된다. 즉 그런 공속의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신비성이 필요하다. 르낭은 그것을 "국민이란 혼이며, 정신적 원리이다."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피히테의 "본원적인 생명의 샘"으로부터 기어츠의 "본원적인 감정"에 이르는 바의 문제의 소재를 보여주고 있다. -140쪽

문화 개념은 문명에 대한 대항개념으로서 서구 국민국가 형성의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민족 개념과 거의 표리일체를 이루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문화 개념은 선진국의 우월적․지배적인 내셔널리즘(프랑스, 영국 등의 보편적이고 진보주의적인 문명 개념)에 대한 후발국(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들의 민족적 자기주장으로서, 자기의 독자성(개별적인 가치나 정신적 우위)을 강조하고 다른 국민이나 민족과의 공통성보다 차이를 강조하는 배타적인 성격을 내장하고 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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