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8
박영균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장바구니담기


문헌학적으로 이 말(휴머니즘)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마 시대의 사상가 키케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의 휴머니즘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인간다움을 의미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이 말을, ‘문명인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특성’을 가리키는 말로,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즉 후마니타스는 인간 일반에 적용되는 보편적 상 또는 이념이 아니라 ‘야만’에 대비되는 ‘문명’에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호모 후마누스(인간다운 인간)’라고 칭하면서 자신들이 ‘호모 바르바루스(야만적인 인간)’와는 다른 존재, ‘문명인’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했다. 따라서 후마니타스라는 말에는 야만인을 반대편에 놓고 자신만을 진정한 인간으로 설정하는 독단이 내재되어 있었다. -34쪽

로크는 근대적 인간의 이성을 믿었으며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조화로울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확신을 최초로 정식화했다. 그의 이런 믿음은 부패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저항할 국민의 권리까지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천부인권이라는 자연권’과 ‘하늘’, 즉 신과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것은 최종적인 심판자이다. 법 이전에 ‘천부인권적인 보편적 이성’이 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이런 보편성을 갖는 이성을 "하늘에 대한 호소"등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로크는 폭정의 상태가 전쟁 상태보다 낫다면서 권력에 대한 복종을 주장한 홉스와 달리,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애초에 그 권력의 원천이었던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해칠 때 그 권력에 저항할 권리 또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69-70쪽

한나 아렌트는 로크보다 홉스를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근대의 정치 원리가 노동과 작업의 결합을 통해서 행위를 압도한 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들, 즉 전체주의와 아우슈비츠를 낳았다고 말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삶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폴리스적 의미에서의 공공적 삶’이다. 그러나 근대 정치는 공공적인 삶보다 개인의 이익과 욕망, 주권을 더 중시하며, 공공적인 것들을 오히려 사적인 이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70-71쪽

소외는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뜻의 ‘alienatio’와 단순히 ‘양도한다’는 뜻의 ‘alienare’에서 유래했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양도’라는 의미로, 즉 어떤 대상이 그것을 생산한 자에게서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되어 소원해진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리고 18세기 사회 계약론에서는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유에 대립하는 낯선 힘에게 자신의 자유를 ‘위탁’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헤겔은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 대상화되고 그것이 다시 자신에게 전유되는 계기를 가리키는 말로 소외를 사용했다. 포이어바흐는 이런 헤겔의 소외 개념을 유적 본질로서의 인간의 자기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원래 인간의 본질에 속한 것,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안긴에 대립하여 낯선 것, 대립적인 것이 된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포이어바흐의 용법을 따르되, 유적 본질의 핵심을 노동으로 파악하고 소외를 "노동 산물이 노동을 창조한 자로부터 분리된 후 오히려 그를 지배하는 낯선 힘, 독립적인 힘"이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152-153쪽

그들(부자)의 재산은 그들의 노력과 노동만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노동으로 그처럼 거대한 재산을 모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의 재산은 노동의 가치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권력 구조, 경제 시스템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이 시스템에 저항하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창조력,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진정으로 원하는 힘을 오히려 억압하고 통제한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의 노동이 양화되는 한 인간의 자유도, 자기 가치의 실현도 있을 수 없다. -162쪽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의 노동이 자기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통제를 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들의 차이가 '생성'의 힘이 되는, 역동적인 삶의 공동체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의 종말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강제되는 노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창조된 가치가 오히려 각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권력이 되는 세계, 즉 자본주의의 소유권을 벗어나 노동이 '자기 가치화'하는 세상을, 사회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서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과 가치'가 되는 코뮌을 건설해야 한다는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163-1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