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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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원조 교제 비슷한 성매매를 하는 아이였다. 돈도 꽤 번다는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들은 못생긴 것들이에요."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못생긴 것들은 어디 가서 제대로 밥벌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발이 퉁퉁 붓도록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자기는 예뻐서 다행이라고 했다. -68-69쪽

모든 것이 시한부가 되어 버린 시대에 시한부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인 사랑은 간단하게 무시된다. 여기에 관계에 대한 존중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정서적 안정에 필요한 일시적인 소모품이 되어 버렸고, 우리 모두는 다 외로워졌으며, 그 외로움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깨져 버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소박한 꿈, 사랑이다. -76쪽

이렇게 노동을 자영업화하면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부과된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그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81쪽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이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사회보장 강화를 주장해 사회를 통해 보호받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는 줄곧 이야기한다. 노조나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나약한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고. 무엇보다 노동자 개인은 자기 관리, 자기 계발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노동자 개인의 경쟁 상대는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을 못하고, 자신의 몸과 시간을 잘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탈락할 테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다. -83쪽

대신 이 아이들은 현재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의 자본, 즉 몸에 주목한다. 영계에 대한 신화가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어리면 어릴수록 몸이 더 잘 팔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한시라도 빨리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자기 관리란 현재 즉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단식원에서 몇 달씩 지내기도 한다. 일찍부터 자기몸에 대한 자본가이며 투자자가 된다. -85쪽

이 기만이 가장 끔직한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한 ‘자격’이 필요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경제적으로 효용 가치가 있음을 끊임없이 호소하며 살아야 한다. 이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감수하면서 다른 좋은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볼품없는 일자리를 두고 탈락한 자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그 아귀다툼 속에서도 좋은 일자리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용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포레스테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시대"에 집착하지 말고 "노동의 부재에서부터 출발하여 새롭게 조직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다. -90쪽

인간의 시간이 노동과 여가,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으로 나뉘지 않고 24시간 늘 일하고 자기 계발하는 존재가 된 것은, 단지 경쟁이 가속화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봉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한 경쟁의 산물이며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임금 체계의 변화인 듯하지만, 사실은 노동자 자신의 경제적 삶을 주체화하는 방식이 극적으로 변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가 자기 삶을 경영하는 일종의 자영업자, 경영자가 된 것이다.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 관계는 이제 투자와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91쪽

신자유주의에 의해 학교와 가정 밖으로 내쳐진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학습하고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몸도 팔릴 만한 몸과 팔리지 않는 몸으로 나뉘며, 팔릴 수 없는 못난 몸을 가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 배제는 그 개인의 탓이 되어 버린다. 다시 한 번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버린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94-95쪽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린다면, 과거에는 육체가 영혼을 감싸고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겉모습이 육체를 감싸고 있다. 과거에는 육체에 갇힌 영혼을 구하고 육신의 부활을 도모하는 일이 종교의 신성한 의무였다면, 요즘 시대에는 성형외과가 겉모습을 뜯어 고침으로써 육신을 부활시켜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되었다. 이 신성한 구원의 행위에서 제외된 사람에게는 사회로부터의 영원한 탈락이라는 지옥불만 기다리고 있다. -130쪽

그 아이(일제고사를 치르고 자살한 아이)는 죽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타인으로부터 추모될 수는 없었다. 추모가 금지당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 아이는 살아서는 경쟁에서 뒤처져 잊힌 존재였고, 죽어서는 아예 존재가 말살된 존재이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존재를 일컬어 "신성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인간’은 로마 시대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지만, 절대 제물로는 바쳐질 수 없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비슷한 존재이다. 불가촉천민 역시 예전에 상위 카스트로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해를 당했지만, 불결하다고 하여 이들이 힌두교 사원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 자리를 반드시 물로 씻었다. -152쪽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범죄 역시 늘어났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될수록 노숙자나 성 소수자, 이주 노동자에 대한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고 내가 돌보고 연대해야 하는 이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좀먹고 등쳐 먹는 기생충으로 바라보는 일을 국가가 정당화해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눈에 공격받는 사회적 약자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69-170쪽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인간이 아니다. 이처럼 특정한 인간을 인간이 아닌 기생충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들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170쪽

인간은 인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된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인권의 실체는 시민권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시민이 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권을 가지게 되며, 소속 없이 순수한 인간일 때는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아렌트로부터)-174쪽

(오늘날)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는 더 이상 국민을 돌보고 훈육하고 규율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법과 제도를 맏늘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기업을 최대한 유치하고, 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일 뿐, 직접적으로 일자리의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반시장적인 행위이다. 또한 과거에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축출된 ‘잉여인간’을 국민이라는 이유로 복지 제도를 통해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잉여인간’이 스스로 구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에서만 제한적으로 돌본다. -188쪽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전 지구적 불평등 구조에 도전하기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에 의지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지역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태는 꼴밖에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도전은 지구적 수준에서의 착취와 불평등 구조뿐만 아니라, 지역적 수준에서의 착취와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도 도전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약자는 민족이라는 실패한 위안을 거부해야 한다. 대신 사회적 약자가 선택해야 하는 공동체는 바로 주변부 간의 연대인 것이다. 우리는 그 단초를 촛불 시위에서 볼 수 있었다. -216-217쪽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합의와 동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다수결, 합의나 동의는 그 사회에서 이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과정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그 협상의 테이블 바깥에 놓인 이들, 그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아무개들"이 자기 몫을 주장함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아무개들"이다. -227쪽

교육은 누군가를 계몽하고 훈육하는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교육이다. 사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사유하는 힘이 있음을 긍정하도록 힘을 북돋우는 그런 교육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사유이며, 활동이다. -237쪽

상대주의는 쿨함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기를 거부한다. 너도 나도 다 다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얼마만큼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생각하여 진리에 나아가는 일은 현실의 조화를 깨고 사회에 불화를 다시 불러들이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조주의가 폭력적으로 보수적이라면, 상대주의 역시 딱 그만큼 패배적으로 보수적인 태도이다. -238쪽

사유를 방해하는 교조주의와 상대주의의 밑바닥에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진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가 봉합이 불가능한 불화와 적대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적대와 불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냉소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240-241쪽

윤리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은 그저 타자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몸과 마음'의 문제이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의 윤리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 윤리는 폐기되고 그 자리를 '자유, 다양성, 관용'이 차지하였다고 했다. 바우만은 특히 관용이 무관심으로 타락한 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적 위기의 핵심이라며, 그 자리를 연대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용이 고통받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태도의 문제라면, 연대는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꾸는 문제이다. -247쪽

"나로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말만이 진실한 답변인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있는 것을 엄격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더 낫게 만들지 말해 줄 의무도 있지 않냐고. 내 생각에 이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부르조아적 편견이다. 역사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목표만을 추구한 작업이 의식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현실까지 바꾼 사례가 아주 많다."(<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아도르노의 말 인용)-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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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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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4: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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