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절판


물론 모든 비평가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몇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을 통한 ‘상처’의 체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상처받기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비평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통과제의(通過祭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논쟁은 자신의 편향과 입장,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서 비평가는 진정으로 성장한다고. -8쪽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모든 형태의 억압에 대한 비판과 자유라면, 지금 이 시대 문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억압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코 정치권력보다는 언론권력이다. -58쪽

이 시대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문인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계관과 정치적 입장을 지닌 언론에 대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인, 자신의 정치적, 문학적 입장에 따라 특정한 언론에 대해 투명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문인이라고 생각한다. -59쪽

삶과 예술은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태도와 예술의 태도는 같아야 한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나쁘지만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는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나의 정치적 입장, 그리고 나의 문학적 태도,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 밝히길 주저한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도 없고,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없는 것이다. 대저 가짜들은 이런 얘기 할 때는 이런 입장, 저런 얘기 할 때는 저런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섬긴다. 태도는 속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 드러난다. (함성호, ‘다시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 259)-62-63쪽

"비판으로 큰 진보집단이 자기 집단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지 않겠다면, 그 집단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강준만)-116쪽

이 논쟁은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현격한 입장차이로 인해, 의미 있는 공유나 반듯하게 정릴된 결론, 서로 최소한 수용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기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투적인 의미의 생산적인 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문학권력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지름길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문학권력 논쟁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문학장과 비평계의 모순을 투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리고 서로의 현격한 입장차이를 면밀하고도 분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권력 논쟁을 소모적인 진흙탕 논쟁이라는 식으로 단순한 잣대에 의해서 매도하는 것은 이 논쟁의 심층적인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지독히 상투적인 발언일 뿐이다. 문학권력 논쟁과 같은 격렬한 논쟁 과정에서는 어설픈 봉합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입장 차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가 오히려 ‘생산적’이라는 의미에 진정으로 값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무엇이 생산적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물어야 한다. -120-121쪽

"참된 용기는 밤을 받아들이는 용기, 진흙 수렁을 받아들이는 용기, 고통과 절망과 퇴폐마저도 받아들이는 용기라고"(김지하)-122-123쪽

치열한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인신공격에 해당되는 발언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피치못하게 혹은 무의식적으로 예민한 논쟁과정에서 그러한 발언을 했다면 당연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142쪽

적어도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은 명백한 오류에 대해서는 자기 반성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진우 역시 준열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그의 비판이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인 이상, 누구나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과오나 인신공격을 저질렀을 때, 사과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145쪽

논쟁에서 격렬한 비판이 전개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나 한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감정적인 비판과 정도 이상의 냉소를 남발하는 경우, 우리는 그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타당성 이전에 그 필자의 음험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147쪽

누구나 특정한 대상을 비판하는 동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참으로 공정하고 정당한 동기이든, 개인적 감정에서 연유한 불순한 동기이든 간에. 설사 그 동기가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비판의 내용이 옳다면, 그 주관적인 동기로 인하여 메시지 자체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논의도 일단 텍스트 자체의 옳고 그름을 통해 판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163쪽

어떠한 비판에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비판의 내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별개의 차원에서 얘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어떤 논자가 특정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163쪽

자신의 주체성과 양심을 억압하는 어떠한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울 때,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 의미에서 출판자본의 긴밀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때 공정하고 소신 있는 비평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67쪽

"사적 원한"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판 대상자의 논리를 비판하고자 했다면 해당 텍스트와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철저한 의미론적 분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체적 규명과 논리적 검증 없이, "사적 원한" 운운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함부로 넘겨짚는 것은 일종의 언어적 폭력일 따름이다. -174쪽

<비평의 희망>을 출간한 후에 필자는 논쟁적 글쓰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것은 비판적 글쓰기의 중단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의 다양화를 통해 비평적 탄력을 복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대의 비평은 나에게 치열한 비판적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내 비평적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진지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비평의 희망’의 싹을 그 근저에서부터 파괴하고 있는, 남진우의 오만한 반론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비평적 자존심과 진정한 ‘비평의 희망’을 위해서. -194쪽

모든 해석이 상대주의와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용인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작품에 대한 지나친 과잉 해석이나 주관적인 엉뚱한 해석을 비평적 시각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8쪽

비판이란 상대방의 글에 나타나는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갱신과 성찰을 촉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비판은 상대방의 잘못된 논리와 행태에 대해서 준열하게 고발하는 차원에서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간에, 비판은 근본적으로 대화적인 게임에 해당된다. -252쪽

물론 이러하 비판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리라.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판을 위한 비판’에 대응하는 과정은 피치 못하게 자신의 논리에 대한 근거 없는 모욕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방식의 논쟁이 제 삼자에게는 당연히 진흙탕 논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람들은 논쟁의 섬세한 맥락이나 세부적 진실, 주장의 차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논쟁으로 생성된 표면적인 이미지로 각기 다양한 관점을 지닌 논자들을 일률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애초에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한 논자들이 비판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논쟁에 대한 앙상한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점이 지금 이 시대의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의 일대 과제라고 생각된다. -253-254쪽

물론 외국이론가를 글쓰기에 등장시키거나 서구이론을 적용시키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안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양한 이론가와 이론이 어떠한 논리적 필연성을 지닌 채 등장하고 적용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307쪽

그 복잡미묘하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오로지 글의 논리로만 비판하는 것이 그 비판의 효과면에서도 월등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 논자로 인해 형성된 정당한 분노를 간직하되, 그 분노를 글쓰기 자체의 치열성과 면밀한 논리로 승화시켜 나가는 자세가 지금 이 시대의 논객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글쓰기 덕목이 아닐까 싶다. -332-333쪽

내 생각에는 이 논쟁이 어설프게 수습되는 것보다는, 선의의 논리적 고집을 통해 각자의 논지를 끝간데까지 밀고 감으로써, 주요 논점에 대한 치열하면서도 심화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이 정말 제대로 아름답게 싸우게 되기를 기대한다. -369쪽

이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은 창비 비판을 둘러싼 한 비평가의 사색과 고민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공적인 지면을 통해서 남기려는 내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 내 글쓰기가 그 정확한 의도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받고, 자신이 수행하는 비판의 공적인 대의를 확보하려는 이 집요한 욕망은 과연 없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내 입장을 이해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자. 타인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입장에 대해서 얼마나 투명한 태도로 내 자신을 실존적으로 기투(企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터이다. -374-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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